교회란 무엇인가
(교회의 기원과 본질을 중심으로)
지도교수: 박 형 용
본 논문을 졸업 논문으로 제출함
합동 신학대학원
박 해 동
1987년 2월
목차
서 론 .....................................................................................................................01
본 론 .....................................................................................................................
I. 교회의 어원적 고찰 .......................................................................................
II. 성경신학적 입장에서 본 교회의 기원................................................................
A. 교회의 기원에 대한 예비적 고찰.................................................................
B. 구약에 나타난 교회의 기원으로서 하나님의 나라 .........................................
C. 복음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D.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의 관계 .....................................................................
1. 하나님의 나라 성취의 이중성과 그 의미 .................................................
2.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의 차이 .................................................................
III. 성경신학적 입장에서 본 교회의 본질................................................................
A. 교회 본질에 대한 예비적 고찰.....................................................................
B. 성경신학적 입장에서 본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
1. 예비적 고찰..........................................................................................
2. 사도행전에 나타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의식.......................................
3. 바울서신에 나타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의식........................................
1) 교회는 하나님이 불러 모운 백성이다...................................................
2) 교회는 사제적인 백성 이다.(만인 사제직).............................................
3) 교회는 하나인 백성 이다....................................................................
4) 교회는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의 새로운 백성이다..................................
4. 목회적 차원에서 본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
1) 교회는 개개의 개인이 아니다 ............................................................
2) 교회는 성직자 중심이 아니다 ............................................................
C. 조직신학적 입장에서 본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 ..................................
1. 몸의 연합과 다양성과 조화.................................................................
2. 몸의 기능으로써 은사들 ....................................................................
1) 영구적인 은사들............................................................................
2) 일시적인 표적의 은사들.................................................................
3) 유기적으로 통합되는 지체 의식.......................................................
결론..........................................................................................................................
참고문헌....................................................................................................................
서론
교회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1세기 초대교회로부터 21세기를 맞은 이 시대까지도 완성되고 고정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끊임없는 논란을 거듭해 오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가 자신을 어떻게 바르게 이해하며 세상에 나타내야 하는가? 라는 문제는 계속된 자기반성과 쇄신을 유구하면서 이 시대에도 피할 수 없는 질문이 아닐 수 없다.
개혁주의 입장에서 볼 때 현대교회는 종교 개혁가들이 남겨준 성경적 교회관에 대한 유산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기보다는 오히려 그릇된 방향으로 퇴보 내지는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본다. Edmond P. clowney는 그의 저서 “ The Doctrine of the Church” 서론에서 현대교회론이 추구하는 잘못된 방향에 대해 잘 지적해 주고 있다.
한 편 지난날 괄목한 성장을 보인 한국교회의 경우만 하더라도 그 외향적 성장보다 내향적 토대가 될 수 있는 교회론이 빈약하여 오히려 중세교회 이전으로 후퇴하는 모습을 적지 않게 보게 된다.
이러한 현상을 여러 가지로 분석할 수 있겠으나 무엇보다 더 바른 교회관의 결여가 그 주요 원인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처한 시대적 상황은 바른 교회관의 정립이 그 어느 때보다 더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미력하나마 교회사역을 앞두고 성경이 말하는 바른 교회관의 정립을 정리하는 마음으로 이 주제를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본 논문의 I부에서는 성경 신학적 입장에서 교회가 어디로부터 기원하는 것인지 그 근원부터 자세히 살피고자 하며
II부에서는 설정된 교회 기원의 토대 위에서 계시의 완성부분인 신약의 서신서 에서는 교회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교회의 본질” 문제를 다루고자 하는데 여기서 본질이란 존재하게 하는 것의 고유한 특성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교회의 정체성을 논하고 마지막으로 성경의 마지막 책인 계시록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바라보는 교회”를 다루므로 바울선교의 주요 정책인 교회설립(Planting Church)의 실천신학적인 원리를 삼고자 한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 문제란 1세기 초대교회로부터 시작해서 21세기를 맞고 있는 지금 이 시대까지도 완성되고 고정된 성질의 사상체계가 아니고 여러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본 논문에서는 여러 다양한 모습 중에서도 성경신학적 입장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는 “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교회”와 조직 신학적 입장에서 “ 그리스도의 몸”으로 교회 본질에 치중하여 본 논문을 전개하며 결론을 얻고자 한다.
본론
1. 교회의 어원적 고찰
신약 서신서에서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는 “엑크레시아”는 헬레니즘 배경에서 정치적인 단체로 모인 하나의 집회를 가리키거나(행19:39 에서는 민회로 표기됨) 또는 하나의 평범한 모임을 가리키기도 했다.(행19:32-39)
즉 이것은 인간 조직체에 적용되는 단어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의 사용배경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을 “엑클레시아”로 사용하고 있는 구약성경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즉 구약의 이스라엘 회중을 가리키는 말로써 LXX(70인경)에서 이미 널리 사용된 카할( Kahal)을 번역한 말이다.
구약에서 이 카할은 명사로 128회 동사로 42회 , 일반적인 백성이란 뜻으로 111회 그리고 종교적 집회로 72회 사용되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 용어의 가장 많은 사용 빈도는 종교적 목적으로 지금 여기 모여 있는 백성이라는 뜻이 주요한 의미로 나타나 있으며 혹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의미로 나타나는데 후에 신약교회를 이렇게 부르게 되었다(마16:18. 18:17. 데전2:12 등 등)
그 밖에 교회라는 말이 카할 외에 에다(Eda)가 쓰이는데 이 말은 회중이 회집하였든지 아니 하였든지 회중 자체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던 것에 반해 카할은 실제적으로 모일 때 사용되었는데(민14:5. 출12:6) 특히 민수기 1:18절의 경우는 70인경에서 두 단어를 똑같이 같은 말로 번역한 경우인데 이 말이 시나고규(Synagogue)라는 것이다. 즉 흩어진 유대인들(diaspore)인 모임 장소로 회집한 것을 지칭하는 것인데 이것이 신약에 와서 “엑클레시아”(εκλησια) 로 번역이 되었다.
그러므로 엑클레시아는 예배를 드리기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가리킬 수 있으며 어떤 건물로써의 의미가 아니라 성도들의 모임을 일컫는 것이라도 어원적 정의를 내릴 수 있다.
