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구약성서당/민수기

▼ 민수기 21:1-9 원망해서 좋을 것 하나도 없다

by 朴 海 東 2017. 6. 29.

원망해서 좋을 것 하나도 없다

민수기 21:1-9

묵상내용

1. 이전의 실패를 거울로 삼아 [21:1-3]

이스라엘은 아론의 죽음을 애도하며 호르산에서 30일간
애곡하고 에돔을 우회하는 길을 따라 다시 길을 떠났는데
가나안 원주민 아랏 사람들과 첫 번째 접전을 하게 된다

아랏은 헤브론 남부에서 네겝으로 이어지는 곳에 있는데
38년 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허락없이 그들과 싸웠다가
참패를 당한 쓰디쓴 경험이 있었다[14:39-45]

그래서 그랬는지 아랏 왕은 이번에도 군사들을 보내
길을 막고 이스라엘 중 몇 명을 체포하게 되는데
이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서원기도를 드리게 되고
허락하심을 받아 아랏의 성읍들을 쳐서 멸하게 된다.

이전에 쓰디쓴 실패를 경험했던 호르마에서 그들은 승리했고
패전의 상처를 씻었으며 가나안 족속과의 첫번째 전투에서
장차 펼쳐질 전면전에 대한 자신감을 얻게 된다.

하나님은 나의 신앙 여정에서 내가 맛본 쓰디쓴 실패들을
다 아시는 분이시며 내가 이전의 실패를 거울로 삼아
그를 의지하고 나아갈 때 반드시 지난날의 실패와 상처를
회복시켜 주시며 반드시 승리를 주시는 분이신 것을 배운다.

나의 신앙 여정 가운데 마귀의 유혹과 시험에서 넘어졌던
지난 날 쓰디쓴 경험의 기억들을 그대로 남기지 말고
다시 시험에 접전하게 될 때에
지난날을 거울로 삼아 주님을 의지하며
반드시 반전시켜 승리할 것을 이 아침 마음 깊이 다짐한다.

기도하기

2. 원망해서 좋을 것 하나도 없다[21:4-6]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나안 원주민과의 첫 번째 전투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이 다시 목적지를 향해 올라가면서
에돔을 돌아가는 길이 멀고 험한 것 때문에 다시 원망하면서
방금 전에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하게 되었던 기쁨도 잠시
다시 원망의 죄에 빠지게 되는데
그 원망의 정도가 너무 지나쳐서 하나님이 듣기에
심히 불쾌하시고 그들을 내치실만한 원망이 된 것을 본다.

그들은 힘들고 어려울 때 마다 여전히 애굽을 동경하면서
가나안을 향해 가는 목적의식을 상실한 채 현실에 급급하며
하나님이 자신들을 광야에서 다 죽게 하신다고 악담하고
무엇보다 은혜로 내려주시는 만나에 대해서도 폄하하며
하찮은 음식이라고 악평 하였으니 불경도 이런 불경은 없다.

가나안 전쟁의 첫 번 째 전투에서의 승리 뒤에 찾아온 시험으로써
길이 험하다는 것 때문에 원망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은 광야 사막 이 곳 저곳에 산재해 있는 불 뱀들이 나와서
자기 백성들을 물게 하심으로 그들이 그간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보호 가운데 살았는지 일깨우시며
원망해서 좋을 것 하나도 없다는 것을 다시 배우게 하신다.

그러고 보면 실제로 지나간 40년 광야 생활을 회고해볼 때
원망이 있는 곳에 항상 불행한 일들이 발생했는데
물이 없는 것 때문에 원망했을 때 물은 마시게 하셨어도
아말렉이 출몰하여 그들을 괴롭혔고 [출17장]
고기가 먹고 싶다고 원망했을 때
고기는 진저리나도록 먹게 하셨어도
불이 나와서 진영의 한 끝을 살랐으며[민11:1-3. 31-35]
광야 여정의 막판에는 아직도 연단되지 못한 그들의 입에서
원망이 쏟아져 나왔을 때 불 뱀을 보내서라도 그들을
징계하시고 깨우치시며 바로 세우시는 것을 본다.[민21:4-9]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원망 뒤에 마주친
아말렉/불사름/불 뱀 같은 것들은 오늘 내가 속한 교회공동체와
나의 신앙과 삶 속에서 얼마든지 재현될 수 있는 것들로서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원망해서 하나 좋을 것 없다는 것을
거듭 거듭 가르쳐 주시고 교훈해 주시는 것으로 받아 드린다.

더불어 가나안 원주민 아랏 족과의 첫 번째 전투와 승리 뒤에
다시 길이 험하다는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여 원망하며
불뱀을 만난 것은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승리한 뒤에도
영적 긴장을 늦추지 말고 더욱 조심하여 나가야 할 것을 배운다.

