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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당/* 로마서 *

▼ 로마서 1:8-17 복음전도의 부끄러움을 넘어서게 하는 복음의 능력 붙잡기

by 朴 海 東 2016. 9. 2.

복음전도의 부끄러움을 넘어서게 하는 복음의 능력 붙잡기

로마서 1:8-17


묵상내용

앞선 문맥[롬1:1-4]에서는
복음은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고
그가 왜 복음이 되시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분으로서
다윗의 혈통을 따라 자기 백성의 구원자로 오셨고
성령의 능력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신 분이시기 때문이라고 했다.

따라서 다시 정리하면 복음은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라고도할 수있는데
여기서 예수는 그의 인성을 지칭하는 이름이라면
그리스도는 그의 사역과 관련된 호칭으로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기름부음 받은 자로
보냄을 받으신 분이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어서 오늘의 이 말씀은 이 복음으로 인해
천지개벽[天地開闢]적인 삶으로 바뀐 한 사람, 곧
복음이신 예수를 만나고 자기의 전 생애를 기꺼이
예수[복음]의 종으로 드려 살며
이 복음을 위해 보냄 받은 사람
바울의 복음에 대한 자기 고백이 소개되고 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1:16]


바울은 복음 곧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History]를
전하는 것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고백 속에는
당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던 예수님에 대한
세간의 평판을 배경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 로마 제국 통치시대에
가장 치욕스런 죽음이자 인간 이하의 대접으로
사형을 받게 되는 사람들은 모두 나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인 것에서도 한 이유를 찾아보게 된다.

로마 제국의 십자가 사형제도는
당시 노예들의 반란으로 유명한
노예 출신 검투사 스파르타쿠스의 이야기에서도 나오는데
당시 로마 제국은 6,000명 이상의 반란자 노예들을
로마 아피아 가도에서 십자가에 매달아서 죽였는데[BC 71]

이 끔찍한 이야기는 예수님 자신도 알고 있었고
자신이 그렇게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을 내다보셨으며
로마 제국 치하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여서
십자가라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두려워하고
저주스러워했다는 것이 당시 십자가에 대한 이해였다.

오죽하면 십자가에 달려 죽는 사람들은
개죽음을 당한 것이라는 표시로써
개의 머리가 달린 십자가의 표지가 등장하기도 했다.

그런데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라는 것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전하는 것이니
오늘 우리 시대와 달리 듣는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고
따라서 어떤 기독교 반대자들은 예수의 십자가 상 대신
그를 모독하는 개의 머리가 달린 십자가를 사용하기도 했다.

오늘날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시대와 비교해서
예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부끄러움이
시대에 따른 문화적 차이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십자가의 복음이 주는
구원의 능력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여
우리[내]가 복음에 대한 열정이 뜨겁지 못한 것 같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했는데
여기서 믿는 자에게 주시는 구원이라는 것을

아브라함이 생리가 끊어진 사라에게 조차
하나님께서 생명[구원]을 주실 것을 믿은 결과로
이삭을 얻은 것과 연계하여 이해할 수 있다[롬4:18-24]

하나님은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 구원[생명]을 주신다.
그런데 한 불신 영혼이 구원을 얻는 데는
불신 영혼 당사자가 믿음을 갖게 되는 것에 앞서서
이 복음을 전달하는 사람 편에서

부끄러움을 넘어서는 믿음과
복음 전달의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을 바울의 고백에서 보게 된다.

왜냐하면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을 때 복음을 전하는 사람 편에서
이 사실을 믿고 전하는 진지한 자세가 없다면
복음을 전달받는 사람 입장에서 마음을 열수 없기 때문이다.

묵상적용

나의 젊은 시절에 감명 깊게 읽은 한 자서전적 소설로서
일본의 여류작가 “미우라 아야꼬“가
자신이 구원받은 과정을 쓴 “길은 여기에”라는 책이 있다

그녀가 결핵 병원에서 투병생활하고 있을 때
함께 투병 중에 만난 “다다시”라는 사람과 환우가 되어
일본 패전 후 깊은 허무주의에서 인생을 논하게 되는데
이 다다시 상은 독실한 그리스도인으로써
기회가 있을 때 마다 그녀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 패전 후 자신이 믿어온 모든 진리에 대해
냉소주의로 변한 그녀의 마음은 굳게 닫혀서 열려질 수 없었다.

어느 날 홋가이도의 추운 겨울이 물러나고
그들이 살고 있는 홋가이도 “아사이가와”에 봄이 왔을 때
그들은 싸리 꽃이 만발한 언덕에 올라가 인생을 논하게 되는데
다다시가 전하는 복음을 그녀가 받아 드리지 않고
계속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안타까운 마음이 터진 다다시 상은 돌멩이를 하나 들어서
자신의 발을 연거푸 내려치게 되는데
이 일로 인해서 미우라 아야꼬의 마음에 변화가 생긴다.

이렇게까지 전도하는 저 사람의 말은 진실이 아닐까
작은 파동이 그녀의 마음을 열게 하고 이후 그녀는
일본 기독교를 대표할 만한 그리스도인 지성이 되어
수많은 글들을 써내며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오늘의 말씀을 정리하면서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을 넘어서게 하는
복음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
복음을 전하되 진지하게 전하지 못해온 나의 모습을 본다.

다른 것은 몰라도
내가 복음의 능력을 확신하는 믿음이 있어서
내가 전달하는 복음을 듣는 사람에게
다다시가 미우라 아야꼬에게 보였던
그런 열정과 진지함을 보일 수 있다면
아야꼬가 말한 것처럼
나도 저 사람이 가는 방향으로 따라가볼까 마음을 열며
마침내 믿음의 길에 들어서게 되는 역사가 있지 않을까(?)

복음에 대하여 증오하고 박해했던 바울이
돌에 맞아 죽어가던 스데반이 임종 전에
하늘을 우러러 기도했던 그 거룩한 모습을 보고[행7장]
다메섹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시력을 잃을만큼 강렬한
예수님의 빛을 맞으면서 회심하게 되는 것처럼[행8장]

어떤 경우 한 영혼이 구원받는 과정에는
복음에 담긴 하나님의 능력에 닿아지기 위하여
복음 전달하는 사람들 편에서
복음 전도의 부끄러움을 넘어서게 하는
복음의 능력에 대해 확신과 진정성을 보임으로써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마음 깊은 교훈으로 받아 드린다.

주님!
죽은 영혼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기 위하여

복음 전도의 부끄러움을 넘어서게 하는
복음에 담긴 능력을 확신하는 것과
복음 전달자의 진정성을 보일 수 있는
복음의 전령사가 되게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