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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52:1-11 쓸데없는 쇠 고집(固執)

by 朴 海 東 2020. 10. 29.

[앞선 묵상글에서 내용을 줄여서 변경함]

쓸데없는 쇠 고집(固執)

예레미야 52:1-11

 

깊어가는 가을을 지나 어느덧 저무는 가을로 들어섰는지
거리에 나가면 가로수 잎새들이 낙엽으로 뒹글고
늦 가을 을씨년스런 거리의 스산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제 점점 더 날씨가 추워지면서
아름다운 단풍으로 옷을 입은 가을 나무들도 낙엽을 떨구고
모두 대지의 색깔로 돌아가는 나목 (裸木)으로 남을 것이다

오늘 2020년 10월 29일 목요일
오랫동안 이어진 예레미야 묵상이 마지막 52장으로 들어왔다
이미 51장 마지막 절에서 "예례미야의 말이 끝나니라"고 하여
그의 입을 통해 구술되고 그의 제자이며 서기관인 바룩을 통해
필사되었던 예레미야의 예언이 끝난 것으로 된 것을 감안하면

마지막 한 장 더 붙어있는 예레미야 52장은 하나의 부록이며
길고 길었던 예레미야 예언을 마감하는
에피로그(저작 후기)로 받아드리게 된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오늘의 본문52:1-11절의 내용이
열왕기하 25:1-7절과 거의 유사하게 기록되고 있으며
또 한 가지 52장의 마지막 단락에서는 바벨론에 불모로 잡혀간
여호야긴 왕의 복직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52:31-34]

이것은 예레미야가 세상을 떠난 후의 이야기들인 점을 감안할 때
52장의 부록은 서기관 바룩이나 혹은 또 다른 필사자가 썼던가
아니면 훗날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되었을 때
그 간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으로 집대성하면서
이 역사 속에 내재된 하나님의 계시를 한 책으로 묶을 필요를 느낀
에스라에 의해 첨부된 것은 아닌지 조심스런 나의 사견을 붙여본다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묵상의 소재로 담게 되는 것은 네 가지다
1. 시드기야의 쇠심줄 고집의 출처 [52:1-3]
2. 바벨론 군대의 포위 작전과 성중의 기근[52:4-6]
3.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왕 시드기야[52:7-8]
4. 체포되고 심문받으며 고통에 떨어지는 시드기야의 최후[52:9-11]

1. 나의 고집은 쓸데없는 쇠 고집은 아닌가?

오늘의 말씀은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는 순간까지
쓸데없는 고집을 피운 한 미련한 왕의 말로를 보여줌으로
이 말씀의 독자들에게 반면교사(反面敎師)를 삼게 한다.

고집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보면 고집 固 (굳을 고),
執 (가질 집)으로 생각을 고치지 않고 굳게(固) 버팀(執)인데
특별히 쇠 고집이라고 함은 황소 힘줄 고집이라는 의미로써
사람인 주인 조차도 그 씩씩 거리는 힘센 소의 고집에 눌려서
도무지 어찌 해 볼 수 없는 쇠 고집을 이를데 쓰는 말이다.

보통 고집에는 그 심리의 언저리에 거룩한 신념을 담은
건강한 고집도 있어 배울 바도 있지만
자신도 남도 같이 괴롭히고 망하게 하는 병적 고집도 있다.
따라서 고집이라고 했을 때
이 고집은 끝까지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가 생각해야 하고
혹시 나와 남을 모두 힘들게 하는 망하게 할 수 있는
쓸데없는 고집은 아닌가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자기 형 여호야김 왕처럼 끝까지 고집을 피우다가
유다 왕국의 몰락과 자신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고집불통 시드기야의 이야기는 많은 교훈을 남겨준다.

오늘의 말씀 52:2절에서 시드기야가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비틀어진 길을 가게 된 이유로써 그의 아비 요시야가 아닌
그의 형 여호야김의 행위를 본받은 것이라고 적고 있다

여호야김은 실제 요시야의 첫째 아들로서 성질이 못되어
왕의 재목이 아니었는지 요시야 왕이 죽었을 때
국민들은 둘째였던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세운다.[왕하 23:30]

그런데 이 여호와하스가 3개월 만에 애굽에 불모로 잡혀가면서
여호야김은 애굽 바로느고에 의해 세워진 왕이 되었는데
그의 치세 11년 내내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전달되는
친바벨론 정책을 무시하고 친애굽 정책으로 나가게 된다.