II. 성경신학적 입장에서 본 교회의 기원
A. 성경신학적 입장에서 본 교회 기원에 대한 예비적 고찰
성경 신학이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아계시(The self-revelation of God)의 과정을 취급하는 주경신학의 한 분야이다. 이 계시는 일시에 완성이 된 것이 아니고 계시의 점진성을 가지고 역사의 전 과정을 통해 이룩된다. 따라서 구약 성경 안에 나타난 역사적 사건들이 하나님의 계시의 점진 성(Progressiveness) 이라는 흐름에서 분리되어 진다면 그 어느 사건도 바르게 이해될 수 없다. 여기서 점진성이란 유기적 성격을 가진 것으로써 “씨” 또는 “형태”로부터 시작해서 “완전한 성장”에의 도달을 의미한다. 그러나 질적인 의미에서 그 씨가 나무보다 덜 완전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구약을 계시의 씨와 나무와 줄기에 비유한다면 복음서는 계시의 꽃이요 서신서는 열매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의 계시를 성경의 각 시대를 통하여 시대적 수준에 맞는 방법으로 전진시켜 가셨기 때문에 계시의 완성 부분인 신약의 서신서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의 근원으로부터 그 점진적인 발전 과정을 추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어디로부터 기원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성경신학적 입장에서 고찰해볼 때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는 것은 구약에서는 교회라는 단어가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것과 신약복음서에서 단 두 번 사용되었을 뿐 거의 대부분은 신약의 서신서에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교회가 신적인 계시와 권위 위에 기초하지 못하고 신약시대에 들어와 마치 필요에 의해 생긴 것처럼 오해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 헤르만 리델보스는 그의 저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교회는 자기의 존재와 자기의 존재 양태를 “하나님의 나라”에서 얻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계시에 속한다는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계시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니며 예수는 단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선지자이지 교회에 속한 선지자는 아니었다고 주장 하는데 즉 하나님의 나라는 신적이며 영적인 것이지만 교회는 사회적인 현상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와는 아무런 내적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헤르만 리델보스는 계속해서 신약성경의 교회 개념에 대하여 완전하고도 정당하게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나라에서부터 인 것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엑클레시아”라는 단어가 구약과 신약복음서의 전면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하여 우리는 속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에 의해서 전파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의 민족이 처음부터 나타나서 점점 갈수록 그 윤곽이 더욱 뚜렷해지기 때문이다. 이 개념은 옛 이스라엘 즉 언약으로 약속된 민족에게서 미리 형성 되었다. 그러므로 복음서에서는 더 이상의 선언이나 설명없이 그 민족이 엑클레시아(마16:18. 18:17)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미 교회의 어원적 고찰에서 살펴본 것처럼 신약 성경에 나타나는 엑클레시아는 새로운 개념이나 단어가 아니라 이 말은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 곧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말로 이미 LXX(70인 경)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카알을 번역한 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교회에 대하여 얻을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은 이 엑클레시아가 이제 하나님 나라의 빛 속으로 들어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이전에 엑클레시아를 지칭하던 용어이던 선택의 백성, 언약과 약속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승화되어 신약성경에서 성취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기원과 그 접근을 하나님의 나라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완전하고 정당한 것임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B. 구약에 나타난 교회의 기원으로서 하나님의 나라
본 논문의 성경신학적 입장에서 본 교회 기원의 예비적 고찰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교회 기원에 대한 접근 방법을 하나님 나라에서 출발할 것을 전제했기 때문에 이제 구약에 나타난 교회의 기원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 개념을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 개념을 고찰해볼 때 구약에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Bsileia)와 상호관계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 개념은 매우 풍부하여 왕국(Kingdom) 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을 뜻하는 대명사와 함께 여러 번 나오는 것이다.
복음서에서 사용된 하나님의 나라(Basileia)는 히브리어의 말쿠트 샤마임(Malkut shamaim )에서 나온 말인데 이는 하나님의 왕권, 주권, 혹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으로 번역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쿠트 샤마임은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독창적으로 사용하신 용어라기보다 이미 구약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으며 한 편 예수님 당시의 유대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던 하나의 신학적 용어 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과 세례요한이 아무런 설명도 없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막1:15. 마3:2. 4:17)라고 선언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말이 가지고 있는 구약적 배경 때문 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구약에는 하나님이 왕 이시라는 중요한 사상을 나타내주는데 만물의 창조자 이신 하나님께서 전 우주적인 왕권을 가지시지만 특별히 인류 구속사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 안에 그의 특별한 나라를 가지시며 왕권을 가지시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시며 이스라엘은 그의 백성이 되는 대표적인 성경구절은 출19장에서 나타난다.
보통 시내산 언약으로 표현되는 이 구절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공식적인 국가 탄생을 가지게 되는데 이것은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언약의 문구에서 강조된다.(출19:5)
그 외에도 사41;21, 렘8:19, 민12:12 등등의 구절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언약으로 인한 특별한 관계인 것을 증거 해준다.
이러한 하나님과 그의 선택된 백성 사이의 언약 개념은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에서 지배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 백성으로서 왕국 개념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그 밖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도 자기 백성을 통치하는 수단이요 법령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광야 시대의 성막과 구름 기둥의 승강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임재해 계시며 통치하시는 상징으로서의 의미가 있고 그 이후 가나안 정복과 사사시대 그리고 왕국 시대를 거치면서 등장하는 사사들이나 왕들일지라도 모두가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Human Mediator로의 의미를 가질 뿐 진정한 이스라엘의 통치자는 하나님이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특별 왕권에 대해서는 몇 가지 주요 특징으로 정리 될 수 있다.
첫째 구약에 나타난 이 특별 왕권은 다윗의 후손 가운데 메시야와 관련하여 미래적 소망을 가지고 나타난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다윗에게 말씀 하시기를 장차 네 후손을 통해 영원한 나라를 세우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삼하 12-14장) 이 메시야 적 왕권과 나라에 대한 소망은 이스라엘의 전 역사 속에서 발전되어 갔던 것이다.
이런 사상은 구약 성경 중 후기에 기록된 책들과 선지서에서 현저하게 나타난다.
국가로서 이스라엘이 계속 쇠퇴하고 이방 나라의 권력에 점령당하므로 이스라엘에 계시된 하나님의 왕권과 실제로 발생하고 있는 역사의 흐름 사이에 긴장이 생기게 되었는데 이런 긴장된 형편에 대해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미래 통치와 왕권에 대해 예언을 한 것이다.
선지자들을 통해 계시해주신 하나님의 미래 왕권에 대한 대망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미래에 구하시겠다고 하는 전체 구약의 구원 약속의 중심이 되는 사상이다.
이러한 미래 구원의 약속 사상이 구약에 자주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약속은 구약 예언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사40-55장. 사24-27장. 슥9-14장. 욥21장 미4:3 습3:5 )
이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미래 왕권에 대한 소망을 가졌지만 그것이 배타적 이었던 것에 반해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미래 왕권이 아브라함을 통해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계시한 것처럼 온 세상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통치에 돌아올 것을 그들의 예언서에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둘째 구약에 나타난 이 특별 왕권은 “인자”에 관련하여 사용되고 있다. 특히 위에서 언급한 메시야 대망 사상과 관계된 미래 개념을 생각할 때 다니엘서에 나타나는 “인자”는 메시야 사상과 미래 왕국 개념 양자를 모두 만족시켜 주는 계시이다.
