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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당/* 로마서 *

▼ 로마서 2:17-29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참 할례는 심령의 변화 이다.

by 朴 海 東 2016. 9. 7.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참 할례는 심령의 변화 이다.

로마서 2:17-29

묵상내용

어제 오늘 이어지는 말씀에서 바울은
자신들을 이방인과 다른 선민으로 자처하는
유대인들에 대해 그들의 오만과 외식주의에 대해
강도를 더한 맹공을 퍼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고
율법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선악간에 분별력이 있으며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라 하며
율법에 담긴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자처하면서

이 율법을 가지고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함으로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면서 도둑질하며
간음하지 말라 가르치면서 자신은 간음하며
우상은 가증히 여기면서도 (자신의 잇속을 위하여)
우상의 전각[신전]의 물건을 도둑질하는
이런 이중 인격적인 모순된 모습들에 대해
실랄한 책망을 쏟아 붓고 있는 것이다.[2:17-22]

여기서 바울은 이 편지의 수신인이 되는
로마교회의 성도들 중에 섞여있는
이방인/유대인 교인들 중에서 유대인 성도들을 향해서
맹공을 퍼붓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지난 1.2.3차 세계선교 여정 중에 가는 곳 마다
복음을 반대하는 유대인들 때문에 당했던
쓰라린 고통들을 상기하면서
당시 유대와 지중해 연안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보편적 유대인들의 생리에 대해
이러한 의분을 쏟아내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한 마디로 율법의 참 정신인 사랑은 어디로 가고
껍대기와 같은 율법의 문자적 조문에 매달려서
할례와 같은 표식으로만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착각하면서
하나님의 통치 법령인 율법은 지키지 않고
선생 노릇만 하려고 하는 이들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들 중에서 모독을 받고 있다고 개탄하고 있는 것이다.

그 누구보다 자신의 동족 유대인들을 사랑해서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저주를 받을찌라도
자신은 동족 유대인들이 구원 받기를 열망 한다는
바울 자신의 고백을 감안하면[롬9:3]
바울의 이러한 공격적인 책망들은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는 자신의 동족 유대인들의
한심한 한계를 느끼면서 쏟아내는 책망들로 이해하게 된다.

따라서 바울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며
표면적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성령에 의해 마음에 받는 심령의 변화로써
외식하는 겉모습에 따른 사람의 칭찬은 무용하며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칭찬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2:28-29]

묵상적용

오늘의 말씀을 정리하면서
진정한 할례는 성령에 의해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라는 것에
깊은 공감을 하게 되며
과연 이러한 변화가 나에게도 있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나는 어린 시절 처음 복음을 들었을 때
그 때는 지금처럼 다양한 전도지가 많지 않았던 시절인데
온갖 동물들을 죄악으로 상징화 시킨 “ 철수의 마음” 이라는
전도지를 통해 복음을 들었는데 그 때 내 마음에서 일어났던
그 뜨거운 변화와 결단은 지금까지도 잊혀 지지 않고 있다.

과연 이러한 심령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결코 사람의 언변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복음 속에 담겨 있는
성령님의 역사로 된 것임을 인정하게 된다.

이러한 심령의 변화[할례]를 받고 새사람이 되는 것은
시기적인 면에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것은 아니고
빠르고 늦음의 차이가 있지만 이 모든 것은
동일하신 성령님이 전도자들을 도구로 삼아
복음을 전할 때 나타나게 되는 결과 이다.

대학시절 나의 친구 *** 이는 너무 술을 좋아해서
술에 취해 길바닥에 나뒹굴고 얼굴을 갈고 살았는데
얼마 전 만나 보니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내가 그의 입에서 주님을 찾는 말을 들으며
그가 그렇게도 좋아하는 술까지 끊고
착실한 가장이 되어 자신의 가정을 잘 세워가는 것을 볼 때
정말 복음을 통하여 죄에 찌들어서 사는 인간을 부르시며
그들에게 참 마음의 할례로서 심령의 변화를 일으켜 주시며
주님을 위해 살아가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해 주심에 대해
감탄을 금하지 못하게 된다.

바울은 오만과 독선과 외식주의에 찌들어서 살아가는
자기 동족 유대인들 역시 자신들이 어떤 모습인가를
적나라하게 직시하고 복음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강도를 더한 맹공을 퍼붓고 있는
역설적인 사랑의 외침을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본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자랑하며 선민의 표지로 여겼던 할례가
신약에서는 세례로 완성되고 대체 되었다
천주교에서는 세례[영세]받는 것을 곧 구원받는 것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임종 직전에 위급한 상황에서는
평신도들에게까지 세례[영세] 베푸는 것을 허락할 정도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할례에 대한 과신에서 보는 것처럼
세례 받은 것으로써 모든 것을 대체할 수 있다고 한다면
오늘의 말씀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성령님이 개입하시고 역사하실 여지는 없어지는 것이다.

물로써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받은 세례를 통해
거듭난 신앙과 삶 속에서
말씀과 성령으로 다스림을 받게 되는
새 생명 - 새 사람 - 새 생활 - 새 목표 - 새 소망이
나의 삶 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을 마음 깊이 받아 드린다.

주님!
그 무엇으로도 변화되지 않는 인간의 마음은
오직 성령에 의한 심령의 변화만이
참 희망인 것을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참 할례를 베풀어 새사람을 만들어 주는
주님의 복음과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고 사모하면서
구령 사업에 더욱 힘쓰는 신앙과 삶이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