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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당/* 열왕기상 *

▼ 열왕기상 22:1-12 이 외에 우리가 물을 만한 선지자가 없나이까

by 朴 海 東 2016. 2. 22.

이 외에 우리가 물을 만한 선지자가 없나이까

열왕기상 22:1-12

묵상내용


1. 잘못된 동행은 화를 부른다. [22:1-4]


아합이 북 왕국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에
여호사밧은 남 왕국 유다의 왕으로서
진실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왕이었다.

그런데 그는 무슨 의도로 그랬는지 모르지만
악한 왕 아합의 딸을 며느리로 받아들이고
아합 왕가와 연혼을 맺게 되는데 [왕하8:8]

북 왕국과 남 왕국 사이에 건국초기부터
줄기차게 내려온 전쟁을 종식 시키게 된
전략적 결혼이 된 잇 점도 있었지만

이 전략적 결혼은 훗날 유다 왕국이
아합의 딸 아달랴의 섭정으로 들어가면서
다윗의 왕통을 끊어서
메시야의 오는 길을 차단하려하고
사단 마귀의 역사를 개입시키는
화근이 되기도 한다. [왕하11:-3]

어디 그뿐인가 오늘의 말씀은 그가
아합을 만나러 사마리아로 내려갔다가
함께 전쟁에 참전해 달라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함께 전쟁에 나갔다가

이어지는 말씀에 보면 그는
거의 죽을 직전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겨우 살아 나오기도 한다[왕상22:32].

아무리 국익을 위한다고는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로서 유다 왕국의 안정은
전략적인 외교 정책에 있기보다
하나님의 보호에 의지해야했고
이것은 솔로몬 시대의 뼈아픈 교훈이기도 했다.

여호사밧이 선택한 “아합”과의 연합과 동행이
얼마나 위험한 것이었던 가를 보여주고 있는
열왕기 저자의 기록은
오늘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의 파트너로서 나는 어떤 사람을 선택하며
누구와 동행해야 하는 가를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잠13:20]



2. 400명 거짓 선지자와 그 예언이 암시하는 것 [22:5 -6]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 400명과 갈멜산에서
불의 백병전을 벌일 때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던 것 같은 이들 선지자
400 명은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가 (?)
엘리야도 오죽하면 “ 오직 나만 남았다”고
자신의 고독한 싸움을 입버릇처럼 뇌 내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갈멜산 사건 이후
선지자들의 활동이 자유로워져서
숨었던 선지자들이 나온 것인지 아니면
그동안 선지 학교에서 배양된 선지자들인지 의문인데
중요한 것은 오늘의 말씀에서 이들 모두가
거짓 선지자들로서
거짓 영에 휘둘리는 사람들로 등장된다는 것이다[22:22]

그리고 이들이 길흉사를 문의하는 왕에게
한 목소리로 전쟁의 길조를 이야기 하며
승리를 보장해 주고 있지만
기실 이들의 말을 듣고 전쟁터로 나간 아합에게
그의 마지막 길을 재촉해주는 예언들이 되었으니
열왕기 저자는 이 400 거짓 선지자를 통해
우리[나]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400 거짓 선지자들은 이미 아합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을 정녕 몰라서 이렇게
이렇게 그의 앞길에 승리와 축복을 말해주는 것인가(?)

이러한 길흉사의 이야기는 하나님께 묻고 말고를 떠나서
이미 엘리야의 심판 경고 속에 그리고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던 선지자 등을 통해
던져진 말씀 속에 다 해답이 들어있는 것이어서
아합에게 길조를 이야기 해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활동했던
400 명의 바알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선지자로 자처하는 400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쓴 소리, 바른 소리,
돌이켜 회개시키는 소리를 내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앞에 놓여있는 죄인에게
승리와 축복과 길조만 이야기 해주는 이런 모습은

오늘 우리 주변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이며
바알의 400 선지자가 여호와의 400 선지자로
이름만 바뀌어서 재현되고 있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오늘 내가 주의 말씀을 전달해주는 말씀의 사역자로써
정신을 차리고 바로서지 못하면 열왕기 저자의 암시처럼
나도 바알의 400 선지자의 길을 따른
여호와의 거짓 400 선지자 중 한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이 아침 쓰디쓴 일침으로 마음 깊이 받아 드린다.

