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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당/* 로마서 *

▼ 로마서 2:9-16 들은 율법을 행동하는 양심으로 나타내기

by 朴 海 東 2016. 9. 6.

들은 율법을 행동하는 양심으로 순종하기

로마서 2:9-16


묵상내용

언젠가 텃밭에서 땀 흘려 일하고 돌아오는 길에
아파트 놀이터에 있는 수돗가에서 씻으면서
내가 평소 아끼는 모자를 벤치에 벗어놓기만 하고
그냥 놓고 오게 되어 뒤늦게 생각이 나서 찾으러 갔는데
내가 놓아둔 자리에 모자가 보이지 않았다.

아주 멋진 모자였는데 잃어버린 것에 대해
너무 아쉬워서 혼자 투덜대기를
누가 양심도 없이 가져갔을까...원망하는 내 마음 속에
불현듯 "그러는 너는 어떤데.....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신명기에 나오는 율법의 한 조항이 생각났다

네 형제의 소나 양이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그것들을 끌어다가 네 형제에게 돌릴 것이요
네 형제가 네게서 멀거나 또는 네가 그를 알지 못하거든
그 짐승을 네 집으로 끌고 가서
네 형제가 찾기까지 네게 두었다가 그에게 돌려줄지니
나귀라도 그리하고 의복이라도 그리하고
형제가 잃어버린 어떤 것이든지 네가 얻거든
다 그리하고 못 본 체하지 말 것이라 [신22:1-4]


한 사람이 자기가 중히 여기는 물건을 잃었을 때
그 상심한 마음을 깊이 헤아려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게 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심으로
물건을 잃어버린 사람을 배려해 주시는
자비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내 마음에 닿아지면서
이것이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며
이방인들에게는 양심으로 주신 것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그동안 돈이나 카드가 들어있는
지갑이나 스마트 폰 같이 중요한 것들에 대해서는
가까운 파출소를 찾아가서 맡긴다거나
전화번호가 있는 경우 주인에게 전화해서라도
꼭 찾게 해주었는데 그냥 소소하게 생각되는 것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그냥 가졌던 것이 생각난다.

그러나 율법은 다른 사람의 분실물에 대해
그것이 소나 나귀 같은 값나는 것뿐만 아니라
의복으로 상징된바 소소하게 생각되는 것이라도
그것을 잃어버린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서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거나 혹은 가지기보다
적극적으로 찾아주는 행동을 해야 할 것을 요구한다.[신22:3]

그래서 얼마 전 우리 동네 아파트 벤치에 누군가 놓고 간
썬 그라스를 발견하고 혹 누군가가 그냥 가져갈까봐
그 자리에 메모를 적어놓고 나의 전화번호를 적은 후
스카치테이프로 붙여 놓았는데
일주일이 지나도록 찾는 사람이 없어 내가 그냥 소장하고 있다.

율법이란 무엇인가 ?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가져야 할 마땅한 도리로써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과 양심은 어떤 상관관계인가 ?
하나님께서는 이미 인간에게 양심이란 것을 주셨지만
인간이 타락함으로 이 양심의 기능이 많이 손상되어
어떤 사람들의 경우는 이 양심에 화인을 맞은 것처럼
양심이 무디어지고 거의 마비 상태가 되기도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세계 열방과 민족 가운데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자기 백성으로 삼았을 때
이 양심을 구체적이며 본질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하나님의 통치 법령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 율법을 주신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더불어 이 율법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는
모세 오경 속에서 특별히 신명기 말씀에서는
오늘 내가 주제로 삼은 것 같은 "분실물"에 대한
조항 하나만 해도 얼마나 상세하게 말씀하시는지
인간의 삶의 구석구석 깊은 곳까지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지극하신 배려하심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된다.

묵상적용

그런데 이 율법과 관련하여
오늘의 말씀에서 가장 눈여겨보게 되는 구절이 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이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2:13]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민이 된 특별한 표지로써
할례를 받는 것과 율법을 수여 받은 것과
그리고 정한 절기나 안식일 마다 회당이나 모임에 나가서
이 율법이 낭독되고 듣는 것을 대단한 특권으로 여겼는데

바울은 오늘의 말씀에서 율법을 주신 본래의 목적을 모르고
자신들의 특권의식으로 삼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마치 양날가진 검 같은 날카로움으로 양심을 찌르고 있다.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이 말씀은
오늘 한 걸음 더 나가서 오늘 이 시대에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백성 되고 예수의 제자 된 나에게도
동일한 책망으로 닿아지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내가 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나는 얼마나 들은 말씀에 대해
행동하는 양심으로 순종하는지 나 자신을 돌아볼 때
형식적인 신앙으로 화석화된 유대인들에게 향한 이 도전이
곧 나에게도 주시는 주님의 말씀으로 받아 드리게 된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
그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이 양심이 증거가 되어
모든 숨겨진 일들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 있음을 밝힘으로써 [2:16]

이 율법과 양심 앞에서 부끄러울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면할 수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선하심과 자비]가 나타난 복음이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 것인가(?)로
서서히 논리의 전개를 이끌어가고 있음을
오늘도 이어지는 전후 문맥을 통해 이해하게 된다.

주님!
내가 이미 배운 율법으로도
내가 이미 받은 양심으로도
나는 구원의 커트라인에서
멀리 떨어져 낙오되어 있는
한 가련한 죄인 인것을 고백합니다

주님 !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나의 나됨을 밝히 보여주는
이 율법과 양심 앞에서
겸손히 주님의 복음을 붙잡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