다니엘서는 세상의 나라와 하나님이 세우시는 한 영원한 나라가 서로 날카롭게 대립되고 있는데 단 7장은 하나님이 세우시는 한 영원한 나라가 인자와 거룩한 성도들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셋째 하나님의 특별한 미래 왕국은 초자연적인 성격으로 설립될 것인데 이것은 심판의 양상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 때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지 않은 백성은 영원한 멸망을 피할 수 없으며 언약관계에 있는 백성은 초자연적인 구원에 참여될 것이며 그 구원은 영원할 것이다.(사51:6)
이처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이며 하나님이 왕 이시라는 특별 왕권 개념은 구약 안에 풍부히 내재되어 예수님의 천국 선포의 배경이 되고 있는 것이며 예수님 자신도 예루살렘을 큰 임금의 성 이라고 부르신 것이라든가(마5:35) 이스라엘을 그 나라의 본 자손들 이라고 부르심으로 (마8:12, 21:43) 자신의 사역이 구약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계시와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내셨다.
그러므로 구약에 나타나는 많이 메시야적 예언은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를 나타내주는 자연스런 결과라고 해석 할 수 있다. 즉 이스라엘 역사의 왕들조차도 하나님의 이상적인 대리자로서의 의미 뿐 아니라 이 제도가 장차 선지자들이 묘사한 것처럼 미래 통치자로서 메시야를 대망하는 것이라면 이 모든 것은 장차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하고도 이상적인 의미에서 실현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 것처럼 구약에 나타나있던 교회의 기원은 교회가 신약에 출현되기 이전에 이미 구약에서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왕권 개념으로 하나님 나라의 존재양상을 띠고 있었다는 것과 이러한 교회 기원의 씨(Seed)가 신약에 와서 발아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오심이 필연적으로 예언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나라의 임하심이 자기를 통하여 이루어지며 구약의 모든 역사가 자기에게 집중되어 있으며, 구약의 왕들이 자신에게 상징적인 조상들 이었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런 구약적인 배경을 가지고 신약 복음서에서 하나님의 나라 선포를 주제로 해서 등장하시게 되는 것이다 (마4:17, 말1:15)
구약에 나타난 교회의 기원은 조직 신학자 루이스 벌콥도 그의 교회 교의학에서 신약의 교회가 출현하기 전 이미 구약 안에 존재하였던 교회의 모습에 대해 “ 교회는 아직 독립적인 조직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의 나라로 상징되는 이스라엘 이라는 국가 안에서 그 조직적 존재를 지탱한 것 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상에서 신약에 나타나는 교회의 기원으로써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 개념과 그것이 장차 가리키게 될 방향을 생각해 보았다.
C. 복음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 마16장을 중심으로 )
신약성경의 첫 장은 구약의 전 역사를 한 족보 속에 함축시키고 있다. 성경에 나타난 족보들의 기능은 어떤 근원에서 시작된 역사가 어떤 전환점에 이르렀을 때 이제 시작되려고 하는 역사의 근원이 어디인가를 거슬러 올라가며 그로인한 새 역사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에 대한 하나님의 어떤 의도를 나타내 주는 것인지를 밝히는 것인데 “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로 시작되는 마 1:1의 말씀은 구약과 신약을 연결시키는 가교로써 지금까지 구약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꿰뚫고 나온 하나님의 계획이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 직결된 것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로 그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 주권을 이 세상 가운데 실현시키는 자기 백성의 왕으로 오셨다는 것을 마1:21절은 밝히고 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시작하는 첫 메시지의 주제도 “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와 있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는 것이었으며 12 제자를 선택하시고 보내시면서 하신 말씀도 “천국이 가까이 와 있다고” 전파하라 하셨고(마10:7) 70인을 따로 세워 각 동네로 보내실 때도 “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와 있다” 하라고 명하셨다(눅10:9). 또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수 많은 사역(이적)들과 메시지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관련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제시는 정치적인 나라의 제시가 아니요 국가적이며 물질적인 축복도 수반하는 것이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원수를 제압하기 위해 정치적인 왕을 원했으나 예수님은 세상의 왕권을 거절하셨으며 (요6:15) 세상 나라 대신 영적인 빵을 제시하셨다(요6:25-27) 또 예수님은 개인에게 말씀하셨으며 새로운 관계의 조건은 오직 개인적으로 결단을 내리는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 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아브라함의 자손 이라는 것이 유대인으로 하여금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받기에 합당한 자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며 이런 사상은 세례 요한의 예비 사역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마3:7-10)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러한 새로운 관계를 거절 했으며 다윗과 같은 영광의 왕으로서 이 세대에 종말을 고하는 메시야 왕국을 기대했기 때문에 비록 예수께서 놀라운 기적들을 행하셨을 찌라도 그가 메시야 인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또 한 편 예수께서 외견상 다윗과 같은 왕이 아니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가 메시야 이심과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가운데서 현존하고 있다는 것을 제자들은 뒤늦게 깨닫게 되었는데 이러한 배경 속에서 최초의 “엑클레시아”로서 교회의 언급이 마태복음 16:16절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즉 마16장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두 질문 사이에서 예수님은 구약의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이 신약의 에클레시아로 대치되는 획기적인 선포를 하시게 되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자기 백성의 왕으로 오셨고 또 메시야된 표적을 많이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거부당하신 시대적 상황에 반해 자신을 그리스도 이며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사람들을 통해서 옛 이스라엘을 대신하는 새로운 이스라엘 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교회를 세우게 되시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하신 말씀에 대하여 G.E. Ladd는 그의 저서 “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서 예수님의 이 선언은 예수님 자신이 메시야 되심을 분명히 주장하는 것과 또한 하나님 나라를 제시한 것을 거절했던 예 이스라엘을 대신하는 새로운 백성을 만들어 내시려고 의도하셨음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며 또 어떤 현대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와 아무 내적인 관계가 없는 사회적 현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계획 하셨고 또 때를 보아서 정하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마16장의 교회 설립 의도를 나타내시기 전 이미 첫 제자들을 부르실 때부터 드러나고 있는데 베드로를 부르실 때도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 이니 장차 게바(반석)라 하리라 하신 것이라든지 이미 제자들의 집단 자체가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가견적 교회를 형성하고 있었던 점으로 보아 마16:16절에서 “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미래형으로 말씀 하신 것은 어떤 중대한 때를 의도 하셨음이 분명한데 이는 교회 설립을 말씀하신 마태복음 16장이 아직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하기 전이었음으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이심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으로 ”주와 그리스도“ 이시라고 공언할 수 없는 시간적 제약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마16:20절 에서는 교회 설립을 의도를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아직 자신이 그리스도 이신 것을 말하지 말게 하신 것이며 교회 설립을 미래형으로 말씀 하셨고 이어서 16:21절 부터는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과 삼일 만에 다시 부활 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교회 설립의 “때”와 관련된 것으로써 드디어 “ 내 교회를 세우리라”는 약속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예수께서 주와 그리스도 되심을 실증 하신 후인 사도행전 2장 오순절 성령 강림의 날에 성취되는 것을 보게 된다.