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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당/사도행전

▼ 사도행전 4:23-37 초기교회의 거룩한 야성 회복하기

by 朴 海 東 2016. 2. 15.

초기교회의 거룩한 야성 회복하기

사도행전 4:23-37

묵상내용

사도행전에 들어와 하나님의 새로운 공동체로 등장한 초기교회 모습에서
성령께서 보게하시는 두 가지 독특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탄압과 위협속에서도 위협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않고
위협속에서 오히려 더욱 담대히 주의 말씀을 증거하게 해달라는 기도이며

다른 한가지는 마음과 뜻이 하나된 표시로 제것을 제것이라 하지않고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나눔을 실천한 아름다운 신앙공동체의 모습 입니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 4:29-30]

교회사에서 기독교가 초기교회의 순결함과 능력을 상실한 배경을 보면
당시 세계의 심장부인 로마제국 치하에서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나갔던 사도시대와 속사도 교부시대를 지나
환난과 핍박의 시대가 지나고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지정된 이후부터 입니다

기독교가 국교가 되어 심지어는 나라의 관리를 뽑는 공무원 시험에서도
가산점을 주게되고 모든 이교도들의 신전과 신상들이 파괴되는 가운데서도
기독교의 건물들은 나라의 혜택을 받으며 지어지던 그 시절
기독교는 심각하게 부패되어 어두운 중세 천년으로 이어지게 되는 배경이 됩니다

예수생명을 가진 기독교와 교회는 오히려 핍박 속에서 강해지고 순결해지며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새로운 신앙 공동체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기교회의 모습에서는
핍박 속에서 더욱 강해지고 하나되며 심지어 물질의 유무상통까지 이루어져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신앙공동체를 이룬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것이 세상과 비교하여 세상이 따라올 수 없는 교회의 능력이었습니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4:32]

초기교회 모습과 비교하여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안타까운 모습은
세상을 향하여 너무 힘을 많이 가진 것이고
자연히 세속화 되어서 세상과 구별이 희미해진 것이며
자연히 세상의 힘없는 사람들에게 안티 대상이 되어버린 것 입니다

오늘날 중국 교회들에게서 보게되는 것처럼 한국교회의 초기에는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지와 희망은 교회에 있었고
교회는 또 그역활을 잘 감당했으며 세상의 칭송이 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군사독재시절 천주교와 비교하여 개신교회들은 군사독재의 정권에
빌붙은 교단들이 많았으며 숫자적으로는 이 시기에 많이 성장하였고
외형적 부흥도 이루었으나 더 중요한 교회의 본질적 요소들을 잃어버렸고
지금 이시대엔 사람들의 안티 대상이 되어버렸다는 점이 안타까운 점 입니다

한국 기독교회의 숫자적 부흥이 군사독재 시절과 맞물려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큰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더 귀한 것도 잃어버렸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 입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처럼 교회가 큰 건물을 짖고 대형화 되며 세상 가운데
큰 세력으로 등장하는 것은 좋은 것같지만 실상은 썩어들어가는 시발이 됩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교회의 순결과 신앙의 야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다시 군사독재시절 이전에 거의 모든 교회들에서 볼 수 있었던
고달펐지만 아름다웠던 순수 신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기교회가 핍박과 위협속에서도
고난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하고 담대한 공동체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 우리들의 교회가 교회의 머리되시며 주인되신 주님 앞에
진정으로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화려한 건물이나 숫자적으로 큰 세를 과시할 수 있는 대형화도 아니고
세상과 구별되는 예수 신앙공동체로서의 순결함과 담대함 그리고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 자들이 차별없이 서로 한 형제로 교통할 수 있고
세상이 따라올 수 없는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로써 나눔이 실천되는 모습입니다

언젠가 부산에서 목회하던 시절 교인 중에 학원을 운영하던 성도가 있었는데
한때 수백만원씩 십일조하던 사업장이 다른 경쟁 학원들의 농간으로 고발되어
너무나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면서
교회가 나서서 그의 사업이 회생되도록 도와주자고 하였고 또 그렇게 할 만한
충분한 재정도 있었는데 집사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의 마음에 큰 아픔으로 남아 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교회는 세상보다 더 상부상조와 나눔을 실처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모두가 살기 어렵고 힘든 때에는 교회에 들어오는 재정의 대부분은
어려운 교인들을 위해 마땅히 사용해야 합니다

교회가 성도들의 어려움을 돌아보고 구제와 봉사를 실천하는 것 때문에
교회 통장에 잔고가 쌓이지 않고 제로점으로 가는 것은 정말 잘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께서
퍼내고 또 퍼내도 계속 쏟아져 들어오는 옹달샘의 원리처럼
우리 교회의 통장에 재정의 샘물을 계속해서 채워주지 않겠습니까......(?)

오늘의 말씀 가운데 특별히 나눔의 실천에 남다른 모본을 보였던 한 사람을
소개하는데 그의 이름이 본래는 요셉이었으나 사도들이 그를 불러주기를
" 바나바" 곧 "위로의 아들"이라고까지 호칭을 한 것을 보면
그가 교회의 나눔실천을 위해서 얼마나 아름다운 모본을 보였는가 엿보게 됩니다

그는 어려운 형제들을 위하여 자신을 재물을 드렸고 자신의 이름이 가진 의미처럼
후에는 사도 바울조차도 그를 통하여 초기교회 앞에 등장되게 되는 것을 보면

그는 자신의 재물을 드리고 얼마나 아름다운 지위를 얻은 사람이 되었는지를 봅니다
이러한 은혜가 나 자신과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도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기도하기

모델로 보여주시는 초기교회의 모습을
지금 이 시대엔 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 부정하지 않게 하시고
말씀이 보여주는대로 초기교회 신앙의 야성성을 회복케 하옵소서

환난과 핍박을 피하기보다 도리어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담대한 야성과
세상이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재물 앞에서도 떨거나 주저하지 않고
주님을 위하여 과감히 드릴 수 있었던 대담한 야성을 나도 갖게하여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