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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당/요한3서

요한3서 개요[out line]

by 朴 海 東 2016.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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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3서 내용 개요 ---

 

인사(1-4)

가이오가 칭찬을 받다(5-8)

디오드레베가 책망을 받다(9-10)

데메드리오가 칭찬을 받다(11-12)

끝 인사(13-15)

 

장로는 디오드레베의 행위를 책망하기 위하여 그의 친구 가이오에게

이 서신을 기록하고 있다.

왜냐하면, 디오드레베가 이 서신의 저자인 장로와

그의 가르침을 반대하는 교회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디오드레베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장로가 보낸 사자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방해하였다.

 

장로는 또한 그와 그의 동료 신자들에 관해서

거짓말을 하는 디오드레베를 비난하고 있다.

 

저자는 곧바로 가서 그 문제를 바로잡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데메드리오는 이 서신을 전달하는 사람인데, 그는 큰 칭찬을 받고 있다.

이 단순한 서신은 우리에게 1세기의 교회에 있어서 한 가지 특별한 위기와

그것을 다루는 단계에서 나타난 희미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불행스럽게도, 우리는 문제의 사건 발단에 관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다

 

 

저자와 기록 시기: 요한 2서와 같은 시기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본 서에서 요한은 세 사람을 등장시키고 있는데, 이 세 사람을 통하여 당시에 보여지는 교회의 문제점들이 무엇인지 간접적으로 알려 주고 있다. 이곳에서 요한은 고유 명사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 내용 면에서 교회에 걸맞는 표현이다. 즉 교회의 역할이 복음을 증거하며, 예수그리스도를 좇는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지만, 전도자를 조력하는 것도 그 역할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세 사람들을 통해 요한은 전도자를 어떻게 접대하는지 그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1. 가이오에 대한 칭찬(요삼1:1-8)

 

요한은 가이오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누구인가? 요한은 가이오에게 축복의 말을 하였는데 그것은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가? 가이오는 어떠한 선행을 하였기에 요한으로부터 축복을 받는가? 그리고 그의 행실이 어떻게 알려지게 되었는가?

 

1) 교회의 선한 행위

요한은 가이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가이오란 이름은 당시에 흔한 이름이었다. 그래서 그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이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신야성경에는 모두 네 명이 나온다(행19:29 ; 행20:4 ; 롬16:23 ; 고전1:14). 사도 요한은 모든 성도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였다고 말하고 있다(요삼1:4). 요한의 기쁨은 가이오로 인함이었다. 그래서 가이오에게 축복의 말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삼중적 축복이다. 즉 영혼과 육신의 건강과 이 세상의 삶의 번영을 말하고 있는 거이다(요삼1:2). 그렇다면 가이오는 왜 이러한 축복의 말을 들었을까? 그것은 간단하다. 성도로서 해야 할 마땅한 의무를 행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이오의 생활이 선행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전도자들을 후히 접대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요한은 가이오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한다(요삼1:6). 이 말은 하나님의 일을 대리로 하는 전도자들을 대접하기를 하나님께 하듯 하라는 의미이다.

 

2) 대접하라

교회라는 공동체가 아름답게 성장하려면 서로 대접하는 모습들이 보여져야 한다. 복음 전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행해야 할 의무요, 책임인 것이다. 그 일 중 하나는 바로 전도자를 후히 대접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생활이 정결하고 진실된 생활이며 복음을 따라 사는 삶인 것이다.

 

2. 디오드레베와 데메드리오(요삼1:9-12)

 

요한은 두 사람을 소개하면서 이들의 행실에 대해 말하고 있다. 각각 어떻게 말하여지고 있는가? 특히 디오드레베의 악행은 어떠한 것이며, 그가 그렇게 행하게 된 동기는 무엇이라고 생각되는가? 요한은 디오드레배의 악행을 말하면서 가이오에게 어떤 부탁의 말을 하는가? 한편 디오드레베는 어떻게 소개되고 있는가?