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은 교회사적으로 의미 심장한 사건으로써 교회를 위하여 발생된 사건인데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이 교회가 자신이 친히 세우는 교회라는 것을 공언했던 마 16;18절의 약속을 실현시키신 인치심이요 보증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기원과 통치는 예수님의 메시야성에 의존된 것으로써 참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교회의 기초가 달렸고 이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 교회의 임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지금까지 생각한 것들은 “ 교회가 어디로부터 기원되는 것인가”를 고찰하였는 바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구약이 대망해온 메시야 권을 갖게 되는 새로운 단계의 결과로써 그 나라의 형태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D.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관계
위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그 기원을 가지며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가 신약의 교회로 실현된 것이라고 했을 때 제기되는 문제는 구약이 대망했던 바와 같은 하나님의 통치가 종말론 적이며 완성적인 형태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혀 교회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며 불완전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구약에서 대망해온 하나님의 나라 개념이 어떻게 이 교회 시대에 실현되고 있으며 어떻게 그 종말론적인 완성을 지향하고 있는가를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1. 하나님 나라 성취의 이중성과 의미
위에서와 같은 질문의 대표적인 인물은 세례요한 이라고할 수 있다. 그 때는 아직 교회 설립이 공식적으로 선포되기 이전 이었지만 어쨌든 구약이 대망해온 메시야가 오시면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기대 했었기 때문에 세례요한 자신도 “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던져 태우 시리라”는 심판 성격의 하나님 나라 도래를 예고 했었던 것이다 (마 3:12)
그러나 예수님이 오셨어도 구약이 대망해왔던 바와 같은 종말론적인 통치가 나타나지 않자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 오실 그이가 당신 입니까?(마11:13) 물었을 만큼 의문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구약 이사야 선지자가 예고했던 메시야적 표적이 어떻게 자신을 통하여 성취되고 있는가를 강조하시며 여러 가르침을 주셨는데 특별히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여러 천국 비유를 통해 “ 하나님 나라” 성취의 이중적 의미를 나타내 주시며 자신이 오심으로 구약이 대망했던 하나님의 나라의 성취가 이중적인 구조가 있다는 새로운 계시를 가르쳐 주셨는데 곧 천국의 현재성과 미래성 곧 이미 도래하였으나 아직 완성은 아닌(Already Not Yet) 천국 계시를 통해 이미 도래한 천국의 현재성을 여러 천국 비유를 통해 가르쳐 주신 것이다.
1) 씨 뿌리는 비유
천국은 씨를 뿌리는 자가 나가서 씨를 뿌리는 것과 같은데 천국의 말씀이 전파되면 이미 천국은 온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추수 때가 아니고 씨가 여러 상태로 뿌려지고 자라야 할 때라는 것이다(마13:1-23)
2) 가라지 비유
이 비유는 천국의 현재성과 미래성 이라는 이중 구조에 대해 더욱 선명한 이해를 제공해 주는데 예수께서“ 가라지와 알곡이 함께 자도록 내버려 두라” 말씀하심으로 지금이 추수 때(종말론적 심판기)가 아닌 것을 암시하셨다.)
3. 바다에 그물을 내리고 각종 고기를 잡는 비유
또 천국은 바다에 그물을 치고 각종 물고기를 잡는 것과도 같다고 하셨는데 그물에 물고기를 모우는 기간이 있고 가득차면 물가로 끌어내어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게 되는 것처럼 세상 끝에도 그러하다고 하시며 이미 물고기를 모우는 활동이 있으면 천국이 시작된 것이며 가득히 모우는 기간이 세상 끝 날까지 이어질 것을 가르치셨다(마13:47-50)
이와 같이 구약에서 대망했던 하나님의 나라가 단 번에 오는 것이 아니요 두 단계에 걸쳐서 오는 것임을 가르쳐 주셨는데 당시에는 모두 구약의 예언적 소망과 후기 유대주의 문학의 묵시적 소망에 영향을 받던 시대였으므로 아무도 하나님 나라의 이중 구조 성취의 의미를 생각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 이런 구별이 없이 앞에 생길 것과 뒤에 생길 것을 총괄적으로만 이야기 한 셈인데 이는 마치 두 개의 산봉우리가 멀리서 볼 때에는 겹치게 보여서 하나의 산으로 보이지만 다가가서 보면 두 개의 산 사이에 큰 간격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시작과 세상 끝 사이에 구분이 있어서 이중적인 성취를 가지게 된다는 새로운 계시를 예수님이 오심으로 나타내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의 차이
위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종말론 적으로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께서 이미 오심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라는 형태로 세상에 현재하는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상이성과 연계성을 분명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첫째 엑클레시아는 본질적으로 현재의 것이요 미래에 지양될 것인 반면 바실레이아( )는 현재에 돌입하여 있는 것이면서 동시에 결정적으로 미래의 것이다.
둘째 엑클레시아는 마지막 시대의 중간 시기를 순례하는 어떤 잠정적인 것인 반면 바실레이아( )는 마침내 모든 시대의 마지막에 결정적으로 영광이 나타날 어떤 확정적인 것이다.
셋째 엑클레시아는 죄인과 의인을 동시에 안고 있는 반면에 바실레이아는 전적으로 의인들의 나라이다
G.E. Ladd는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와의 관계를 그의 저서 “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 이태운 옮김 (서울:엠마오 출판사 1985)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말하고 있다
“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사이의 불가분의 관계가 존재하지만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고 교회는 사람으로부터 출발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통치이며 그의 통치의 축복이 경험되는 영역 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고 그 축복을 누리는 자들의 교제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를 창출하고 교회를 통해서 일하며 교회에 의해 세상으로 전파된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의 관계를 생각할 때 구약이 대망해온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마침내는 시공간의 제한을 받는 인간 역사에 들어와서 가견적이며 제도적인 모습을 갖게 된 것이 교회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교회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 될 수 는 없으나 하나님의 나라와 결코 뗄 수 없는 관계로서 그 나라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인 완성을 향해 실현되어 가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가 마치 하나님의 나라 그 자체인 것 처럼 교회 지상주의를 내세워 과거 로마 카토릭의 잘못을 범하는 것도 문제 이지만 다른 한 편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 될 수는 없지만 이미 그 나라의 시작이요 그 나라의 능력과 권세를 세상에 나타내는 하나님 나라의 활동 기관인 것을 모르는 데에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사도들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인식은 항상 교회를 통하여 반영 되었는데 곧 교회를 위한 활동 자체를 곧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활동과 동일시한 것이다.