묵상적용


3. 이 외에 우리가 물을 만한 선지자가 없나이까[22:7]


함께 전쟁터로 가자고 하는 아합의 제의를 거절하지 못해
스스로 사냥꾼이 쳐놓은 올무로 들어가는 여호사밧이
그나마 이 전쟁에 대해 여호와께 물을 자를 찾은 것은
불행 중 다행으로 그나마 잘한 것이고

또 400 선지자의 이야기를 듣고서도 마음이 찜짐하여
이 외에 달리 물어볼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없느냐고
물어본 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

그가 이렇게 물어볼 선지자가 달리 더 이상은 없느냐고
부정 의문으로 물은 것은 그 만큼 신뢰할 만한 선지자가
없다고 하는 것인데 이런 와중에서라도 그나마
자신에게 흉한 일만 예언해주는 한 선지자 “미가야”의
이야기를 듣고 그를 불러오게 한 것은
정말 잘 한 일중에 더욱 잘한 일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왕의 얼굴이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으로써
흉한 일도 서슴없이 말할 수 있는 미가야를 통해서
이스라엘과 아합의 장래사를 전달할 수 있으셨으니

그나마 하나님의 나라로서 이스라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어찌하랴 거짓 선지자의 대표 시드기야가
중심이 되어 이끄는 400 선지자의 예언과
특별히 “스드기야”가 철뿔 까지 만들어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의 상징성이라고 들먹이며
너무나 확실하게 승리를 보장해 주므로

두 왕이 모두 전쟁터로 올라가는 선택을 하게 되니
이것은 마치 새 사냥꾼이 처 놓은 새장 그물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는 꼴이 되고 말았다.

400:1의 숫적 열세 속에서 참 선지자 미가야의 말이
받아드려질 여지가 없었으니
이것이 그 시대와 두 왕의 비극으로 이어지게 된다.

생삶 오늘의 말씀에 소개된 주제처럼
진리는 절대 다수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무시할 수 있는 어떤 한 사람의 말이라고 하여도
귀를 기울일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이 사건을 통해 더욱 확실히 깨닫게 된다.


4. 오늘 우리시대 예언사역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뜻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수적인 대세의 기울어짐에 있지 않고
자기가 본 것을 의지하여 말하는
신비주의자들의 여하한 말에도 좌우되지 않으며

지금 하나님의 뜻이 어디로 향하여 흐르는지
알아보는 예민한 영적 통찰력과
또 내 안의 거짓 없는 양심이 내게 증거 하는 바
내가 기도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어떻게 내 영에 반응하여 주시는지를 알게 되는
영적직관을 존중하면서도

그러나 여전히 장래사에 속한 일들은
겸손히 주님께 맡기고 내려놓아야 하는
영적 영역인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왜냐하면 제한된 시공간에 한정된 인간에게
주님은 장래에 속한 일들은
오직 주님께 속한 주권적인 일로써
세상 가운데 현실로 나타내는 것을 기뻐하시며
우리는 이것을 보편적 진리로 받아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3:11b]


[장래사의]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께 속하였거니와
[현실적으로]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신명기29:29]

이처럼 하나님께 속한 영역을 하나님의 것으로
남겨 놓아야 하는 보편적 진리에도 불구하고
굳이 하나님께 속한 장래사의 일을 알고자 한다면

이런 신비에 속한 일들은 개인적으로 하기보다
성경이 가르쳐 주는 은사활용의 원리를 따라서
교회 공동체의 질서 속에서 하는 것이 필요하며

이 때 예언 은사를 가진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더불어 예언사역에 참여하므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게 하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


예언하는 자들은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고전14:29]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같은) 예언하는 자들의 제제를 받나니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요
화평의 하나님 이시니라 [고전14:32-33]

주님 !
법궤 속을 들여다보다가
죽임을 당했던 사람들처럼
오늘 내가
주님께 속한 영역을
나의 현실로 가져오기 위해
함부로 침범하지 않게 하시고

이미 주신 기록된 말씀과
그 말씀과 더불어 역사해주시는
성령의 가르쳐주심에
민감할 수 있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