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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9:14-24(2)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에 대한 묵상

by 朴 海 東 2020. 8. 13.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에 대한 묵상

로마서 9:14-24

성경에서 구원과 관련하여 나오는 말씀 중에
 “선택과 유기(버려두심)”의 문제는 
가장 난해한 문제로 인식되고 있는데 
기실 인간의 이성으로 다 이해될 수 없고 
인간 이성의 한계를 초월하는 난제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의 동족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들이 많고 많아서[9:4-5]
세상 어느 민족보다 더 하나님의 보내신 자 
곧 그들이 기다려온 매시야[그리스도] 예수를 
잘 받아드리고 믿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못하고 도리어 배척자들이 되는 것을 보면서
여기 로마서 9장에서 그 이유를 적시한다

우선 그는 구약의 말씀들을 떠올리며[9:6a]
오직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되는 
"남은 자"의 구원사상을 받아드리며[사6:13]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이뤄지는 구원에는 
“선택과 유기”가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데
앞선 말씀[9:7-13]에서는 
아브라함의 가족사를 통해서 예를 들었고
오늘의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주권과 관련하여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관련된 “바로 왕”을 예로 들고 있다.

1.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예서는 미워하였다.[9:13]

하나님 나라의 언약과 유업을 잇는 상속자로서 
같은 아브라함의 자식들이라도 
몸종 하갈의 소생인 이스마엘이 아니라 
정부인 사라의 소생 이삭이라고 하시며
또 손자 대에 이르러 같은 이삭의 자식들 이지만 
그리고 심지어는 이삭의 아내 리브가의 뱃속에 
쌍둥이로 임신되었던 에서와 야곱 중에서도
이미 배속에 있을 때 부터도 그의 선택하심이 
에서가 아닌 야곱이라고 하심으로 
그의 택하심은 인간의 조건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의 주권에 속한 문제인 것을 분명히 하셨다

2. 내가 이 일을 위해 바로를 세웠다.[9:17]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과정에서
그냥 단번에 애굽 왕 바로를 굴복/항복 시키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수 도 있었지만 
열 가지 재앙과 마지막으로 장자를 치는 재앙까지 내려
자신의 위엄과 능력을 충분히 보이신 다음에 
이스라엘로 출애굽 하게 하신 것은 
선택된 자들에 대해서는 그의 긍휼의 풍성함을 드러내시며
유기된 자를 통하여서는 그 반대로 
그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통해 그의 능력과 영광을 
충분히 드러내실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셨다. [9:17]

성경이 보여주는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에 대해
장로교의 창시자 칼빈은 이것을 “이중예정”라 붙였는데
“선택과 유기” 이 모든 것이 예정 되었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사람들은 하나님은 불공평하시다고 하며
그래서 이런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하기도 하는데 
기실 이 “선택과 유기”의 문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거치는 돌과 반석이 되고 있음을 본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기독교 문명국가를 이루었던 유럽에서는
1517년 종교 개혁 이후로 성도들을 성경대로 믿게 하는 
개혁 신앙에 굳게 세우기 위하여 이 난제 중에 난제로 보이는
이 문제에 대해 모두 신앙 문답서에 담고 있는데 
웨스터 신앙고백서 뿐 아니라 도르트 신조와 벨기에 신앙고백 
그리고 하이델베르그 요리 문답 등에서 이 주제를  찾아 볼 수 있다.

적용하기

3. 나는 알아져서 믿기보다 믿음으로써 앎에 이르겠습니다

오늘의 본문 로마서9:14-24절에서
주님의 종 사도 바울은 성경을 통해서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에 대해 사람들이 이의를 달지 못하도록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로 시작하여 
성령의 감동을 따라 주시는 변증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데 
가장 핵심적인 것은 지음 은 피조물이 
자신의 창조주의 주권에 속한 문제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것을 한 구절 말씀 속에 축약하고 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9:21]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에 대해 많이 사용되는 한 예화가 떠오른다 

열명의 사람이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죽을 힘을 다해 세 명을 건져내었다고 가상할 때
왜 건지려면 다 건지지 왜 세 명만 건졌냐고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구원받은 사람은 왜 내가 건짐 받았는지 감격할 뿐이고
빠져 죽은 사람은 그것으로 더 이상 할말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이러한 문제들을
내 이성의 잣대로는 다 측량할 수 없는 것이며
그래도 이렇게 하겠다고 함은 
마치 바닷가에 앉아서 조개 껍질로 
바닷물을 모두 퍼내보겠다고 하는 시도에 불과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알아서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믿음으로써 
앎에 이른다고 말한 베드로의 고백은 진리이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요6:69]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는 자칫 숙명론에 빠져서
하나님께서 구원할 자와 유기 된 자를 다 정해놓았다면
다 알아서 믿게 될 터인데 
왜 전도가 필요한가 의문을 제기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역발상으로 돌려 생각할 때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되는 구원은 
전도자나 선교사들에게 큰 의욕과 담대함을 주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 하셨는데  [고전1:21]
이 말씀을 따라 복음 전도/선교를 나갈 때 
아무리 믿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나 혹은
기독교를 심하게 반대하는 나라라고 할찌라도 
그 곳에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구원받을 자들이 있다고 하는 이 말씀은 
선교사들이 바다를 건너서라도 
선교지로 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 오늘의 묵상을 내리면서 
바울이 주창하는 하나님의 주권 사상에 깊이 공감하며 
나의 신앙과 신조로도 받아 드리게 되는데
오늘 내가 살아가는 나의 인생길에서 제기 되는
구원의 문제 뿐 아니라 
내 삶 가운데 나타날 수 있는
수 많은 의문과 의혹들에 대해서 조차도 
이 모두가 하나님의 정하심을 따라 되어진다고 하는 
시편 저자의 고백을 더욱 확고하게 받아드리게 한다.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운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찌라도 그 수가 모레보다 더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 [시편139:16-18]-아멘-

하나님의 주권 사상을 받아 드리는 신앙은
내 허파 속의 공기 한 분자까지도 
그 분의 손길에 맡기는 신앙인데 혹자는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인간의 자율 의지를 약화시킬 위험이 있다고도 하지만 
그러나 성경에 근거를 두고 어거스틴으로부터 시작하여 
칼빈에게서 완성되는 이 하나님의 주권사상이야말로 
오늘 코로나 판데믹으로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닫혀 있는 것같고
나갈 길이 보이지 않는 우울한 가운데서도 내 삶을 의미있게 하고 
수시로 나를 지탱해주는 힘이 되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주님!
오늘도 나갈 길이 보이지 않고 
사방이 막혀 있는 것같은 답답함 가운데 있지만
내가 지금 크고 부드러우신
주님의 장중에 붙잡혀 인도 받고 있는 
나의 하루 하루인 것을 잊지 않게 하시고
믿음을 발동하여 힘차게 살아가는 신앙과 삶이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