이 점은 특히 바울 서신에서 잘 나타나 있는데 바울은 하나님 나라 성취의 이중적 구조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현재의 교회 활동을 하나님 나라의 활동으로 본 것이다(고전4:20-21. 골 4:10-11. 딤후 4:10-11 등 등)
III. 성경신학적 입장에서 본 교회의 본질
A. 교회 본질에 대한 예비적 고찰
여기서 교회의 본질을 논하기 전에 먼저 본질 (本質. Essence)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가 필요한데 본질이란? 인식 내용의 근거가 되는 것 즉 그것이 그것으로서 있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하며 현상을 성립시키는 근본적인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교회를 그 근원부터 알기 위해 성경신학적인 관점으로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 개념에서부터 신약의 교회 설립 까지 연결된 맥을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내용을 기반으로 해서 신약에 나타난 교회가 어떤 본질을 가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나 이 본 논문의 서론에서 밝힌 바와 같이 우리가 교회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알기 원할 때 성경에는 온갖 종류의 상징들과 형상들 그리고 비유들이 겹겹이 포개져 있어서 교회를 지칭하는 형상들이 적어도 80 개 이상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 자체가 어떤 것이며 또한 교회의 경계는 정확히 어떻게 그어지는가를 분명하게 정의하기가 어렵다
이같은 교회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은 부르스 라이츠먼이 지은 그의 저서 “교회의 의미와 사명, 김득중 옮김(서울: 컨콜디아사 1981)에 잘 소개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교회의 다양한 표상들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의 서신서에 반영되어 있는 교회의 가장 근본적인 특징은 그 집단적 성격이다.
“공동체에 대한 현대인의 소신과는 달리 교회는 정신적으로 본리 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개의 신자들의 모임이 아니다. 성경의 어디를 보나 교회는 신자들의 결합, 하나의 단위 혹은 집합적인 실체, 그리고 유기체로 묘사되어 있으며 상호간의 사랑과 그리스도에 대한 공동의 헌신으로 굳게 결속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은 에클레시아 즉 교회를 설명하기 위해서 ” 성도들, 양떼, 가족, 나라 포도원.......식물, 빵덩이, 등대, 여자, 새사람 등과 같이 그 핵심적인 표상이 단수로 되어 있는 것들도 분명히 그 성격상 집단적이며 사회적이며 공동체를 상징하는 표상들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많은 표상들 가운데서 교회의 가장 근본적인 특성인 집단적 공동체적인 정의는 무엇이겠는가?
교회를 의미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정의를 놓고 로마 카토릭의 경우는 제2회 바티칸 회의(Vatican II) 이래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강조하던 것에서 탈피하여 ”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교회“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교회에 대한 교리적 헌장(The Dogmatic Constitution on the Church)”인 루멘겐티움(lumen Gentium)의 핵심 모델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선포함으로써 교황이 신비적인 몸(Mystici Corporis)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교회를 하나요,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로마교회로만 정의하고 방어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신비적인 몸” 으로 대표할 수 있는 전통적인 로마 카토릭, “그리스도의 몸” 신학에서는 몸이 계급적으로 조성되어 있다는 가정 아래 몸의 영혼과 성례전으로서의 몸과 계급적으로 조직된 교회의 영혼으로서 성령에 대한 개념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진리는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그의 역할을 담당하므로써 몸에 대한 머리로 몸을 대표하고 있음을 지적해 준다.
제2 바티칸 회의에서 신학자들이 교회의 기본적인 정의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강조한 사실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계급적이고 성례전적인 해석을 경감시키려는 노력 이었다
그러나 로마 카토릭의 잘못된 견해를 차치하고서라도 교회의 기본적인 정의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주장한다는 것은 교회의 공동체적 성격을 온전히 드러내기에는 미흡하다 아니할 수 없다. 예를 들면 교회가 몸이라고 하는 표상은 각기 상이한 은사들을 가진 신자들 서로 간의 관계를 잘 묘사해주며 공동체적인 성장과 교회 성숙을 잘 보여주지만 교회가 몸이라는 표상을 갖게 될 때에 이것은 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사명인 선교적 확장을 위해 사용하기에는 어색한 모델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신약에 나타난 교회의 특성을 표상하는데 있어서 이보다 더 좋은 모델이 없다고 믿어진다. 과연 바울은 가장 모델적인 용어인 “그리스도의 몸” 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였다.
그러나 성경신학적인 입장에서 신구약 전체를 망라하여 구약과 신약의 교회를 연합시켜 하나의 교회로 표현할 수 있는 포괄적인 용어는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의에 비길만큼 좋은 다른 표상은 달리 없다고 믿어진다.
또 이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 할 수 없는 현재의 위치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와의 관계에서 가장 밀접하게 표현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상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교회의 기본적인 정의로써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상을 사용하는 것도 교회의 집단적이며 사회적이요 공동체적 성경을 충만히 드러내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성경해석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가 되는 성경 구속사적 견지에서 볼 때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표상하는 것이 신구약을 망라하여 교회의 공동체적 성격을 드러내는 가장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이제 본 논문의 서두인 “성경신학적 입장에서 본 교회 기원에 대한 고찰에서 교회의 기원을 “ 하나님의 나라”에서부터 접근을 시도한 것처럼 본 논문의 마지막 결론으로서 교회의 기본적인 핵심본질을 정의하기 위해서 성경신학적 입장에서 본 “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 본질을 살펴보고자 한다.
B.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
1.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 이해를 위한 예비적 고찰
이미 I부에서 다룬바 있는 성경신학적 입장에서 본 교회 기원에서 교회 본질에 대한 해답이 어느 정도는 명시되어 졌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이 문제를 구체화 시키는 것은 교회 본질에 대한 다양한 혼돈 가운데서 가장 기본적인 핵심 정의를 성경신학적인 관점에서 고찰하기 위함이다.
I 부에서 얻은 결론으로는 교회가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와 연결선상에 있다는 것과 그 하나님의 나라가 신약에 와서 가견적인 교회로 역사 안에 구체화 되어 성령 안에서 실현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며 그 교회가 아직은 종말론적 지향을 가지면서 하나님 나라의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였다.
이처럼 교회가 하나님 나라 안에 그 존재 양태를 가진다고 했을 때 하나님의 나라 개념에서 교회의 기원 찾기를 접근 했듯이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교회 본질을 유추해 내는 것은 매우 당연한 귀결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나라의 개념에는 주권과 영토와 백성 이 삼 요소가 포함된다. 그러나 성경에서 나타내는 하나님의 나라 개념에는 영토적인 개념보다는 특히 역동적이며 추상적인 “통치 주권”개념이 강조되며 이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백성과 결부되는 것이다.
이제 신약의 교회가 엣 이스라엘이 가졌던 하나님 나라 백성의 자격을 동일하게 계승하므로 교회는 곧 하나님의 백성 아는 용어 사용의 당위성을 고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이것은 이미 마태복음 16:18절에서 나타난 교회의 기원에서 언급된 바 있지만 특별히 바울 서신의 도처에서 발견되어 진다.