따라서 당시 애굽을 누르고 신흥세력으로 부상한 바벨론은
여호야김을 잡아가서 따끔한 맛을 보이기도하고
그가 죽었을 때는 시체가 버려진 왕이 되게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시드기야는 어찌하여 이처럼 말로가 좋지 않은
그의 형 여호야김의 길을 따르다가 똑같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며
쇠심줄 같은 고집이 그를 끝까지 붙잡은 것을 보게 된다.

그가 바벨론의 세 번째 침공으로 예루살렘 성이 포위되어
성안에 양식이 다 떨어졌을 때라도 도망가다 잡히는 대신
예레미야가 간절히 권했던 것처럼 바벨론 왕에게 항복하고
성문을 열고 나왔다면 오늘의 말씀이 보여주는 것 같은
비참한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을텐데.....
이런 고집쟁이 왕 잘못된 지도자 한 사람의 결정으로 인해
그 피해와 고생이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전가된 것을 본다

 

예루살렘 성이 바벨론 군대에 포위됨과 비교하여
우리 조선의 역사에서는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
조선 조정이 청나라 군사들에게 남한산성에서 포위당하게 된다

조선의 16대 왕 인조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등극했을 때
그는 친명반청의 세력들을 등에 업고 왕위에 오름으로
반청의 결과로써 청나라 기마병 2만의 군사가 침입한 것이다

당시 조선의 조정은 청나라 태종 홍타이지 기마병에 쫓겨서
급히 도피하다 보니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게 된 것인데
가장 추운 12월에서 1월까지 청군에 포위되어
먹을 양식이 다 떨어져 성안에 쥐까지 잡아먹고도 부족하여
나중에는 군사용 말까지 다 잡아먹을 정도로 곤경에 처한다.

그 때 인조는 척화파 세력에 밀려 결단을 내리지 못했는데
이 유약한 왕은 시드기야와 달리 자신의 고집이라기보다
반청을 외치는 척화파 새력에 눌려 소신을 펴지 못한 것같다.

그러다가 청의 재공격으로 조선의 존립마저 위태로워졌을 때
화친파 최명길의 제안을 받아들여 성문을 열고 나와
지금의 송파 나루터인 삼전도에서 항복의식으로써
오랑케라고 불렀던 여진족의 후예[금나라/청나라] 앞에
삼배고구두례(三拜九叩頭禮)를 올리는 굴욕을 당했지만
그래도 나라를 보존하고 백성은 살릴 수 있었으며
우리 조선의 산하에는 다시 겨울이 지나고
곳곳에 노란 민들레 꽃이 피는 새 봄을 맞을 수 있었다

시드기야의 경우는 포위된 성 안에서 무려 18개월을 버티었는데
양식이 진하여 죽어가고 있었을 때 자신의 잘못된 선택과 고집이
백성들의 괴로움이 된 것을 깨닫고 성문을 열고 나가야만 했지만
그는 바벨론 군사들이 성벽 밑을 뚫는 발파작업에 성공해
성벽이 무너져내려 바벨론 군사가 성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항복하지 않았으니 그의 고집은 정도를 넘어선 고집이 되고말았다.

시드기야의 고집과 비참한 말로를 보여주는 오늘의 말씀에서
주님은 이 말씀의 독자인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싶으신 것일까?

1. 나에게는 쓸데없이 고집 피우는 것은 없는지 돌아볼 것이며
2. 나의 고집으로 인해 나도 괴롭게 되고 남도 괴롭게 될 때
이 것은 나의 쓸데없는 고집이라는 것을 속히 깨닫고 분별할 것이고

3. 끝까지 고집을 주장하고 싶은 쓸데없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주님 앞에 항복을 택하여 나도 살고 남도 살려야 함을 배운다.

주님!
시드기야의 헛된 고집이 불러온 화를 보면서
나에게는 이런 고집이 없는지 돌아봅니다
내가 계속 고집을 피움으로
나도 남도 모두 힘들어질 때
이것은 잘못된 고집인 것을 깨닫게 하시고
나의 자존심을 깨트리며 항복 시켜서
악한 상황에서도 최악의 상황을 면할 수 있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