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구약성서당/역대하

▼ 역대하 29:29-36 레위인들의 성결하게 함이 제사장들보다 성심이었더라

by 朴 海 東 2018. 12. 17.

레위인들의 성결하게 함이 제사장들보다 성심이었더라

역대하 29:29-36

묵상내용

[오늘의 말씀 요약]
악한 왕 아하스 시대에 16년 동안이나 문을 닫고 방치했던 성전 문을
마치 16년의 세월을 16일로 압축한듯 16일 동안의 청결작업을 마치고
성전과 백성을 정결케하는 제사를 마친 후에[29:17]
히스기야와 제사에 에 참여한 자들이 다 엎드려 경배하며
레위인들은 다윗과 선견자 아삽의 시로 찬양하며 경배한다.

이어서 왕의 명령대로 백성들이 감사제물과 번제물을 가져오게 했는데
그 수가 많아서 제사장들이 감당할 수 없음으로 레위인들이 돕게 되고
이 모든 일들이 갑자기 되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왕과 백성들이 모두 기뻐함으로 다시 성전 회복의 제의를 마치게 된다.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묵상의 화두로 생각하게 되는 것은
1. 선[先] 정결과 후[後] 예물 이며 [29:31]
2. 제사장들의 성결을 능가한 레위인들의 성결이다.[29:34]

하나님은 사람에게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어서[갈6:7]
사람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는 꽉 막혀 잇으면서
아무리 많은 제물을 가져온다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다윗은 일찍이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잘 알았다
그래서 자신이 천천만만의 수양의 제물과 기름을 가져오는 것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의 제사라고 했는데[시51:16]

하나님께서 이처럼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치 않으시고
그들의 속죄 제사[번제/ 속죄제]를 받으시며 이렇게 하여
정결케 된 자들의 화목제[감사제]를 받으실 것이기 때문이었다[시51:17]

따라서 지금 히스기야는 모세의 율법이 명한 제의의 순서를 따라서
그리고 다윗이 말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서
이러한 제의의 순서를 따른 속죄의 제의를 통과한 백성들에게
이번에는 마땅히 제물과 감사의 제물을 가져오라 한다[29:32]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백성들이 가져오는 소나 양의 수효가
산더미처럼 쌓이는데 이 제물의 숨통을 따고 피를 받아내며
가죽을 벗겨내고 각을 떠서 제단에 올리는 일손이 딸린 것이다

레위기 법전에 따르면 백성이 범죄 하여 자신의 죄를 속하기 위해
가져오는 제물들은 자신이 직접 죽이고 껍질을 벗기며 각을 뜨지만[레1:6]
이처럼 속죄의 제사가 아닌 감사제와 특별한 날에 드리는 제물들은
제사장이 직접 나서는 것이기 때문에 제사의 제동이 걸리고 만 것이다.

아마 선대 왕 이었던 아하스 시대에 대제사장 이었던 우리야를 비롯하여
많은 제사장들이 아하스의 우상숭배에 관련되었기 때문에[왕하 16:10]
이들은 새 정권이 들어선 후에도 히스기야의 개혁에 동참하지 않고
도리어 부정한 방관자의 자세가 되었던 것으로 추론하게 되는데
이처럼 수효가 부족한 제사장들이 일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도록
나선 이들이 레위인들 이었다는 것을 특별히 밝히고 있다.[29:34]

이는 레위인들의 성결하게 함이
제사장들보다 성심이 있었음이라[29:34b]


따라서 오늘의 묵상은 자연히 히스기야 시대의 레위인들 에게 향하는데
이들이야 말로 자신들이 제사장과 같은 중요한 자리에 있지 않으면서도
히스기야의 개혁과 성전 청결 작업과 성전 봉헌과 성전 제사의 회복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람들이 되기 때문이다.

아마 당시의 제사장들은 선대 왕 아하스 시대에 자연히 왕권과 왕궁에
가까운 위치에 있다 보니 이처럼 쉽게 권력에 야합하고 동조하였지만
제사장들의 변두리에 머물며 보조원 역할에 지나지 않은 레위인들 이었기에
그들은 왕권에 부름 받을 일도 없었고 왕의 잘못된 정책에 연류 되지도 않아
자신들의 정결을 지킬 수 가 있었고
따라서 히스기야가 필요로 한 개혁 정치와 성전 정결과 성전 제사의 회복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는 것을 엿보게 된다.

묵상적용

오늘의 묵상을 내리면서 이 시대의 레위인들은 누구이며
이 시대의 레위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구약의 모세 율법에서 레위인들이 살아가는 사회적 수준은
객과 고아와 과부들과 같은 수준에 속하여서
경제적 도움이 필요한 사회적 약자들을 호칭할 때에
항상 객과 고아와 과부와 레위인은 함께 따라다니는 호칭이 되었다.

따라서 레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뿐 아니라
삶의 질과 수준에서도 정상인들의 수준 이하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는데
같은 레위의 자손들이면서도 아론의 자손들은 제사장의 수준에서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안정을 보장 받았지만 레위인들은 그러지 못하였다

이들에겐 먹고 살아갈 다른 직업도 용납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시기 때문에
비록 성전 제사의 보조원 역할에 지나지 않았지만
제사장들과 동일한 거룩을 요구 받는 삶을 살아야했고
하나님이 나의 기업이라는 이 한 가지 믿음으로
궁핍과 가난 속에서도 자신을 지키고 살아가는 것이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최근 C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부의 교회 탄압으로
일시적이나마 선교지 사역에서 돌아와 있는 나에게
레위인을 묵상해보게 하는 오늘의 말씀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말씀으로 마음 깊이 닿아진다.

다시 한국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나는 무엇을 하여야 하나(?)
마음이 무거워진 나에게 주님은 말씀하신다.

종은 자신의 일을 자신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정하여 주시는 것이니 자리를 지키라고 하시며
(천국일꾼으로서)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리라[마6:33]
고 하신다.

그리고 오늘의 말씀을 통해 주님은 다시 말씀하신다.
거룩을 생명으로 알고 살았던 레위 사람들처럼 되라

제사장들보다 자신을 거룩하게 하는 일에 더 성심이었던 그들이
히스기야의 정치, 종교 개혁과 성전청결과 성전봉헌과 성전제사와 같은
결정적인 일들에 쓰임 받은 것처럼 네가 거룩함에 성심으로 임하면
주님의 시간에 주의 쓰심에 합당하리라는 위로와 격력의 말씀도 주신다.

오늘의 묵상 글을 올리기 시작할 때부터
창밖에 내리기 시작했던 눈이
이제는 함박눈으로 변해 펑펑 쏟아지고 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라[사1:18]는
이사야의 글이 떠오르게 하는 이 아침

세상의 그 어떤 죄악이라도
씻어 정결케 하지 못할 것이 없는
거룩한 주님의 보혈을 의지하며
이 아침 경건한 기도의 무룹를 꿃는다.

주님!
레위 사람들의 성결하게 함이
제사장들보다 더 성심이었다고 하신
이 한 구절의 말씀을
내 손에 들려주신 등불처럼 붙들고
이 어둡고 힘든 세상을
잘 헤쳐 나갈 수 있는 은혜를 입혀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