바울은 로마서9-11장에서 이스라엘의 문제를 길게 토로하는 가운데 교회가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 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런 사실은 호세아서에서 따온 인용문에서 가장 명백히 표현되는데 이 문맥에서 선지자는 다시 타락된 이스라엘의 모습과 종말론적 구원에 대해 말하면서 “ 내가 내 백성이 아니었던 자에게 ........주는 내 하나님 이시리라 (호2:2)고 밝힘으로 이 말씀을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에 적용시키고 있는 것이다. (롬9:24)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호칭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백성들이 색다른 기초 위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유대 백성은 여전히 거룩한 백성이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롬11:16)
그러나 바울은 유대 백성을 여전히 거룩한 백성이라고 밝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전체 백성과 믿음을 간직한 남은 자를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롬9:6)에서 보여진다. 즉 민족 전체가 메시야를 거부하였을 때에도 은혜로 택함 받은 믿는 사람들(롬11:5)이 있었는데 여기에 이방인들이 더하여 진 것이다.
바울의 감람나무 접붙임의 비유는 하나님의 언약백성 즉 이스라엘과 교회의 통일성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살아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구약 이스라엘의 뿌리와 줄기로부터 왔다는 것을 완전하게 설명해 준다.
이상과 같은 언급에서 신약에 나타난 교회를 말할 때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 모두를 총망라하여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전제한다.
그렇다면 신약의 교회가 구약의 이스라엘을 대신하는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 이라는 자의식은 어디에서부터 실제적인 기원을 갖는 것인가?
물론 제자들의 이해 여부와 관계없이 예수께서는 마16:18절에서 이 점을 선언하시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선언이 제자들과 초기 교회에 자의식화 된 것은 사도행전 2장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부터 인 것이 확실하다.
2. 사도행전에 나타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의식
예수님의 부활로부터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기간은 아직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들을 세상 가운데 나타내기 위한 태동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후 준비과정에 있던 제자들의 공동체에 구약에서 예언되었던 성령이 부어짐으로써(겔36:26-28. 렘 31-33), 깨어진 엣 언약의 백성들을 대신하는 새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교회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 또 새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나의 신을 너희 속에 두어 ........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겔36:26-28)
“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의집에 새언약을 세우리라.........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렘31-33)
또한 요엘서 2:28-32절의 예언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새로운 공동체는 놀라운 생명력과 능력을 받았다.(행2:1-36)
이로써 제자들의 작은 공동체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본질을 가지고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특히 성령 강림의 날에 사도들이 받은 언어의 특수 은사와 하나님의 큰일(복음)을 선포하는 것에서는 (행2:1-36) 그 엣 날 바벨탑 사건으로 말미암아 민족적 분열이 야기되고 분열과 혼란의 상징이 된 것과 반대로 (창11:1-9)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출현되어 통일성과 보편성을 가지게 되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사방에서 몰려온 이방인들도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에 들어오게 되는 역사가 시작된 것을 보여준다. (행2:37-42)
초기 교회는 이렇게 한 마음이 되어 일종의 공산식 생활을 시도했을 만큼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철저한 공동체를 이루었다. “ 이렇게 새 공동체는 자신들이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들과 연속적인 관계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았고 자신들도 이스라엘이 받았던 언약과 약속과 임무를 똑같이 받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베드로의 초기 설교들(행2:14-36, 4:8-12)과 스데반의 복음에 대한 변증(행7:2-53)은 초대 기독교 공동체가 얼마나 자신들을 이스라엘 언약 전승에 비추어 잘 이해하였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3. 바울 서신에 나타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의식
바울의 교회관의 바탕에는 그 자신의 극적인 체험이 깔려 있다. 교회를 박해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극적으로 예수를 만나고 개종하게 된 그는 거기서 그리스도를 체험하였고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로다” 하는 말씀에서 그리스도와 교회는 하나라는 진리를 터득하였으며 유대인들이 이 사실을 거부하는 것을 보고 묵은 이스라엘의 시대와 사명은 끝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형성되었음을 깨닫고 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새 이스라엘 이며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는 고통스런 과정을 통해 확장되어 갔다
여기에는 혈연에 의한 상속만 생각하고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묵은 이스라엘과 그리스도 안에서 이스라엘의 완성을 인정하는 영적 이스라엘의 대립이 있었는데 이 두 가지 이스라엘을 구별하는 기준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유무에 있었다
하나님의 새로운 약속의 상속자로 불리운 이스라엘은 그들의 구원을 약속에 대한 신앙 위에서 찾지 않고 신앙의 보조 수단에 불과한 율법과 할례에서 찾으려 했기 때문에 걸려 넘어졌다. 이 걸림돌은 물론 그리스도이시다.(롬9:30-33, 11:20)
그리고 이것은 이미 구약에서 예언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8:14. 28:16)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이스라엘의 완성을 인정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참 자손이요 (갈3:17)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진짜 백성이며 이들과의 사이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맺은 새 언약을 성립시키시었다.
구약의 백성은 혈연에 의하여 반강제적으로 형성된 백성이지만 신약의 하나님의 백성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 자유로운 신앙으로 가입하는 새로운 이스라엘 이므로 자유로운 백성이었다.
이것은 이미 사도행전에 나타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의 교회에서 언급했던 것처럼(행2:1-36) 구약에서 예언한 것이 실현된 것이다.(겔36:26-28. 렘 31:31-33)
그러므로 이 언약은 신약의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결정적인 것이다.
바로 이점이 바울이 그의 선교에 있어서 끊임없이 유대주의 자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확신 가운데 새로운 이스라엘이며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를 확장시켜 나가게 한 자의식이 되었던 것이며 기본적인 교회관의 본질로서 붙들었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새로운 백성이 이스라엘의 성취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로 등장한 것이라고 할 때 여기에 새로운 배것으로서의 교회를 중심으로 신약 서신서에 나타나는 몇 가지 교회관을 고찰해 볼 수 있다.
1) 교회는 하나님이 불러 모우신 백성이다.(롬1:16, 8:28. 고전1:2,24. 딤전2:12)
이 소명은 순전히 개인적인 것이 아니고 공동체적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스스로 모여서 교회를 이룬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교회를 이룬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같은 소망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려왔다(엡4:4)
이 부르심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항구적인 소집 상태 이다
이것은 교회라는 하나님의 백성이 계속 해서 성장해 나갈 것임을 뜻한다.(갈5:8. 데전5:24)
또 이 부르심은 다이나믹 하고 종말론 적이다 그 부르심은 이 백성 안에 입문시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당신의 자녀가 되도록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고 영광된 신분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롬8:30. 빌3:20)
칼빈은 교회를 “하나님이 불러 모으신 백성” 즉 선택에 그 기초를 두는데 칼빈이 기독교 강요 초판에 하나님의 선택을 항상 교회론의 중심 주제로 삼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는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는 딤후 2:19절의 말씀을 자주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러 모우는 선택과 교회를 항상 일치시키고 있다.