 

1) 경계의 대상과 모범의 대상

요한은 디오드레베를 있어서는 안 될 교만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디오드레베는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요삼1:9). 그는 자신의 권위를 내세워 복음 전도자들을 멸시하였다. 그것은 요한이 본 서신을 보내기 전에 보냈던 서신을 아마도 찢어버렸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요삼1:9). 그래서 요한은 직접 방문하여 그를 책망할 생각이었다(요삼1:10). 요한은 디오드레베의 악행을 크게 네 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요삼1:9,10).

첫째로 사도로서의 요한을 무시하였으며, 두 번째로는 요한과 복음 전도자들에 대해 악한 말로서 비방하였다. 이것은 그들을 거짓으로 고소하는 장면에서 볼 수 있다(요삼1:10). 이것은 결국 오늘날 교회의 성도들에게 목회자에 대한 거짓 증거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볼 수 있다. 세 번째로 성도로서 해야할 당연한 의무인 형제 접대하기를 하지 아니하였으며, 네 번째로 오히려 전도자들을 접대한 사람들을 출교시킨 것이다. 요한은 디오드레베의 악행에 대해 말하면서 가이오에게 선을 행하도록 한다(요삼1:11). 디오드레베를 통해 사도 요한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들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2) 있어서는 안 될 사람

어떠한 공동체든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그 공동체 내에서 지위나 특권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벗어나는 생활을 하게 된다. 지위로 인해 교만해진 사람, 상대편의 권위를 인정해 줄줄 모르는 사람, 거짓으로 고소하는 사람들은 공동체 내에서 없어져야 할 것이다.

 

3. 끝인사(요삼1:13-15)

 

요한은 편지글의 마지막에서 자신의 소원을 말하고 잇다. 그것은 무엇인가? 여기에서 보여지는 요한의 의도는 어떠한 것인가? 서신서의 형태가 그러하듯이 항상 문안 인사와 끝 인사가 있다. 요한은 본 서신을 어떻게 시작하고 있으며, 끝맺고 있는가?

 

1) 기쁨의 마음과 간단한 끝인사

요한은 먼저 가이오에 대한 축복의 말로 본 서신을 시작하고 있다(요삼1:2). 그는 가이오의 행동에 대해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 서신을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자신의 마음을 말하면서 서신을 끝내고 있다. 그는 더 할 말이 있지만 직접적으로 대면하여 말할 것을 밝히고 있다(요삼1:13,14). 이것은 가이오가 속해 있는 교회의 형편과 처지가 좀 긴박한 상황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디오드레베의 악행으로 인해 교회 전체가 혼란의 도가니로 빠질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짧은 편지로서는 도저히 이러한 것에 대해 대처할 수 없었기에 직접적으로 만나고 싶어하는 요한의 간절하고도 답답한 심정을 토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요한은 간단한 인사로서 본 서신을 끝맺고 있다(요삼1:15)

 

2) 기쁨을 주는 삶

요한은 자신의 심정이 가이오로 인해 기뻐하고 있다는 사실을 피력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선행에서 오는 결과인 것이다. 우리의 삶의 결과로 인해 타인에게 기쁨을 주고 있는 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성도로서의 겸손하고 진실된 삶을 살 때 남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요한은 본 서신이 그저 한 사람의 개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오늘날 전교회에 적용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많은 성도들의 삶이 가이오와 데메드리오와 같은 삶이 되어야 하며 결코 디오드레베의 삶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다. 성도들은 영접해야 할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특히 영접해야 할 사람임에도 자신의 권위를 내세워 영접치 않는다는 것은 큰 잘못이다. 바로 교회와 성도는 이러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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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한삼서의 이해

 

버논 맥기(Vernon McGee)는 요한삼서에 대해 "요한이서에서는 진리 수호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본 서는 그 진리를 위해 일을 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한다.

이 말은 진리를 위해 일한다는 것은 전도자를 영접하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도자의 역할이 진리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를 돕는다는 것은 바로 진리를 위함이기 때문이다.

 

2. 내용 분해

 

Ⅰ. 인사말(1:1)

Ⅱ. 가이오의 덕망에 대한 칭찬(1:2-8)

    1. 가이오의 경건(1:2-4)

    2. 사역자들에 대한 대접(1:5-8)

Ⅲ. 디오드레베에 대한 책망(1:9-11)

Ⅳ. 데메드리오에 대한 증거(1:12)

Ⅴ. 끝인사(1:13-15)

 

*. 교회란 무엇인가 ?

