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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당/이사야

▼ 이사야 37:21-38 기도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by 朴 海 東 2017. 10. 22.

이사야 37:21-38  기도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묵상내용

1. 기도 전쟁/공방 [공격과 방어]에서 승리하기

앗수르의 침공으로 풍전등화와 같이 된 유다 왕국이
벼랑 끝 전술로 나간 것은 백성을 대표하는 히스기야의 기도였다
그런데 성경에 나타난 수많은 기도들 가운데
유독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히스기야의 기도를 보면

이렇게 길고 긴 기도의 과정과 내용들이 전개되는 이유가
기도하는 자와 기도해 보아야 필요 없다고 하는 자 사이에
치열한 공방이 오고 가며
그 사이에 이것을 중재하는 양편의 사람들이 있음을 보게 된다.

이 기도의 공방에서 마귀와 그의 하수인으로 상징된
산헤립과 랍사게는 유다 왕 히스기야가 항복하게 하려고
기도해 보아도 필요 없으니 속히 항복하라고 하는
온갖 부정적인 언사로 그의 기도를 포기하게 하는가 하면

그 반대 진영에 있는 히스기야 편에서는
엘리아김과 셉나와 장로들을 이사야에게 보내
긴급한 기도 지원을 요청하는 것을 보게 된다.[37:1-5]

이 사람들은 긴급한 기도의 지원을 요청하는 것 뿐 아니라
기도 요청의 응답까지도 전달하게 되는데 [37:6-7]

그러나 히스기야의 기도를 꺾으려는 사단의 음모는
산헤립의 지시를 받는 랍사게를 통해
기도를 포기하게 만드는 더 강력한 공격을 받는다[37:9-13]

그러나 히스기야가 기도의 사람이라고 불릴만한 이유는
그는 기도를 포기하게 만드는 원수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심지어는 원수에게서 받은 서찰[편지]까지도
하나님 앞에 펼쳐놓고 전심 기도로 승부를 건데 있다[37:15-20]

오늘의 말씀은 이사야가 보낸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알려 오신 기도의 응답이 다시 한 번 전달되는데
앞에서는 말로 전달된 하나님의 응답 이었다면[37:6]
이번에는 글로 된 응답이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37:21-34]

이렇게 기도로 문제를 해결해보려는 자와
그 기도를 저지하려는 자의 치열한 공방의 최종 결론으로써
이사야의 글이 전달된 그 밤
하나님께서 한 천사를 앗수르 진영으로 보내
십팔만 오천 인을 쳐서 죽이신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게 되는 그 전날 밤
애굽의 모든 장자들을 쳐서 죽인 사건을 연상하게 한다.

하나님을 의지해도 쓸데없다고 하는 원수의 방해를 물리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전심 기도로 나아간
히스기야와 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의 응답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교만한 앗수르 왕 산헤립을 마치 갈고리로 코를 꿰고
입에 재갈이 물려서 잡아가는 것처럼 돌아가게 만든 것인데 후에는
더욱 치욕스런 종말로써 그 자식들의 손에 죽게 된 것이었다[3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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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기야의 기도를 보면서 기도의는하나의 전쟁이며
치열한 공방 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히스기야가 원수들로부터 기도해 보아도 소용없다는
압력을 받은 것처럼 오늘 나의 주변에는
현실의 문제가 너무 크게 보여서
기도해 보아도 소용없다고 여겨지는
낙심과 절망케 할 일들이 너무나 많은 것을 본다.

요즘 나는 내 책상 앞에 우리들 교회 김양재 목사가 쓴
“100%” 응답받는 기도“라는 책을 놓고 틈틈이 보는데
여러 내용들 가운데 특별히 마음에 남은 것은
진정한 기도 응답 이라는 것은 문제 해결 그 자체보다
이 사건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와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깨닫기를 기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깊이 공감하였다.
이렇게 주님의 뜻을 묻는 씨름 기도를 할 수 있다면
기도를 포기하게 만드는 어떤 심리적 방해 앞에서도
진심 기도로 나아갈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묵상적용

2. 하나님의 기도 응답은 어떻게 오는 가 (?)

기도의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는 히스기야의 기도와
그 기도의 응답을 보면서 한 가지 의문을 갖는 것은
왜 전심 기도에 돌입한 히스기야에게
그 기도의 응답이 기도하는 그에게 바로 오지 않고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간접 전달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히스기야의 기도가 부족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의 영성이 이사야에게 미치지 못하기 때문인가
무슨 이유로 이렇게 한 단계를 걸쳐서 오게 되는 것일까
이 의문을 곰곰 생각해 보면서
당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세우신
왕/제사장/선지라라는 삼중 직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데

왕은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매개하는 자였고
제자장은 백성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나가는 자였으며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자로서
분명한 삼중직의 구분이 있었다는 점에서 이해하게 된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이 삼중직의 의미가 그 한 몸에서 완성되고
그 은혜와 축복을 계승받아
왕 같은 제사장들이 되었고 [벧후2:9]
하나님의 예언/말씀을 말하는 선지자가 된 [고전14:31]
신약의 성도들에게 이 기도의 응답은
어떻게 오는 것인가 의문을 가지게 되는데
우리 주님이 세상에 계셨을 때 가르쳐주신 것처럼
이제는 제 삼자를 거치지 않고 주의 이름을 힘입어
기도하고 응답받을 수 있음을 재심 확인하게 된다.[요14:13. 15:7.]

아직도 구약에 존재했던 제사장이나 선지자를 의지하는 개념으로
신앙생활 하는 성도들은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또 그를 통해 기도 응답을 받아내는 것처럼 구약적 배경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꼭 목사님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기도부탁하고
또 그렇게 기도 응답을 기대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제는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담대히 은혜의 보좌 앞에
기도로 나아가야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된다.

히스기야가 간접 응답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자신이 기도하면서도 이사야의 기도에 의지했고
또 그로부터 나오는 응답을 기대했기 때문에
하나남께서는 그의 믿음의 분량대로
그렇게 해주신 것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오늘 내가 기도의 자리에 나아갈 때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나가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중요한 교훈으로 마음 깊이 받아 드린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을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1서5:14-15]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