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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당/말라기

▼ 말라기 3:7-12 십일조와 헌금의 정신

by 朴 海 東 2016. 2. 19.

십일조와 헌금의 정신

말라기 3:7-12

묵상내용

1. 돈[물질] 때문에 틀어지는 하나님과 관계[3:7]

사람 사이에 돈 문제가 얽혀서 서로 마음 상하면
서로 틀어지게 되고 불화하게 되는 것처럼
오늘의 말씀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도
돈 문제 때문에 서로 등 돌리게 되는 일이 생기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것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우리 교회에 서로 죽고 못 사는 절친한 자매들이 있었는데
한 자매가 돈을 빌려가고 갚아주지 못하니까
서로 간에 원수처럼 돌변해서 크게 싸우는 것을 보고
교회 안에는 절대 교인 간 돈 거래가 없어야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 사이에 돈 문제에는 이처럼 민감하면서도
하나님과의 사이에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돈 문제에
대해서는 너무 무디어 있지 않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2. 내가 언제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것이 있습니까?

헌금을 못 내면 못내는 것인데
왜 헌금을 못내는 것이나 마음이 없어 적게 내는 것을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라고 하십니까..........?

여기서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다고 하는 말씀 속에는
오늘 나에게 있는 생명으로부터 시작해서
나의 시간과 물질, 그리고 특별히 돈에 이르기까지
모든 소유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라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더욱 특별히 돈에 관해서 말하자면
오늘 내가 특별한 재능이 있어 돈을 많이 모을 수 있다면
이런 재물 얻을 능력까지도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은 몰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내 손의 재물 얻을 능력조차도 모두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가 네 손에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신8:18]


3. 십일조와 봉헌물을 요구하시는 하나님 :

천하의 은금이 다 주의 것이며
천산의 생축이 다 주의 것인데
주님은 무엇이 부족하여 우리가 드리는 헌금을 요구하실까
하나님은 왜 돈이 필요하실까요... (?)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십일조를 드리는 문제와 관련하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라는 말씀에서
힌트를 얻습니다

구약 이스라엘 공동체는 농경사회 였기 때문에
맥추절이나 추수감사 절기에 모든 소출을 거두고
그 중의 십일조를 드려서 그것으로
하나님의 집인 성전에서 봉사하는 제사장들의 생계가 되었고
또 가난한 자들이나 과부나 고아 그리고
나그네들의 구제금이 되었는데
십일조를 바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집에 양식이
떨어져 제사장들의 생계가 어려워졌기 때문입니다

말라기를 시작하는 말씀의 첫 장에서부터 제사장들에 대한
책망이 나오고 있는데 이렇게 하나님의 집으로써 성전에
양식이 없으므로 제사장들이 먹고 살기 위해
비루하게 되었고 제사장적 기능을 제대로 못하여
책망 받게 된 것이라고 추측하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이 모는 책임은
백성들을 잘못 가르친 제사장들의 책임이 우선하고
또 이어서 하나님의 규례를 따라 하나님의 집에
드려야할 것을 제대로 드리지 않은 백성들에게
이러한 책망이 내려오고 있다는 것을 암시 받게 됩니다.

묵상적용

4. 지금은 신약시대인데
구약 율법규례로 주신 십일조가 지금도 유효한 것입니까 ?

우리 한국교회는 다른 나라 교회들과 달리
십일조의 아름다운 전통이 잘 내려와서
교회들이 부요함의 축복을 누리며
또 구제와 선교에도 풍성하여 다른 나라 교회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중국의 교회들을 보면 천 명이 넘는 교회인데도
자립이 안 되어서 한국교회의 지원을 받는
교회들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한국교회 안에도 십일조에 대한
회의적인 주장과 발언들이 나오고 있는데
십일조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한 마디로 십일조가 구약의 율법 제도 아래서 있었던 것이고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이미 완성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면 성경에 나오는 십일조의 기원이
모세의 율법에서 주어지기 전에도
이미 믿음의 족장들에게서 보여지는 아름다운 전통으로
소개가 되고 있는데 아브라함이 샬렘 왕이며
제사장인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것이 나오며 [창14:20]
[이 멜기세덱을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과 관련시킵니다]

야곱도 집을 떠나 하란으로 가는 여정에
자신의 생애 가운데 처음으로 하나님을 대면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소원기도와 십일조를 관련시켜
하나님께 말씀 드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창28:22]

따라서 십일조는 율법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십일조는 필요하지 않다고 십일조 무용론을 말하는 것은
성경의 전체적 흐름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예수님의 십자가로 모든 율법이 완성된 신약시대에서
헌금의 개념은 주님이 나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목숨을 내어주셨는데 이제는 나의 모든 것이 주의 것이므로
마땅히 구약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린 최소한의 기준으로써
십분의 일 이상을 할 수 있어야겠다는 것이
솔직한 신앙양심입니다.

그러나 또 한 편 바울이 성령의 계시로 신약교회들에게
가르친 헌금의 개념을 보면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내는 것이 아니라
즐겨낼 수 있어야하는 헌금의 원리를 감안해 볼 때
아직 믿음이 없는 초신자나 기타 성도들에게
십일조를 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죄악시한다거나
부담을 주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더불어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분명한 것은
십일조는 주님 앞에 심는 축복의 씨앗이 되어서
더욱 풍성하게 되돌려 받는다는 이 약속을 믿어야하고
또 주님은 반드시 이렇게 축복해 주시는 분이신 것을
오늘의 말씀을 통해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3:10]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함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후9:6]


이처럼 십일조가 주님의 축복이 걸려있는 것이라고 하여도
진정한 십일조와 기타 헌금의 정신은
나의 생명으로부터 시작해서 나의 모든 소유의 주인이신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과

한 걸음 더 나가 아들의 생명을 내어 주시기까지
나를 구원하시고 나를 사랑하여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는 내 편에서의 사랑과
헌신의 표시가 되야할 것을 마음 깊이 다짐 합니다.

--------[말씀에 응답하는 기도]----------

내 생명과 삶의 주인이신 주님을 인정하는 믿음과
아들의 목숨을 내어주시기까지 나를 구원하여주신
주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헌신의 표시로
나의 예물을 주님께 드릴 수 있게 하옵소서
오직 감사함과 즐겨함으로 자신을 드리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