2) 교회는 사제적인 백성이다,
이 백성을 바울은 여호와의 백성처럼 거룩한 무리라고 부른다.(롬15:26. 31. 고전1:2. 16:1.15. 고후 8:4, 9:1) 그 밖에 에베소서, 골로새서, 고린도후서의 서신서 서두와 로마서의 끝 문안 인사에서 보여 진다.)
또 이 백성은 대제사장 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자기가 자신을 제물로 성부께 바치어 완전한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스스로 다른 제물을 준비할 필요없이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 찬미의 제사로 영적 예배를 드리는 백성이다.
베드로 서신은 특이 이 점을 강조하는데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왕 같은 사제들이며 거룩하고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이라는 것이다.(벧전2:9)
이러한 칭호는 구약의 선민 이스라엘의 호칭이던 것을 신약 교회에서 개종한 신자들에게 그대로 부여하고 있다. 즉 그들이 본래는 어둠에 속했으나 이제는 하나님 백성의 자격으로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께서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는 것이다.(벧전2:5).
3) 교회는 하나인 백성 이다.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에 해당되는 신약의 공동체는 처음엔 예루살렘 교회였다 (행8:1. 11:12. 갈1:2) 그러나 차츰 유대의 다른 지방과 헬라 세계에도 공동체가 생겨서 이들도 교회라고 부르게 되었다.(갈1:22. 롬16:1-5. 고전11:18)
그러나 여러 개의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고 그들은 전체로 하나의 교회 였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오직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이었지만 이젠 어느 곳이든지 두 세 사람이라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그곳엔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임재하시는 새로운 성전, 곧 교회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숫자 상으로 이해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이해되어지며 비록 먼 지역에 있는 작은 모임이라 할지라도 각 집회는 우주적으로 기능을 행사하고 있는 보편적 교회(Universal - Church)의 일부분이 아닌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다.
4) 교회는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의 새로운 인류가 된 백성이다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죄와 사망 가운데 속하게 된 후손들이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재창조함을 입게 되었다.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살려 주시는 영이 되시어 (고전 15:45) 믿음으로 그와 연합된 성도들에게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 되시며 새로운 백성의 왕이 되신 것이다.
바울 서신 가운데 특히 에베소서는 개인의 구원보다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구원을 말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엡2:11-22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별 없이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의 새로운 백성이 된 것을 보여준다.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대한 해석으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를 어떤 신분으로 이끌었는가를 설명하는데 즉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적대감과 소외로 막혀 있는 담을 허시고 그의 피로 인하여 하나를 만들어 그 분 안에서 연합된 새로운 백성을 만드셨다는 것이다 (엡2:13-15)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그들의 지위와 새로운 특권들의 풍부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새로운 유대인과 이방인의 공동체를 하나님의 시민(벡성)으로 묘사한다.
“그러므로 이제 부터는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나라이다고 말한다.(엡2:19)
바울은 로마 제국이 그 영광의 정상에 있을 때 이 편지를 기록했는데 그 몰락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다른 나라 즉 유대 나라도 아니요 로마 나라도 아닌 국제적이요 범 민족적인 그리고 지상의 어떤 나라보다 더 찬란하며 지속적인 한 나라를 보여준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써 고전 10:32에서 헬라인이나 유대인과 구별되는 세 번째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교회”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2세기에 씌여진 알렉산드리아의 클래맨트가 “디오게네스”에게 보내는 편지 “ The Letter to Diogntus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을 ”새로운 종족“으로 호칭하고 있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에 새로운 종족이 된 백성들이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인 것을 밝힘으로써 구약의 민족적 신권정치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이 새로운 공동체에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속하였음을 밝힌다.
C. 목회적용적 차원에서 본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
1) 교회는 개개의 개인이 아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통하여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공동체적 관심이 우선이 되어야지 교회를 개인화 해 서는 안 된다.
교회는 일반 세속 집단과 같이 단순한 종교적 자유 결사가 아니라 만민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과 부름을 전제로 한다. 이 부르심이야말로 신. 구약에 나타난 언약을 이해하는 관건인데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각각 동일 입장에서 언약을 맺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백성과 언약을 맺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의 출발점을 그리스도인 각 개인에게서 찾는다면 이것은 개인주의적인 그릇된 교회관이 된다. 이렇게 되면 교회는 하나의 개인 신자들의 집합이 되고 만다.
그러나 기독교는 단지 개인의 구원 즉 각 개인의 죄와 고통과 죽음으로부터의 구원만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개인으로 구성된 백성의 공동체적 전체의 구원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개인의 신앙적 행위에 선행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온 백성을 상대로 하심으로 신자 개인은 결코 혼자가 아니라 공동체 내에서 존립하며 나아가 각 지역 교회라 할 수 있는 개별 공동체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라고 하는 한 공동체 내에서 존속한다. 이처럼 교회의 출발은 신자 개인이 아닌 하나님 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공동체가 중요시 되는 것이다.
공동체로서의 교회 구원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곳이 에베소서 인데 에베소서는 개인에 관한 복음 이라기보다는 교회에 대한 복음을 말하고 있다.
“ 우리는 보통 공동체의 구원에는 관심을 쏟지 않고 단지 개인 구원만을 선포하는데 이것은 균형잡힌 구원관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 것이 우리를 깨끗케 하사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기보다는 모든 불법에서 우리(나)를 구속하기 위함이라고 강조한다. 우리는 자신을 교인들(Church man)로서 보다는 그리스도인으로 더 많이 생각하며 우리의 메시지는 새로운 사회(A New Society)에 대한 복음 이라기보다 새생명에 대한 복음이라는 경향이 있다”.
교회에서는 한 사람이라도 소흘히 여김을 받아서는 안 되며 그렇다고 어떤 한 사람이 자기를 앞세울 수도 없다. 교회는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라는 것은 그 안에서 함께 백성 된 자들과도 연합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2) 교회는 성직자 중심이 아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 이라면 교회는 결코 어떤 특정 계급 또는 신분이나 교회 내의 특정 기관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교회는 전 하나님의 백성이요 신앙인 공동체 이다
모두가 선택된 민족이요 왕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백성이다(벧전 2:9)
이 하나님 백성의 구성원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되었으며 성령에 의하여 성화된 사람들 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 안에서는 모두가 동등하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 안에서도 구별은 있고 그것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즉 은사대로 봉사한다고 하는 기능상의 구별이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훨씬 중요한 것은 “ 기본 동등성‘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동등성이 무시되고 교회 안에 특정 계급에 속하는 교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이 존재하는 것처럼 잘 못 인식된 원인을 다음 몇 가지로 규명될 수 있다
첫 째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라는 기본적인 동등성에 서지 못하고 계급적 인식에 매여 있는 것은 성경해석에 대한 “성경신학적 이해의 결여”라고 보인다.
