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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당/* 베드로전서*

베드로전서 3:1-12(일부 보충) 비폭력 언어와 비폭력 저항

by 朴 海 東 2020. 12. 29.

비폭력 언어와 비폭력 저항

베드로전서 3:1-12

 

1. 비폭력 언어 [3:1-7]

오늘 주신 말씀 가운데 마음 깊이 닿아지는 구절은
아내를 대함에 있어서 연약한 동반자[파트너]로서
존중히[존귀하게] 대우하라는 말씀 입니다.[3:7]

존중히 소중하게 여겨야 할 이유는
내 아내에게 자랑할 만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고
내 아내에게 매력적인 것이 있어서도 아니며
그가 깨어지기 쉬운 연약한 그릇 때문이며
그의 연약함이 쉽게 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존중히[소중히] 대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 입니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면 동반자로서 아내가
그의 연약함으로 인해 가장 쉽게 깨어지는 것은
남편으로서 분별없이 내뱉는 말이나 혹은
감정대로 쏟아내는 말 때문에
연약한 마음에 상처입고 깨어지며 심지어는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내는 남편보다 강하지 못하기 때문에
때로는 심리적인 불안정이나
혹은 육체적인 피곤함
그리고 정서적 결핍으로 외로움을 타며
남편의 다정함을 기대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아내의 마음을 읽을 줄 몰라서
그냥 함부로 대하는 것 때문에
아내의 마음이 상하게 되고 때로는
잔소리도 많이 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내가 나에게 친절하지 못할 때 혹은
말을 함부로 하거나 다정하지 못할 때
그렇게 말하는 표면적인 모습만 보고
나도 똑같이 반응할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하게 되는 아내의 내면 세계를
이해하려고 할 때 비폭력적 언어로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연약한 그릇으로서 아내의 마음이
쉽게 깨어지는 것이 말로 인한 것이어서 그런지
이어지는 말씀은 비폭력 언어에 대해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며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3:10-11] -아멘-

주님!
연약한 그릇으로 나의 동반자가 된
아내를 알아주는 지식이 있게 하시고
쉽게 깨어질 수 있음으로
존중히 여겨야한다는 주님의 권면을
제가 잘 실천하도록 하겠습니다

때로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할 때
왜 그렇게 말하게 되는가 이해하려는
여유를 가질 수 있게 하시고
비폭력적인 언어를 사용함으로
화평을 도모할 수 있는 우리 부부가 되게 하소서

 

 

2. 비폭력 저항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3:9]

사도 베드로의 편지글로 전달되는 이 두 번째 말씀은
일찍이 주님께서 주신 천국 백성의 헌장으로써
산상 팔복과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떠오르게 합니다

사악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가 피해를 받거나 불이익을 당할 때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다시 반복해서 일깨워 주시는 이 말씀은
천국백성으로써 이 사악한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적어도 어느 수준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 척도와 수준을 제시해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로서
너희가 세상에서 이런 수준의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입었고
너희가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십니다.[3:9 b]

더불어 이렇게 수준 높은 천국 백성의 삶을 살 이유로써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느니라고 하심에 있으니
주님께서 다 지켜보시고 아시고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3:12]

그래서 나는 내가 이런 수준 높은 삶을 살 능력이 안되지만
그래도 이 말씀을 단 마음으로 받아드리고
나에게 악하게 대하는 세상과 사람들을 향해
비폭력주의 혹은 비폭력 저항으로 나가려고 하는 것은
나 같은 악인을 위하여
주님께서 오래 참아주시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그의 바보스러움을 철저하게 드러내신 십자가를 통해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능력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악하게 대하는 세상과 그 세력에 대해
비폭력주의와 비폭력저항으로 나가는 것은
우선 보기에는 바보스럽고 유약한 모습처럼 보여도
이 방법만큼 강한 능력을 가진 것은 달리 없는 것같습니다.

이삭이 그랄 사람들에게 두 번이나 우물을 빼앗겼어도
다투는 싸움을 선택하기보다 밀리고 밀리면서
마침내 세 번째는 그랄 사람들도 스스로 양심에 찔려
자기들의 땅에 와 있는 이삭을 어찌하지 못하고
이삭이 르호봇(다투지 않음)의 우물로 번성하였으며
후에 그랄 왕 아비멜렉이 이삭과 함께 하는 하나님을
분명히 보고 그에게 찾아와 은혜를 구하며 [창26:12-33]
서로 불가침 언약을 맺어 달라고 애원하게 된 것처럼
최후 승리는 온유한 자의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로 고통 받을 때
간디의 비폭력 저항이 영국인들을 부끄럽게 하였고
미국이 노예해방 이후에도 계속된 흑인들의 차별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이끈 흑인들의 비폭력저항 운동이
백인들을 부끄럽게 하면서 인종차별의 벽이 무너진 것처럼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대하지 않고
도리어 복을 비는 자세를 가지라고 하심은
힘없는 자의 비굴한 처신으로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이것이 세상의 악함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최근 우리 한국 사회에서 우리 기독교와 교회들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 사나운 교회로 비쳐지고 있는 것이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며칠 전에도 한국 사회 극우파를 이끄는 전광훈 목사와
그가 담임하는 사랑제일교회가 장위동 재개발단지에서 보여준
TV에 비친 무서운 폭력 행사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비폭력주의와
비폭력 저항을 무색하게 만들고 부끄럽게 만드는 행태로 보입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세상과 똑같은 방식을 사용하거나
혹은 세상보다 더 악한 방법으로 맞대응하는 것을 보면서
차라리 “사랑제일교회”이름에서
“사랑 제일”을 빼기라도 한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교회]가 이 부패하고 어두운 세상에
소금이며 빛이라고 하셨는데 도리어 세상에 사나운 교회의 모습과
찌그러지고 비틀어진 기독교의 모습을 보여줌으로
진리의 전당인 교회가 도리어 진리의 빛을 가리고 있으며
한국 교회의 한계와 민낯을 드러내는 것같아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제 오늘의 묵상을 내리면서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는 이 파격적인 주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 교회와 나의 신앙과 삶에서도 잘 나타날 수 있기를 기원드립니다

주님!
이미 보여주신 십자가의 정신으로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부어주옵소서.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