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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당/역대하

▼ 역대하 24:1-14 홀로서기 신앙의 중요성

by 朴 海 東 2018. 12. 3.

홀로서기 신앙의 중요성

역대하 24:1-14

묵상내용

1. 홀로서기 신앙의 중요성

역대기 저자는 유다의 여덟 번째 왕 요아스 시대를 기록하면서
그가 아달랴 여왕의 폭정 시기에 자신을 6년 간 숨겨 키워주고
일곱 살 되던 해에 자신을 왕위에 올려준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다는 기록을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다.[24:2.14]

다른 말로 하면 자기의 후견인이 되었던
제사장 여호야다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신앙이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여호야다가 죽고 나자
그는 사악한 유다 방백들에게 휩쓸리면서 우상숭배자로 변질되며
주의 신이 임하여 책망하는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죽이는데
자기의 목숨을 살려주고 왕위에 까지 올려준 여호야다의 은혜를
이렇게 배반하는데 까지 나가는 왕으로 기록되고 있다. [24:27-28]

한 마디로 요아스의 신앙은 여호와를 바라본 신앙이 아니라
그의 후견인 요호아아스를 바라보고 의존한 신앙이어서
자신이 눈치 보며 의존했던 후견인이 자기 눈앞에서 사라지자
하나님께 향한 신앙도 함께 사라진 왕이 되었음을 암시한다.

그런데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처럼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지한
요아스의 신앙이 이렇게 잘못된 데에는 그의 후견인 이었던
여호야다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었던 것을 엿보게 되는데
이는 요아스를 홀로서기 신앙으로 바로 세우지 못하고
끝없이 자기의 영향권 아래 두려했던 여호야다에 대하여
요아스가 어느덧 나이가 들었을 때 성전 세 징수와 관련하여
왕의 권위로 여호야다에게 화를 내는 장면에서 포착이 된다.

왕이 대제사장 여호야다를 불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레위 사람들을 시켜서
여호와의 종 모세와 이스라엘의 회중이 성막을 위하여
정한 세를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거두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니[24:6]


아마 요아스는 어린 시절부터 사사건건 자신을 간섭한
제사장 여호야다에 대해 철들고 나이가 들자 피곤 증을 느끼며
왕으로서 반발 심리가 이렇게 나타난 것은 아니었을까 추론해 보게 된다.

하나님 앞에 홀로서기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무릇 자녀의 신앙교육이란 것은
품안에 품어지는 시기까지 이며 그 이후는 가능한 간섭하지 말고
제 스스로 홀로서기 신앙으로 유도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갈대 상자에 담겨 나일 강에 버려진 모세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의 어머니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다시 유모로 만나게 되는 모세를
단지 젖을 먹이는 기간 까지만 양육하였어도[출9-10]
여호와의 신앙에 굳게 선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것을 보면 그러하고

예수님의 경우도 모친 마리아에게 신앙을 양육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 나이 12세가 되어 첫 유대의 절기를 맞아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부모와 별개로 홀로서기 신앙에 선 것을 보여주는 장면을 보면 그렇다.

이런 점에서 우리들의 가정에서나 교회에서 차세대 신앙을 위해
역점을 두어야 하는 최고의 기회는 어린이 주일학교에 출석하게 되는
아동의 시기까지 라는 점에 공감하게 된다.

멋지게 자란 나무는 나무가 아직 어린 시기에 그 꼴을 잡아주는 것처럼
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나타낼 수 있는 신앙인격의 꼴은
이미 어린 아동의 시기에 기초가 잡아진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주님!
오늘 우리 가정과 교회에서
차세대 신앙과 부흥을 위해
어린이 신앙교육에 힘쓰는 것과
홀로서기 신앙에 세우는 것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묵상적용

2. 요아스의 성전 세 징수와 성전 수리에서 느끼는 점

일곱 살에 왕위에 오른 요아스가 자신의 후견인이 된 여호야다의 주선으로
두 아내에게 장가들고 자녀들까지 낳은 성인의 시점에 이르렀을 때
그가 성전을 보수할 뜻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점이다.

악녀 아달랴의 통치 기간 중에
아달랴의 바알 숭배를 추종하는 사람들[아들들]이 여호와의 전을 파괴하고
성전의 기물들을 바알을 위해 사용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24:7]
성전 재건과 보수가 너무 늦었다는 것도 엿보게 된다.

요아스는 이 뜻을 이루기 위해 제사장들과 례위인들을 소집하여
유다 모든 성읍에서 돈을 거두어 이 일을 빨리 추진하라고 했는데
그들이 크게 호응하지 않은 것을 보면 왕의 명령보다
왕의 후견인인 여호야다의 눈치를 더 본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데 오늘의 말씀에서 특별한 관심이 가는 구절은
레위인들에게 마을들을 다니며 돈을 거두라고 했던 요아스 왕이
그 방법을 바꾸어서 성전 문 입구에 헌금 궤를 두어
모세의 명한 성전 세를 그곳에 넣게 하고 그 모아진 돈으로
성전을 보수하게 한 것인데 이 전략은 성공을 거둔 것으로 기록된다.

그런데 이처럼 성전 문에 한 궤를 놓아 성전 세를 거두게 한 이 방법은
예수님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다시 변질되어
성전 세 징수 자들이 주님의 제자 베드로에게 성전 세를 독촉하게 되자
주님은 베드로에게 바다에 낚시를 던져 고기의 뱃속에서 나온 금화로
성전세 반 세겔을 내게 하신다. (마 17장24절-27절)

성전 세와 관련된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 징수의 방법이
성전 문 입구에 헌금 궤를 놓아서 시작하게 되었다는 이 말씀은
오늘 우리 시대에 교회가 거두는 헌금이
바구니를 돌리는 것보다 예배당 입구에 헌금 궤를 놓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도 배우게 한다.

그러나 성전 보수와 관련된 요아스 왕의 성전 세 징수와 관련된
오늘의 말씀에서 가장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그가 성전 세를 거두어 성전의 껍데기 외모를 보수하는
하드웨어적인 것에는 주력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소프트 웨어로써 이스라엘의 여호와 신앙 회복에는
힘쓰지 않은 결과 그의 후견인 이었던 여호야다가 세상을 떠난 후
그 자신도 그의 백성들의 신앙도 다시 변질되는 것을 보면서
오늘 우리들의 교회가 진실로 힘쓰고 주력해야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다시 한 번 마음 깊이 새기게 된다.

주님!
성전 재건보다 보수보다
더 중요한
내면의 성전을
잘 재건하고 보수하는
신앙과 삶이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