 

오랜 세월에 거쳐 그 세대의 삶의 정황에 따라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각기 특성 있는 정의들이 내려져 왔다. 이를 고대와 중세, 근대 및 현대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1) 고대 감독들의 정의

고대 교회 직후에는 체계적으로 교회에 대한 인식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유대의 율법주의, 영지주의의 위협이나 이단들의 위협을 당하면서 교리적인 체계를 세우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에 대한 정의도 단편적이지만 내려지기 시작하였다.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리용의 이레나이우스(Irenaeus), 터툴리안(Tertullian), 키프리안(Cyprian) 등 많은 감독들은 교회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교회에 대해 정의를 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각기 처해 있는 정황에 의해 교회에 대해 언급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의 교회에 대한 정의는 점차적으로 정리되었는데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로 축약되었다. 사람에 따라 이 부분들은 각기 서로 다르게 강조되었다. 우선 '하나의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지역을 넘어선 하나의 교회를 의미하고, '거룩한 교회'란 세상과 분리되는 거룩한 하나님을 본받는 교회를 의미한다. 또 '보편적 교회'란 시공을 초월한 교회를의미하고, '사도적 교회'란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계승한 사도들의 가르침과 전승을 받고 있는 교회를 의미한다. 그리고 성만찬, 교제, 직제 등이 강조되기도 하였다.

 

2) 중세 교부들의 정의

중세의 교회론을 체계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이라 볼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당시 가장 큰 문제가 되었던 도나투스파에 대항하면서 교회론을 발전시켰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교회에만 성령이 있으며 교회도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로 나뉘어 가라지와 진정한 상도가 함께 공존하는 것이라 보았다. 그리고 도나투스파의 가시적 성화에 반대하여 교회의 보편성을 주장하였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중세의 교회는 사도 베드로에게 감독권이 있다고 보았고 사죄의 열쇠 또한 그에게만 있었으므로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의 권위가 매우 존중받게 되었다. 또 교회의 표시인 성만찬은 화체설로 변하였으며, 7성례가 교회의 표지로 채택되기도 하였다. 중세의 교회론은 많은 종교회의(니케아-콘스탄티노를 회의, 칼케돈 회의, 라테란 공의회, 플로렌스 공의회 등등)를 통해서도 정의되었다.

 

3) 근데 종교개혁자들의 교회론

중세에 내려졌던 교회에 대한 정의는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특히 화체설이나 교황의 권위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은 여러 가지 교회의 표지 중에 세례와 성만찬만을 대표적인 교회의 표지로 채택하였다. 그리고 화체설은 부인되었으며 설교권과 성경 해석권이 교황에게만 있다는 것을 거부하였다.

교회의 전통적인 정의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는 그대로 옹호되었고 이와 더불어 만인 제사장설이 교회에 도입되었다. 그리고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는 루터에 의해 구체적으로 발전되었으며 고대 교회의 감독들과 마찬가지로 직제, 기도, 설교 등도 강조 되었다.

 

4) 20세기 교회론

많은 신학자, 칼 바르트, 불트만, WCC(World Council of Churches)등에 의해 교회론이 다양하게 정의되었는데 교회사적으로 정의된 교회뿐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복잡한 정의들이 생겨났다. 자세히 살펴보면 WCC가 제시한 교회론에 의하면 구원이 과연 교회에만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지가 의심될 정도의 확장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인종, 성차별, 장애자 등 다양한 소외된 자들을 구원의 그늘로 맞아들이려 하고 있다. 이에 따라 교회의 사회 봉사적인 측면이 매우 강조되고 있으며 정치적 참여도 적극적으로 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과거의 전통적인 교회에 대한 인식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는 교회론도 존재하게 되었다.

 

5) 내가 생각하는 교회론

칼빈의 교회론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자는 교회를 어머니의 품으로 갖는다고 하였는데

이처럼 소중한 교회를 어떻게 바라보며 어떤 교회관을 가지는가는 각자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내가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교회를 상대하는 자세가 달라지기 때문인데

중요한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성경적 교회관은 무엇인가를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