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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당/* 고린도전서 *

▼ 고린도전서 14:13-25 방언과 통역과 예언의 상호관계

by 朴 海 東 2018. 2. 4.

방언과 통역과 예언의 상호관계

고린도전서 14:13-25

묵상내용

영하 13도로 시작하는 추운 주일 아침 입니다
아직 봄은 저 만치 멀어 있는 것 같은데
그래도 오늘은 절기상 입춘이고
봄이 시작한다는 날로 立春大吉을 떠올리게 합니다.

주일 아침 일찍 일어나 묵상의 자리에 앉았지만
왠지 모르게 묵상의 깊이에 들어가지 못하는 나른함 때문에
밖의 차가운 공기를 헤치고 기도 동산에 올랐다 돌아왔습니다.

주님!
오늘 이 아침도
기록된 말씀을 조명해 주시는
성령의 인도를 받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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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보여주는 방언에는 두 가지 방언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사건에서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지려는 인간의 도모를 파하고자
언어를 혼잡케 하심으로 생겨난 방언으로써
이는 하나님의 징벌이요 저주의 결과 입니다

그런데 이 징벌과 저주가 풀려지는 상징적 사건으로써
오순절 성령 강림의 날에 예루살렘 다락방에
예수 이름으로 모여 기도하는 사람들이
당시 16개국 이상의 (지역) 방언을 말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큰일(예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말하여
예루살렘에 절기를 지키러 올라온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당시 천하 각국에서 모여든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이 때 성령의 역사로 나타난 방언은 오늘의 말씀
고린도전서 14장에 나타난 방언과 다른 방언인 것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보낸 편지에 나타난
성령의 은사로써 방언은 지역 방언이라기보다
영으로 하는 기도요 찬송이며 영의 언어임으로
아무나 알아들을 수 없고 통역이 필요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14:1-17]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의 언어로써) 방언을
교회 모임에서 남발하며 방언을 말하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영적 우월감을 가짐으로 이 방언의 은사가 교회에 유익을 주기보다
해악을 끼치고 성도 간 위화감을 조성하게 된 것도 엿보게 합니다.

우리 한국교회도 한 때는 어떤 교단을 중심으로 방언이 강조되어
방언을 구원의 표시로 간주하며 방언 받지 못한 사람은
구원도 받지 못한 것처럼 오도하여 큰 혼란을 주었고
그래서 어떤 기도원 집회 같은 곳에서는
성령께서 자기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방언을
마치 사람이 가르쳐서 할 수 있게 하는 것처럼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점에 대해 바울은 단호한 어조로 말합니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14:20]


하나님의 교회의 건덕과 질서를 위하여
영적 어린 아이들처럼 되지 말고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지혜로운 자들이 되라고 권면하는 바울은
이제 성령의 감동 가운데 방언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의 비교하며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으로 일만 마디 말하는 것보다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하는 것이 낫다고 말함으로
공적 모임에서는 개인 방언을 금하는 것이 좋다는 것과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예언을 말해야 함을 강조합니다.[14:24-25]

묵상적용

오늘의 묵상을 정리하면서 방언의 부작용을 유발하지 않고
오히려 교회의 유익을 끼치기 위해서는
방언보다 예언을 하려고 하라는 말씀과 또 방언을 말하려면
방언 통역함을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14:13]

그런데 여기서 방언이 영적 언어임을 감안할 때
방언의 통역이 가능하려면 영적인 언어를 알아들을만한
영적 수준과 깊이에 들어가야 하는데
이 또한 성령의 은사임으로 내가 원한다고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성령께서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주신다는 것을 받아 드리게 됩니다.

그런데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비해
방언 통역하는 사람은 희귀한 것을 보면
방언의 은사가 잘못 사용될 때 나타나는 해악보다
방언 통역의 은사가 잘못 사용될 때 나타나는 해악은
더욱 크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대체로 어려운 외국어를 통역하는 사람들이 남과 비교하여
자신이 우월의식에 빠지기 쉬운 거처럼 방언 통역 역시
이 은사를 활용하는 사람들이 경계해야할 것이 있는데
방언 통역을 말하는 사람은 방언을 말하는 사람보다 더
자신을 높은 자리에 세울 수 있는 교만에 빠질 우려가 있고
또 방언을 알아듣게 하시는 성령님께 대하여 민감하게
깨어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는
자기 생각이 통변 속에 섞여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방언과 방언 통변 그리고 예언에 대해 가르쳐 주신 오늘의 말씀이
모두 교회의 유익과 덕을 끼치는 것이 되게 하라는 말씀으로
귀결되는 것을 보면서 진실로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며
겸손함으로 은사 활용을 사모하는 자들에게
이러한 은사들을 내려 주실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주님!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교회의 유익과 덕을 위하여
그리고 연약한 성도들을 위로하고 돕기 위하여
이 시대 우리들의 교회가 방언 통역과
예언 같은 은사들도 잘 활용될 수 있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