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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당/여호수아

▼ 여호수아 8:24-35 저주를 끝장 내기 위하여

by 朴 海 東 2016. 8. 3.

저주를 끝장 내기 위하여

여호수아 8:24-35

묵상내용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세 가지 소재가 마음에 남겨진다.

1. 아이 성 전투가 끝난 후 아이 왕을 사로잡아 나무에 달아 죽인 것
2. 에발 산에 쇠연장을 사용하지 않은 자연석 그대로 제단을 만든 것
3. 백성을 절반으로 나누어 그리심산 과 에발산에 배치하고
---레위 인들의 선창에 따라 각각 축복과 저주를 선포한 것 등 이다.

1. 나무에 매달은 죽음의 성격이 의미하는 것[8:24-29]


아이 왕을 사로잡아 나무에 달아 죽이고 해가 지기 전에 그 시체를 내려서 돌무더기를 쌓았다는 기록은 신명기 21:22-23절의 성취로써 거기 기록되기를 사람이 만일 죽을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에 달거든 그 시체를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았음이니라고 하였다.
한 번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참담한 패배를 안겼던 아이 왕 이었기에 이렇게 저주스런 죽음을 안기고 싶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지만 여호수아는 지금 의도적으로 신명기의 말씀을 성취시키고 있음과 동시에 한편 자신도 모르는 와중에서 장차 자기 백성의 왕으로 오실 그리스도께서 장차 이렇게 저주받은 이방의 왕처럼 나무에 달려 죽으시는 죽음을 죽게 될 것에 대한 예시를 하고 있었음은 꿈엔들 몰랐을 것이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눈을 촉범하고 거슬리는 가나안 이족들의 우상숭배와 더러운 죄악 문화를 척결하는 의미로 성을 정복해 나갈 때 마다 꼭 저주로 끝맺음을 하고 있는데 “여리고”에서는 다시 그 저주스런 성이 쌓아지지 못하도록 저주 선포로 끝맺었고[수6:26]
오늘의 말씀에 나오는 아이 성에서는 왕을 잡아 저주 받은 자의 죽음을 상징하는 나무에 매달아 죽이는 것으로 끝장을 보고 있다.

구약 성경 전체에서 장차 오실 메시야의 죽으심이 어떤 성격의 죽음인가를 암시하는 구절은 오늘의 본문 8:28절과 이 죽음의 성격을 설명하는 신명기21:22-23절의 말씀이 유일하므로 나는 왠지 모르게 이 구절을 그냥 지나치기가 쉽지 않고 굳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매치시키게 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예수님이 사형 판결을 받으시고 사형장으로 가시게 될 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이 왕처럼 칼로 참수시키거나 창으로 찌르거나 돌로 쳐 죽이는 그런 죽음이 아니라 굳이 나무에 달려 죽으시게 된 것은 신명기 21:22-23절의 성취이자 저주 받은 자의 죽음이 되신 것을 성취하신 것이다.

저주 받은 자가 되어 나무에 매달린 자의 시체를 해가 지기까지 그대로 두면 그 땅도 더럽혀 지기 때문에 해가 지기 전에 끌어내려서 장사 지내게 하라고 하신 것이 모두 예수님에게 성취 되었는데 그 때 예수 처형에 앞장섰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매달았던 십자가의 명패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것도 눈에 거슬려서 빌라도에게 명패의 문구를 바꾸어 달라고까지 하였던 바 그들은 한 마디로 예수가 저주 받아 죽은 아이 성의 왕 정도로 생각하였음이 틀림없음이라고 생각된다.

주님의 종, 사도 베드로와 바울은 나무에 매달려 죽은 자의 죽음이 가리키는 성격이 무엇인지를 그의 편지 가운데 잘 설명해 놓았는데 자기 백성의 진정한 왕으로 오셨지만 종교지도자들이 빌라도에게 요청한 것처럼 저주 받은 아이 성의 왕 정도로 취급받으신 예수님의 죽음이 실제로 의미했던 바가 무엇이었던가를 밝히고 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2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묵상적용


2.에발산에 쇠 연장을 사용하지 않은 자연석 그대로 제단을 만든 것[8:30-32]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사를 읽어나가면서 흥미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이 성 전투의 승리 후에 신명기에서 주신 여러 가지 말씀을 이곳에서 성취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앞선 말씀에서 아이 왕을 잡아 나무에 매달아 죽이고 해지기 전에 끌어 내린 것[신21:22-23] 그리고 에발산에 한 제단을 쌓게 되는데 쇠 연장을 사용하지 아니한 자연석 그대로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있는 점과[신27:1-8]
또 에발산에서의 저주와 그리심산에서의 축복 선언이 그것이다.[신27:9-26]

아직 가나안을 정복하기 전인 요단 동편에서 모세는 죽기 전에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해야 할 일들을 여러 가지로 알려 주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에발산에 제단을 쌓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산이 바로 아이 성과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에 모든 가나안의 모든 지형지물에 대해 훤히 꿰고 있었던 모세의 지시에 따라 지금 여호수아는 이 에발 산에서 큰 돌들을 세우고 석회석을 바른 후 거기에 율법의 말씀들을 기록함과 아울러 또 그곳에 자연석으로 만든 한 제단을 쌓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를 끄는 것은 왜 철 연장을 사용하지 아니한 자연석 그대로 제단을 만들라고 하신 것일까 하는 점이다
만일 철 연장을 사용하여 돌을 깎고 다듬으며 아름답게 장식한 제단을 만들면 이 외형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겨 정작 하나님께 향하는 마음이 흐트러질까 염려하심으로 주신 말씀이라고 이해하게 된다.
사람의 눈은 간사하여 외형적인 것에 마음을 쉽게 빼앗기게 되는데 이는 이방의 신전이나 신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형태들로써 하나님께서는 지기 백성들을 향하여 이런 외형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진심으로 하나님께 향한 내면적인 것에 관심이 있음을 알려 주신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이 말씀에 비추어보면 오늘 우리 시대의 교회당 건축이나 내부 장식들이 거의가 다 역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외형적인 치장에 너무 많은 비용을 드리고 치장함으로 실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내면적인 예배와 섬김에 어떤 결과를 얻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최근 한국 교회에서 가장 호화롭게 잘 지어졌다고 하는 서울 중심가의 한 교회당은 외형적 치장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그 설계와 구조가 프리메이슨들이 추구하는 호리스[태양신]의 전각을 연상케 하며 중앙에 있는 상징 탑이 호리스의 눈을 연상케 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고 하여 조심스런 비판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이것은 이 호화로운 건물을 상공에서 바라보았을 때 나타나는 결과를 가지고 제기된 비판들이다]

저주로 상징된 에발 산에 큰 돌들을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발라 율법의 말씀을 기록하라고 하심과 또 그곳에 철 연장을 사용하지 아니한 제단을 세워 그 위에 제사를 드리라고 하심은 이로써 저주를 떠나가게 하심의 상징으로 받아드리게 되는데 오히려 오늘 우리 시대의 교회는 오히려 외형적인 것에만 치중함으로 이 말씀에 역행하고 저주를 불러 드리고 있지는 않는지 조심스럽게 돌아보게 된다.
무릇 내가 예배하고 섬기는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위용적인 형상이나 건물로 만나지는 것이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나의 내면에서 만나지는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이다.

주님!
에발 산의 저주에서 돌이켜
그리심산의 축복으로 들어가게 하는
주님의 말씀에 토를 달지 아니하고
순전하게 받아드리고 순종할 수 있는
나와 우리 교회의 신앙과 삶이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