성경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것은 신약과 구약 성경 사이의 통일성을 파악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이 하나님의 책이요 그 계시가 일시에 완성된 것이 아니고 점진성을 가졌으며 그 연속성과 통일성을 인정한다면 당연히 계시의 완성 부분인 신약의 서신서에서 구약을 조망하는 것이 바른 해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 신학적인 이해의 결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된 구약의 제사직이 아직도 신약 교회의 성직자 계급을 통해 계승되는 것처럼 오해하는 것이다.
오히려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된 신약 교회를 향하여 “너희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 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벧전 2:9)
물론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백성 된 내부에도 되돌아 보아야할 구별, 즉 여러 가지 카리스마, 봉사활동, 직분과 기능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구별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여도 “기본 동등성”에 비하면 2차적인 것일 뿐이다.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왕같은 제사장으로서의 기본적 직무가 주어져 있기 때문 이다. 요컨대 구약에 대한 성경해석학적 빈곤이 잘못된 계급인식을 낳게 한 원인이다.
둘째 “ 평신도” 라는 호칭의 잘못된 인식이 교정 되어야 한다.
신약성경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뜻으로 라오스(λαοσ)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Laikos(λαικοσ) 즉 “평신도” 라는 말이 전혀 없다는 것은 매우 주목만한 사실이다. Laikos(λαικοσ)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사제나 레위 족속이 아닌 사람이라는 뜻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런 말을 어떻게 에클레시아에 해당하는 뜻으로 사용할 수 있었겠는가
신약 성경에는 오히려 Laos (λαοσ), 즉 하나님의 백성 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 공동체 내부의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을 허락하지 않고 모든 백성이 단일 공동체로 결합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이 말은 오히려 외부와의 구별 즉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세상과의 구별을 의미한 것이었다. 기독교 역사에서 이 문제를 고찰해 볼 때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이 확정된 것은 3세기 이후 부터이 일이다.
3세기 중엽에 들어서면서 교회는 점점 제도화 되어가고 있었고 이에 따라 교직을 가진 성직자의 위치가 크게 강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당시 칼타고의 감독 이었던 키프리안은 당시 교회 안과 밖에서 일어나는 이단적 세력들의 대항에 대처하여 “교회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서 이단적 교회와 구별될 수 있는 정통교회의 표지로서 “ 전통적인 주교단의 계승”을 가지고 있는 교회를 강조한 나머지 이러한 계급적 교회관이 종교개혁 이전까지 전 중세기를 지해했던 것이며 종교개혁 이후 오늘날에도 이런 인식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통칭되고 있는 “ 평신도”라는 의미에 대하여 재정의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미 언급한바대로 평신도를 지칭하는 헬라어 Laikos는 신약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신약성경에 자주 나오는 라오스(Laos)의 의미와 같은데 단순하게 백성, 어떤 백성, 백성의 무리를 의미하는 말 이다.
세속적인 의미로는 헬라시대의 전 시민을 두고 사용하였고 성경적인 의미로는 처음엔 이방인과 대조되는 이스라엘(행4:10)을 가리키다가 나중에는 예수 믿는 이방인을 포함한 새 이스라엘 즉 말세 교회를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행15:14) 이 용어가 신약에서는 어떤 한 구룹의 특정인들을 위해 사용된 적이 없고 항상 포괄적으로 어떤 백성의 전부를 다 포함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신도라고 하면 본래의 의미가 주님을 모신 선택받은 자 혹은 성도 혹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전 교회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사실은 지금까지 우리가 잘못 인식해온 평신도가 교역자와 동등한 입장에서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하여 동일한 특권과 의무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즉 이말은 이 땅에 이미 시작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지금까지 1%의 교직자에게 떠 맡겼던 안일에서 벗어나 교회의 객체가 아닌 주체로 전환되어야 하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세상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가견적인 교회는 교직을 가진 소수의 교회가 아니라 생활 현장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를 자기의 삶을 통해 구현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교회 이다.
그러므로 이제 교회는 성직자 중심이 아닌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교회로서 자기 인식(Self-Image)를 쇄신해야 하는 것이다.
맺는 글
본 논문의 서두에서 “ 교회는 무엇인가 ?” 하는 교회 자체의 자기의식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시작하였던 바 이 논문의 전 과정을 전개하면서 계속 이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먼저 I부에서는 현존하는 가견적 교회가 어디로부터 근원적인 뿌리를 두고 있는지 기원을 추적함으로써 이 시대에 추락해가는 교회의 권위와 가치를 재발견하기를 원했고 II부에서는 여러 다양한 교회 본질에 대한 혼돈 가운데서도 가장 기본적으로 표상할 수 있는 교회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이 주제를 더욱 세부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서두에서 제기 했던 질문 즉 교회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답하려고 하였다.
또한 교회의 기원과 본질 두 가지를 모두 성경신학적 입장에서 접근하려고 시도하였기 때문에 이젠 이러한 관점에서 지금까지 고찰한 바를 몇 가지로 요약된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첫째 교회는 그 기원에 있어서 근원적인 뿌리를 하나님의 나라에 둔 다는 것이다.
구속사적인 견지에서 볼 때에 아직은 지상의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과도기적 제도로 존립하고 있어서 그 연약성과 불완전성을 피할 수 없지만 왕이 오실 때 교회는 왕국을 물려받을 것이고 그 왕국은 온 우주에 실현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 근원적인 뿌리를 두면서 또한 종말론적인 성취를 눈앞에 두고 있는 교회는 일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역사적, 제도적, 세상적인 표현인 것이다.
둘째 교회의 본질 문제에 있어서 교회를 의미하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받은 하나님의 백성” 이라는 것이다(고전1:12. 엡2:19)
이러한 주장 역시 구속사적인 견지에서만 신구약 전체를 일관하여 나타낼 수 있는 주장인데 왜냐하면 이런 본질 개념이 구약과 신약 전체를 통해 줄기차게 관통하여 내려오기 때문이다. 구약과 신약의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초점으로 하나 라는 것이 다음과 같은 도표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에 그 기원을 두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기본적 본질을 가지고 있는 교회는 계시의 완성부분인 신약 서신서에서 매우 독특한 신분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흑암의 권세에서 건짐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새로운 백성의 무리들이며(골1:13) 택하신 족속이요, 거룩한 나라로서 하나님을 가까이 모셔 섬기는 영광스런 천상의 사역을 지금 여기서부터 누리도록 부름 받은 왕같은 제사장들 이라는 것이다. (벧전2:9)
이상에서 언급한 본 논문의 총괄적인 결론으로서 “교회란 무엇인가?”라고 한 문장으로 말하라고 한다면 “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며, 그 나라의 백성” 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처럼 교회를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정의할 때 이 교회는 어느 세속 집단과 같이 혈연과 지연으로 세워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특정한 설립자나 교역자의 교회도 아니요,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 모두의 교회 인 것이다.
더불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교회가 가지는 그 집단적이며 기본적인 동등성을 고려할 때 이 시대에 평신도의 위치와 역할이 다시 한 번 점검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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