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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당/* 마태복음 *

▼ 마태복음 18:21-35 적극적인 용서

by 朴 海 東 2016. 4. 26.

적극적인 용서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2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 마태복음 18:21-35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대가지불이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용서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용납하시기 위해서는

그의 거룩하심이 손상되지 않기 위해

자기 아들의 생명을 십자가 속전의 재물로

내 놓으셔야 했던 것에서도 명백해 집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에서 가르쳐주는

용서에 관련된 또 하나의 천국 비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용서의 가치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가르쳐 주기 위해

무려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탕감받은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당시 노동자 한 사람의 품 삯이

한 데나리온 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일만 달란트라는 액수는

나의 평생에 결코 갚을 수 없는 것을

상징적인 숫자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은 우리는

내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따라

나도 마땅히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내가 받은 하나님의 용서가 나에게

무효하게 될 것이라는

엄중한 경고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같이 하시리라

 

더불어 용서에 관련된 오늘의 말씀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에 대해

용서하는 문제는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비유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용서의 은혜

일만 달란트에 비교되는

일백 데나리온으로 비교되고 있습니다

당시 화페 가치에서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으로 계산된 것을 감안하면

이것은 10,000 X6,000: 1로 비교가 됩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주님께 물었던 질문으로써

형제가 나에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에 대한 해답입니다

 

베드로는 당시 완전수의 상징인

일곱 번의 용서 이면 되겠냐고 물었는데

예수님은 일곱 번 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하라고 하심으로

끝없는 용서[Endless Forgive]를 말씀하신 셈 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가치있는 소중한 용서가

싸구려 용서가 되지 않고

진정한 가치있는 용서가 되기 위해서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에서는

보충적인 설명을 첨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지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눅17:3-4]

 

용서의 문제와 관련하여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서로 보완적으로 묵상해볼때

따라서 용서의 문제는

용서 받아야 하는 자와 용서하는 자 쌍방이 모두

모두 열린 마음으로 일정 요건을 충족하여야 하는데

 

용서 받아야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은

자신을 겸손히 낮추고 용서를 구해야 할 필요가 있고

용서 해주어야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은

용서를 구하는 사람에 대해 얼마든지 열린 마음이

준비 되어 있어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용서와 관련된 앞선 문맥[18:15-18]과 관련하여

오늘의 말씀을 적용시켜 본다면

어떤 형제가 분명히 죄를 짓고 잘못했는데도

자존심 때문인지 아니면 무슨 이유에서든지

이 용서 받아야 할 문제를 풀지 않고 있을 때

 

네가 가서 그 사람을 상대하여 권고하고

만일 말을 듣지 않으면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라도

이 문제를 풀며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여

교회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교회의 치리인 출교를 통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길 것이며

 

이렇게 치리한 교회의 결정[땅에서 맨 것]에 대해서

하늘에서도 그렇게 받아 드려서 [교회의 권위 인정]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도 용서받지 못한 사람

곧 매임을 풀지 못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묵상적용

 

1. 성도[믿음의 형제] 상호 간 용서의 문제:

 

그런데 어제와 오늘 주시는 용서의 문제가

세상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인간 상호 간에

발생되는 용서의 문제보다

더욱 특별히 성도들이 함께 신앙 생활하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형제 사이에 발생하게 되는

용서와 관련된 말씀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성도 상호간의 용서의 문제는

용서 받아야할 자와 용서하는 자 쌍방이 모두

적극성을 가지고 임해야할 필요가 있음을 배웁니다.

 

용서받아야 할 자가 스스로 찾아와

용서를 구한다면 오늘의 말씀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얼마든지 용서하고 가장 좋은 해결이 되겠지만

 

잘못한 사람[죄 지은 사람]편에서 자존심이나

기타 이유로 용서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그냥 덮어놓고자 할 때 여기에는 반드시

마귀가 틈탈 수 있는 여지가 발생하기 때문에

 

앞선 문맥에서는 용서해 주어야할 입장에 있는 사람이

적극적인 용서의 자세를 가지고

그를 찾아가서라도 잘못을 지적하고

그래도 안 되면 두 세 사람이 동참하게 하고

그래도 안 되면 교회에 말해서라도

이 용서의 문제를 어떤 모양으로든지[용서 혹은 출교]

반드시 해결하라는 것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2. 주님과 성도 상호 간 용서의 문제 :

 

오늘의 말씀에서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끝없는 용서와 완전한 용서를 주문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신 주님께서는

또한 자기에게 대하여 이렇게 용서를 구하는 성도들을

능히 용서해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하니

내가 주님께 자백하는 죄들에 대해

얼마든지 용서받게 되리라는 확신으로 닿아지게 됩니다.

 

주님을 믿고 내 영혼이 구원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내 몸에 남아 있는 육신의 약함과 죄 성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주님을 배반할 수 있는

죄적 위험을 안고 사는 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오늘 주신 이 말씀이야말로

우리[내]가 주님의 용서에 관하여

얼마나 큰 확신을 가질 수 있는지 감동으로 닿아집니다

 

주님!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신 것처럼

주님께서 또한 나에게도 그렇게 상대해 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내게 베풀어주신 이 용서의 은혜와

용서의 정신을 나도 아름답게 실천하는

나의 신앙과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