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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당/* 열왕기하 *

▼ 열왕기하 1:9-18 구약의 엘리야와 오리라 한 엘리야 비교

by 朴 海 東 2016. 2. 22.

구약의 엘리야와 오리라 한 엘리야 비교

열왕기하 1:9-18

묵상내용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세 가지 의문을 갖게 된다.


1. 아하시야의 군사 파견의 숨은 동기[이유] [1:9-12]


하나님보다 귀신의 왕 바알세붑을 찾은 아하시야 왕에게
하나님의 심판경고가 전달된 후
아하시야는 왜 군사들을 보내어
엘리야를 데려오려고 했을까(?)

아하시야는 엘리야가 전달한 저주성 심판을 경고 받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낮추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보다
자신에게 저주성 심판을 전달한 엘리야를 제거함으로써
그의 입을 통해 전달된 심판의 효력이
정지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은데

이는 당시 이방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풍습으로써
저주를 취소하게 하거나 혹은 저주한 사람을 죽여
저주의 효력을 상실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이교도적 사고이며 풍습이었다.

백성을 대표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매개하는 이스라엘 왕의 신관이
이처럼 이교도적으로 흐르는 것을 보면
당시 전체 이스라엘의 신앙이 어떠했었는지 짐작이 간다.


2. 하늘에서 불벼락을 맞아 죽은 두 오십부장과 100인


두 오십 부장과
그들의 지휘를 받은 100인의 목숨을
엘리야는 너무 가벼이 생각한 것은 아닌가 (?)

두 오십부장이 엘리야를 찾아가서 그에게 한 말을 보면
그리 잘못한 것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에 내려오라 하셨나이다"

문자적으로만 보면 엘리야에게 함부로 하는 말도 아니고
오히혀 그를 존중하는 표시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호칭한 것 같고

더불어 그들은 아무 무력도 쓰지 않았으며
다만 왕의 말을 전달했을 뿐이다.
그런데 왜 그리 쉽게 그들을 죽게 해야만 했던가 (?)

이 의문에 대한 해결은 이들이 왜 엘리야를 찾아 왔으며
왕은 무슨 목적으로 이들을 파견했는지에 달린 것 같다.

아하시야가 엘리야가 전한 하나님의 심판을 전달받고
마음을 낮추고 회개하며 하나님을 구하고자 했다면
그는 군사들이 아닌 자기의 사신들을 보내
정중히 엘리야를 모셔가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그렇게 겸손하게 낮아져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만한 위인을 되지 못한 것 같으며
명령에 죽고 사는 군사들만 죽어나가는 결과가 되었다.


3. 산 위로 올라가 엘리야 앞에 무릎을 꿇은
---오십부장과 그에게 속한 오십인이 받은 은혜[1:13]


엘리야를 체포하러 간 앞선 오십 부장 두 사람과
100 명의 군사가 이미 불벼락을 맞아
죽은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군사를 보내는
아하시야의 교만과 고집도 여간 보통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세 번째로 파견을 받은 오십 부장은
아하시야의 교만과 고집을 뛰어 넘어
엘리야가 있는 산 꼭대기로 올라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자비를 구함으로
자신과 또 자신에게 속한 오십인의 목숨을 구하게 되며
엘리야를 왕의 앞에 인도해 오는 임무도 완수하게 된다

진실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느니라[약4:6]는
말씀의 성취를 이 세 번째 파견된 오십 부장 에게 본다.

오늘 나하고 상황과 처지는 다르지만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하여
찾아가야 할 대상과 내가 가져야 자세가
무엇인지를 이 세 번째 오십 부장에게서
발견하게 되며 꼭 실천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

묵상적용


4.엘리야와 다시 오리라한 엘리야와 비교


구약 열왕기가 보여주는데 엘리야는
여호와의 신앙이 바알 신앙으로 변질되거나
혼합 주의로 전락한 그 시대에
여호와 순수 신앙을 회복을 위해서
특심한 열심을 가지고 활동했던 선지자다

구약의 마지막 장 마지막 세 구절은
이 선지자를 다시 보내리라는 약속과
그가 와서 할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데[말4:4-6]

그것은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아비에게 돌이키게 하는 일인데
이 예언은 그대로 신약으로 들어와서
세례요한에게 성취되었다.

그는 엘리야처럼 (약대)털옷을 입고
가죽 띠를 띤 사람으로 살았고[왕하1:8/마3:3]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사람으로 살았는데
예수님은 오리라 한 엘리야가
바로 세례요한 이라고 하셨다 [마11:14]

그런데 오늘의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구약의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을 떨어뜨리는
능력의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는 반면
신약에 등장하여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오리라한 엘리야로서 세례요한은
그의 생애에 단 한 번도 이적을 행하지 않았고
오직 불같은 회개의 메시지만을 전파했다

또 그의 마지막은
엘리야의 경우처럼 자기를 잡으러 온 사람들을
하늘에서 불을 내려 죽이는 능력의 사람으로서 보다
오히려 왕의 군사들에게 잡혀가 감옥에 갇히게 되고

헤롯의 생일날
헤롯의 정부 헤로디아의 딸이 춤 한번 잘 춘 대가로
목 베임 당한 머리가소반에 담겨져 전달된 것을 보면

구약의 엘리야보다 신약의 엘리야로서 세레 요한의 삶은
너무 무기력하고 허망하게 끝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구약에 나타난
엘리야의 불을 내리는 능력으로도
이스라엘의 변질된 신앙을 회복할 수 없었고
이스라엘은 그대로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졌을 뿐이다.

하나님을 등지고 멸망으로 가는 사람들의 변화는
하늘에서 불을 떨어트리는 심판과 같은
무서운 능력을 보이는 것으로써 되는 것이 아니다
세례요한 역시 엘리야와 같은 불의 심판과
능력을 기대하기도 했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해주지 않으셨고
다만 불같은 메시지만 전하다 가게 하셨다.

이는 메시야 시대의 시대의 구원의 방법은
불같은 심판과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여주신 바 하나님의 자비와
십자가 희생으로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마무리할 시점에 이르러
가이사라 빌립보 지역으로 올라갔다가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 하실 때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잠잘 방도 내주지 않고
문전박대를 당하게 되는데
이때 제자들이 하늘에서 불을 내려서
본 때를 보여주자고 했을 때
오히려 제자들을 꾸짖으시며
다른 마을로 가자고 하셨다. [눅9:51-56]

이것은 엘리야가 했던 것처럼
하늘에서 불을 내릴만한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지금 십자가를 향하여 가는 길이기에

“너희는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 모르는 구나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하러 왔노라 하셨다[눅9:55절에 대한 난하 주]

세례요한과 예수님 이후 우리 시대의 진정한 능력은
하늘에서 불을 떨어트리는 능력이 아니라
바울이 고백처럼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기 위하여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처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그리고 .......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병기로 좌우하는 것에 있음을 믿는다[고후 6: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