이스라엘이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광야 사막 길에서
쌀 한 톨 얻을 수 없으며 처처에 전갈과 불 뱀들이 득실거리는
위험한 사막 지대에서 지난 38년을 지내온 것은 정말
기적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이스라엘이 거쳐 간 시나이 반도의 사막에는
지금까지 발견된 오아시스만도 450개도 넘는다고 하는데
결국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으로 앞서 가시며
그들을 인도하신 것은
첫 번 째 오아시스 였던 엘림에서 부터 시작하여[출15:27]
오아시스에서 또 다른 오아시스로 인도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200만 백성과 또 그에 딸린 수많은 가축 떼들이
그 무서운 사막에서 생존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보호와 배려였는데
이스라엘은 광야 여정 막판에 잠시 에돔을 우회하는 길로 가며
험악한 지형을 경험하게 되자 이렇게 본색을 다시 드러낸 것이다

오늘 나의 신앙의 현주소는 어디에 있는가(?)
광야 사막 같은 이 세상길을 걸어가면서
언제나 오아시스만 만나는 것은 아니지만
내 가는 길이 아무리 험악하다 하여도
주님이 나와 동행하여 주신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뿜어낼 수 있는 모든 원망을 내려놓고
오직 믿음으로만 드릴 수 있는
늘 감사와 찬양으로 살아야 할 것을 마음 깊이 새긴다.

묵상적용

3. 장대 위에 매달린 놋 뱀의 교훈 [21:7-9]

이스라엘이 원망의 쏟아내는 곳에
그동안 하나님께서 은혜로 보호해 주셨던
은혜의 그물망을 거두시자 사막 곳곳에서
불 뱀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이는 실로 무섭고 두려운 일이 되었다

백성들의 간청과 모세의 중보기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불 뱀의 형상을 만들어 장대에 달라 하셨고
모세는 불 뱀의 색깔인 구리[놋]으로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아서 이 것을 쳐다보는 자마다
사망의 독을 면하고 살 길을 열어 놓았다.

본래 죄의 사유는 동물의 제사나
붉은 암송아지의 재로 만든 잿물을 뿌려서 하도록 하셨는데
여기서 또 다른 속제의 방법이 제시되고 있는 바
아마 불 뱀에 물린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 많고
지금 독이 퍼져 죽어가므로 황급한 시간을 다투는 상황이므로
장대에 매달린 놋 뱀을 바라보는 시청각적 접촉을 통해
죄를 사함 받고 독에서 풀려나는 해독의 은총을 베푸신 것 같다.

훗날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공생애 사역 초기에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성전청결 사건이 있었던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사람의 구원/중생/거듭남에 대하여 말씀하시며
바로 모세가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았던 놋 뱀의 사건을
자신에게 적용시키시면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4-15]고 하셨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을
불 뱀을 형상화 시킨 놋 뱀으로 지칭하신 셈인데
이는 인간의 첫 번째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보다 뱀을 선택한 결과로 뱀에게 속하게 되고
뱀의 독[죄악]으로 죽어가게 되는 처참한 인간을 대신하시여
대신 죽으시는 것으로 말씀하신 것이며[대리적 대속적 죽으심]

뱀에 물려 독이 퍼져 죽어가는 사람들이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멀리 바라만 보는
시청각적 접촉만으로도 믿음으로 바라보기만 한다면
그 치명적인 독에서 해독이 되고 살 수 있다는 것을
이 사건을 통하여 상징하시고 예표하신 것을 배우게 된다.

세상에 뱀의 독보다 더 무서운 것은 죄의 독으로써
인간은 그 무엇으로 이 독으로부터 해독을 얻을 수 있겠는가(?)
일찍이 저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였을 때
인간을 범죄 가운데 빠트린 뱀에 대하여 저주하신 말씀 가운데
장차 여자의 후손이 와서 뱀의 머리를 깨트리리라 하신대로[창3:15]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장대에 달린 놋 뱀처럼 나무 십자가에 달리셔서
뱀에 물린 우리[나]의 죽음을 대신 죽으시면서
죄의 맹독성을 가진 뱀[마귀]의 머리를 깨트리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여자의 후손이 되시어서
오늘도 그를 믿고 바라보는 모든 이들을
죄의 독에서 해독시키시고 살려주시는 생명의 구주가 되신다.

------[말씀에 응답하는 기도]------

니고데모와의 대화 가운데
모세가 만든 놋 뱀을
자신에게 적용시키신 주님 !

옳습니다.
주님은 내가 죄의 맹독으로 죽을 자리에서
내 대신 생명을 내어 주신
내 생명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나에게 생명을 주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힘입어

아직도 이 장대 위의 놋 뱀이 되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무수한 사람들에게

이 생명의 복음을 힘써 전하는
신앙과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