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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당/* 누가복음 *

▼ 누가복음 7:1-17 섭리적 만남의 은총

by 朴 海 東 2017. 2. 11.

섭리적 만남의 은총

누가복음 7:1-17

묵상내용

1. 말씀만 하사 낫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한 산에서
천국의 헌장이라 할 수 있는 산상수훈을 반포하시고
이제 갈릴리에서 가장 큰 도시인 가버나움에 들어가셨다.

그곳은 갈릴리 바다의 최북단에 해당되는 큰 도시로서
갈릴리 전 지역을 다스리는 중심도시 역할을 했고
도시의 안정과 질서를 유지시키는 로마 주둔군이 있었는데
이제 이 복음서의 저자 누가의 시선은
이름을 밝히지 않는 어떤 백부장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있다.

이 백부장이 얼마나 착하고 선한 사람인지에 대해서
누가는 여러가지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가 이방인으로서
유대 민족을 사랑하고 회당을 지어준 것 뿐 아니라

당시에 인권도 없이 상품 가치 정도로 밖에 여기지 않던
자기 집의 종을 사랑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그 종의 병듦을 인하여 장로와 벗들을 예수님께로 보내어
고침을 구한 이야기는 정말 휴먼 감동 스토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순수 인간애적인 휴머니스트의 모습보다
더욱 그에 대해 호감을 갖게 만드는 것은
예수님께 향한 그의 독특한 믿음에 있는 것 같다.

그는 종의 병을 고치기 위해 장로들을 예수님께 보냈는데
예수님의 발걸음이 자신의 집 쪽으로 가까이 다가오자
서둘러 벗들을 보내 예수님이 자신의 집에 들어오시는 것을
자신은 감당할 수 없다고 하며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라고 한다[7:7]

당시 통념상 유대인이 이방인이 집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방문자 자신을 더럽히고 부정을 타는 일이어서 그랬을까(?)
그는 자신이 예수님께 직접 나가지 않고
장로들과 벗들을 보낸 것과
이제도 예수님의 방문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예수님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을 감동시킨
그의 믿음이 더욱 크게 빛나는 것은
그가 예수님의 말의 권위를 믿고 존중하며 간구한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고
또 자기 수하에도 병사들이 있고 종들도 있어서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면
이것을 하라 하면 하는데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는
예수님의 말 한 마디에 복종치 못할 것이 없은즉
멀리서도 말씀 한 마디만이라도 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하시며
시공간을 초월하여 백부장의 종을 살려주신 것을 본다.

이 복음서의 저자 누가는 예수님에 대해 무엇을 보여주며
무엇을 말하고 싶어 이 사건을 선별적 기사로 택한 것일까(?)

복음의 은혜는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임할 수 있으며
예수님은 백부장의 신앙 고백처럼 말씀 한 마디로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실 수 있는 말의 권세를 가지신 분인 것을 드러내고
더불어 그의 입으로 나오는 말의 권세는 시 공간을 초월하여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이라는 것을 밝히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 사건 계시가 보여주는 여러 가지 교훈들 가운데서
가장 마음 깊이 닿아지는 것은
예수님을 감동시킨 백부장의 믿음으로서
내가 이스라엘 중에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는 칭찬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 백부장의 마음에
예수님을 바로 알아보고 놀라운 고백을 드리며
자신이 고백한대로 믿음대로
시공간을 초월하여 베푸시는
놀라운 주님의 은혜를 입으며 칭찬받은 이 백부장의 이야기는
오고 오는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너희도 이 같은 믿음으로 서라는 교훈으로 받아 드리게 된다.

주님!
이방인 백부장에게 임한 은혜가 나에게 임한 것처럼
더불어 그의 삶으로 고백된 아름다운 선행과
그의 입으로 고백된 주님을 감동시킨 믿음이
나의 신앙과 삶에서도 나타나게 하옵소서. - 아멘 -

묵상적용


2. 섭리 적 만남의 은총 (7:11-15)


예수님을 감동시킨 백부장의 믿음 이야기를 뒤로하고
이제 누가의 시선은 갈릴리 바다 남녘에 위치한
나인 이라는 성으로 옮겨지고 있다.
아마 예수님 일행은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북에서 남으로 횡단하여 이 도시로 향한 것 같다.

