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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당/* 요한계시록*

▼ 요한계시록 6:9-17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 터틀리안 -

by 朴 海 東 2016. 2. 19.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 터틀리안 -

요한계시록 6:9-17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 요한계시록 6:9-17

묵상내용

첫 번째 인을 떼실 때 나타난 백말과
그 위에 타신 예수님께서
세상을 복음으로 정복해 나가시는 복음 운동이
이기고 또 이기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으며

이어서 나타나는 붉은말/검은말/청황색 말과
그 탄자들의 악역 수행이
비록 세상에 무서운 전쟁과 그로 말미암은
기근과 사망의 재앙으로 이어지게 되지만

이 것들 역시 세상을 복음으로 정복해가는
복음 운동을 더욱 활발하게 만들어주는
섭리적 사건들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으로 이해했는데

오늘의 말씀에서 소개되는 다섯 번째 인을 떼면서
나타나는 순교자들의 탄원도
더욱 주님의 재림을 재촉하며 더욱 활발한
복음의 역사를 위해서 작용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6:9-11]


초기 기독교 교회가
로마 정부의 무자비한 핍박을 받을 때
기독교의 진리와 사상을 대변하기 위하여 분연히 나선

변증가 중의 한 사람이 터틀리안 이었는데
그는 어거스틴과 한 고향인
북아프리카 칼타고 출신으로
주후 200 년경 칼타고의 장로가 되었습니다.

기독교 변증가로서 그는 유명한 어록들을 남겼는데
믿음보다 이성적 사고를 중시하는 헬라 철학에 대해

모순되는 고로 나는 믿는다 !
아덴이 예루살렘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 등 등
기념비적인 어록들을 남겼는데

기독교 신앙을 핍박하는 로마 정부에 대하여
그가 특별히 남긴 어록을 보면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라는 말입니다

순교자들의 피가 뿌려지는 곳에
복음은 우후죽순처럼 뿌려지고
복음은 들 플 처럼 퍼져나가서
더 많은 기독교 신자들과
교회들을 양산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순교자에 대하여 많은 것들을 생각해보게 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게 됩니다.


1. 순교자들의 피맺힌 절규는
---원한의 절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 집행을 위한 것입니다


다섯 째 인을 떼실 때 일찍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이
대주제 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피맺힌 탄원을 보여주는데
언제까지 이 핏 값을 갚아주지 않으시고
내버려 두시겠느냐는 탄원 입니다.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순교자들의 원한 맺힌 절규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는 것이어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친히 본을 보였고
스데반 집사님도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달라고 했는데

왜 오늘의 말씀에 등장되는 순교자들의 외침은
보복성 탄원처럼 들려지는지
의문 가운데 이 점을 깊이 묵상해보게 됩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여기 등장되는
순교자들의 외침은 자신들에 대한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외침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지상교회가 핍박을 당할 때
“땅에 거하는 자들”에 의하여
하나님이 이처럼 무시되고
하나님의 공의가 이처럼 짓밟혀져서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되어버렸는데

“하나님께서 언제까지 참으시며
언제까지 두고 보시겠습니까” 라고 외치는
하나님을 위한 절규요 탄원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순교자들은 자신들이 복음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를 위하여
피흘려 죽기까지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이
결코 자신들의 공로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처럼 순교까지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마치 영광스런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24 장로가 자신들의 금 면류관을 벗어서
보좌 앞으로 던지며 우리의 공로는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는 것과
뜻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4:10]

따라서 자칫 자신들을 죽인 사람들에 대해 원수를
갚아달라고 하는 것처럼 보여지는 이 절규들은
자신들을 위한 외침이 아니요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속성에 호소하는
지극히 정당한 호소요 탄원으로 받아 드려집니다.

묵상적용


2. 순교자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순교 이유가 되었던 하나님의 말씀 입니다


진정한 순교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들의 목숨을 내 놓았습니다.

그들의 순교 이유와 동기가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는데
사람들이 순교자들을 영웅시하고 숭배하면서
더 중요한 이유와 목적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등한히 하는 것은
정말 잘 못된 것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순교자들의 공덕을 높여서
그들을 성인의 반열에 올리기 위해
복자식을 거행하기도 하는데

이번에도 교황이 한국을 방문하여
광화문 앞에서 이런 복자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순교자들에게로 돌리기보다는
이들로 하여금 기꺼이 자신들을
순교의 제물로 내놓게 만든 이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에 나의 시선을 고정하여야 하고

나도 역시 이 말씀과 운명을 같이하겠다는
순교자적 신앙의 자세를 갖는 것이
주님 앞에 아름다운 자세라고 생각됩니다


3. 이세상의 역사는
---순교자들에 의해 운명이 좌우되는
---시한폭탄성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이 언제까지 더 기다려야하느냐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답변은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들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라고 하셨는데

과연 이 말씀 속에는 두렵고 떨림이 있으며
영적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은 지금 하나님 없이도
제잘 난 멋으로 돌아가는 것 같지만
순교자들의 수가 차기까지라는 말씀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처럼
매우 한시적인 기간을 지나고 있는 것이며
심각한 초긴장의 시대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 순교자들의 수효를 생각해볼 때
최초의 순교자 아벨의 피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때문에 죽은
구약의 수많은 순교자들과

또 신약으로 들어와서 아버지의 뜻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순교로부터 시작해서

아기 예수님의 탄생 때 죽었던
베들레헴의 수많은 유아들과
또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친
사도들과 초기교회 성도들을 생각해보게 되며

또 복음의 본질을 잃어버린 중세 교회를
바르게 되돌리기 위해 나섰던 종교개혁자들의 희생,

그리고 더욱 이 복음이 세상 나라들 가운데
퍼져가게 하기 위해서 기꺼이 바다를 건너고
국경을 넘어 해외로 나간 선교사들의 순교적 죽음까지

이 순교자들의 수는 지금도 채워져가고 있는데
오늘의 말씀에 마지막으로 소개되고 있는
여섯 번 째 인을 떼면서

마침내 세상 역사의 피어리드/마침표가 찍혀지고
천재지변을 비롯한 대 재앙이 쏟아지는 것이
순교자들의 수효를 채운 다섯 번 째 인에 이어서
나타나는 것을 보면
과연 이 세상의 역사는 순교자들이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서 드리는 탄원적 기도와
그 축을 같이하고 있다는 결론을 가지게 됩니다

오 주님 !
순교자들의 기도와 맞물려서 돌아가는
이 세상의 역사가
지금 어떤 운명에 놓여 있는가를 보면서
제가 영적으로 깨어서
초긴장으로 살아야 함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순교자들의 탄원적인 기도를 늘 기억하면서
이 세상의 풍조에 휩쓸리지 않게 하시고
깨어 주님을 섬기는 신앙과 삶이 되게 하여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