그런데 예수님 일행이 나인 성문으로 가까이 접근하고 있을 때
성 안에서 성 밖으로 나오는 한 장례 행렬을 만나게 되는데
이 복음서의 저자 누가는 매우 예리한 영적 감성의 필치로
이 섭리 적 만남을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누가는 나인 이라는 성문을 사이에 놓고
성 밖으로 나오는 죽음과 슬픔의 행렬을 묘사하는가 하면
성 안으로 들어가는 예수 생명의 행렬을 마주치게 하고 있다

왜 하필 그 때 그 시간에
이 생명과 죽음이 그 성문 앞에서 마주치게 되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연출하시는 섭리 적 만남이 아니라면
어찌 이것이 가능할 것인가
마치 아기 예수를 예루살렘 성전으로 데려 갔을 때
아기 예수와 시므온의 만남처럼
아기 예수와 안나의 만남처럼
생명의 주 예수와 독자를 잃고 슬픔과 비탄에 빠진
한 과부를 마주치게 하심으로
이 세상에 모든 슬픔과 고통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주 예수를 보라! 고 하시는 것 같다.

어찌 생명이 죽음을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
이 만남을 연출하여 예수의 발걸음을
이곳으로 이끄신 이가 하나님이신데
어찌 그냥 두 행렬이 비켜갈 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여기서 장례 행렬의 관을 멈추게 하시고
죽은 자를 담은 관에 손을 대시며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셨을 때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않고 말도 하였으며
비탄에 빠진 독자의 어머니 과부를 소생시킨 것을 본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주가 되신다는 이 중요한 사건계시를
차제에 두고서라도 이 말씀에서
더 깊은 묵상으로 들어가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께서 연출하시는 섭리 적 만남의 은총이다

20**년 추운 겨울 성탄절을 몇일 앞둔 어느 날
나는 내가 사역하는 선교지 C 국의 최북단 Jiain에서
기차와 버스와 배와 버스를 번갈아 갈아타가면서
2박 3일에 걸쳐 나의 신학교 친구 동창 목사가
목사로 시무하는 산동 성 칭다오 한인교회로 향하고 있었다.

이 멀고먼 여정을 떠난 것은 선교지 교회 동역자의 아들이
뇨독증으로 눈을 실명하여 온 교회가 나서서
수술비를 모금했지만 턱 없이 부족하여
수술비 마련을 위해 이렇게 나선 것이었다.

어느덧 하루해가 저물어 석양 무렵에야
이 교회에 당도하였는데 당회에 지원 요청을 하기 위해
사무실에 들어가서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는데
때 마침 친구 목사가 들어오기에 정말 마음이 기뻤다

당시 이 교회는 그 지역에서 가장 큰 교회로서
담임목사 사역이 너무 바쁘기 때문에
그를 만나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처럼 힘들었는데
그는 자신의 발로 사무실을 찾아와 나를 만났으니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하게 되었고
눈 먼 소년의 눈을 수술하는 기회를 가졌으며
그 소년의 어머니를 소생시키는 기회가 될 수 있었다.

예수님과 나인 성 과부의 만남을 생각해 보면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의 발걸음을
그곳 나인 성으로 향하게 하여 가능하게 되었던 것처럼
나의 친구 *** 목사가 바쁜 중에도 나를 찾아온 것은
주님께서 이끄신 섭리 적 만남 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때로 나인 성 과부의 처지처럼
도무지 감당 못할 일들이 생기기도 하는데
이럴 때도 주님은 결코 우리의 사정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어떤 섭리적 만남을 통해 찾아 오신다는 것을
이 아침 다시 한 번 새로운 은혜로 마음 깊이 새기게 된다.

주님
나인 성으로 향하신 주님의 발걸음은
우연한 것이 아니었고
하늘 아버지의 이끄심 이었던 것을 보면서
나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누군가에게 주님이 찾아가는 발걸음이게 하시고
또 누군가가 주님의 은혜를 가지고
나에게 찾아오는 주님의 발걸음이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