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약성서당/* 히브리서 *

▼ 히브리서 10:26-39 (2) 히브리서 저자의 경고와 격려 읽어내기

by 朴 海 東 2019. 3. 29.

히브리서 저자의 경고와 격려 읽어내기

히브리서 저자의 경고와 격려 읽어내기

히브리서 10:26-39

묵상내용

어제 북-중 국경에 접한 D시를 출발해 아직도 추운 겨울인 하얼빈으로 왔다
하얼빈에 도착해서 다시 내가 가야하는 사역지로 향하는 기차를 바꿔타야 하는데 시간을 계산해보니 18분의 여유를 가지고 그 거대하고 복잡한 역사로 들어가 줄을 서서 표를 사고 다음 기차에 오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보였다
그래서 기차에서 내리기 전 차내 역무원에게 물어보니 친절하게도 내가 표를 사지 않고도 입장해 다음 기차에 올라가 표를 살 수 있도록 또 다른 직원을 내게 붙여주어서 정말 다행히 목적지에 다달을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중국에서 이런 친절은 받아본적이 없는데 주님이 나에게 천사를 붙여주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하는 중에 이처럼 주님께서 비상간섭으로 개입해주시는 경우를 종종 경험하곤 했다
한번은 호텔 앞에서 차를 타면서 가방 몇개를 차 트렁크에 넣는다고 어깨에 맨 가방이 번거로워 벗어놓고 했는데 깜박 잊고 그냥 차를 출발 시키려는 찰나에 그 야심한 밤중에 호텔 경비가 어떻게 그 가방을 목격했는지 공항으로 막 출발하려는 차의 문을 두드리며 여권과 돈과 중요한 것들이 든 그 가방을 전해준 경우도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위기의 순간에 누군가를 통해 도움을 받게될 때 이런 것들은 분명 주님의 자상하신 돌보심이 사람의 손길을 통해 나타난 것으로 단박에 알아차려지게 된다

이곳에 오니 우리 한국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포털 싸이트인 네이버도 다음도 카톡도 안되어서 나는 부득이 이 나라의 인터넷 검색 싸이트로 들어가 오늘도 매일처럼 생명의 삶 게시판을 찾아내 오늘의 묵상을 올린다

어제 기차를 타고 올라오면서 오늘의 본문을 한 번 읽어보면서 참 난해한 주제가 포함된 것을 발견 했는데 그것은
첫 구절부터 기를 죽이고 들어가는 말씀으로 닿아진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맹렬한 불(심판)만 있으리라(10:26-27)


나도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모신 이후에도 죄를 짓는 경우가 가끔은 있었는데 이 말씀이 의미하는 죄의 성격을 잘 못 오해하면 크게 낙망할 수 있는 여지를 담고 있는것 같다

이 말씀에 저촉되지 않는 자 과연 누가 있으랴
그런데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 만 볼것이 아니라 문맥적으로 연결시킬 때 바르게 이해하게 되는데 26절에서 말하는 죄가 어떤 성격의 죄인가에 대해 이어지는 29절의 말씀이 잘 조명해주며 보충해주기 때문이다

묵상적용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헤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10:29)

위의 26절에서 말한 진리의 지식을 받은 후 짐짓 범하는 죄가 29절에서 밝히 조명되는데 이것은 도덕 윤리적인 죄라고 하기보다 불신앙으로 나가는 배교의 죄로 이해하게 되는데 이런 류의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처음부터 구원받을만한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니었고 돌짝밭에 떨어진 씨앗처럼 일시적 믿음이었거나 분위기에 편승해서 믿었던 기적 추구적 믿음 같은 것들이었는데 상황이 바뀌자 자신들의 본색을 드러낸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26절이 말하는 이죄가 혹시 도덕 윤리적인 문제의 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구원받을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 것은 Niv버전이 보여주는 keep on sinning의 의미처럼
진실로 예수 나의 주인으로 삼고 구원받을 믿음을 가진 자들은 혹 자신이 연약하여 넘어지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는 계속적이며 반복적이며 고의적인 현재 진행형의 죄를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의 묵상을 내리면서 그동안 초기교회 히브리 성도들에게 유대교가 비교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우월성 및 온전한 속죄의 교리를 길게 해설하면 논증했던 저자의 마음이
이제 그 논증을 마치면서 자신이 보낸 이 편지와 그 설명들을 전달받은 성도들에게 이제는 전수받은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써 분명한 실천적 교훈을 채찍과 당근의 원리처럼 이렇게 경고(10:26-30)와 격려(10:32-39)를 겸비하여 전달하는 마음을 읽게된다.

묵상글을 쓰다보니 이 편지의 독자들에게 전하는 엄중한 경고의 교훈만도 너무 쓸 것이 많아서 이어지는 격려에 대한 말씀은 손도 대지 못했는데 이따 저녁 시간을 이용해서라도 다시 올려야 되겠다

지금쯤 멀리 떠나온 우리의 산하엔 봄꽃들이 만발했을텐데 이곳은 세찬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다
어제 북중 국경선에 인접한 D시를 떠나오며 압록강 건너 북한을 바라보면서 어서 속히 저 땅에도 복음의 꽃이 피는 복음의 봄날을 주시라고 간절히 기도하며 발길을 돌렸는데 여기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 도시 하얼빈에 오니 어제 드린 기도가 더욱 절실하게 드려진다

주님!

죄사함
새생명
하나님과 화목된
평화와 새소망과
새생활로 인도하는
복음의 씨앗이
아직
씨올을 터트리지 못한
저 동토의 땅 북한과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추운 이방의 도시에도
복음의 꽃을 피우는
그 날이 속히 오게 하옵소서

묵상내용

어제 북-중 국경에 접한 D시를 출발해 아직도 추운 겨울인 하얼빈으로 왔다
하얼빈에 도착해서 다시 내가 가야하는 사역지로 향하는 기차를 바꿔타야 하는데 시간을 계산해보니 18분의 여유를 가지고 그 거대하고 복잡한 역사로 들어가 줄을 서서 표를 사고 다음 기차에 오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보였다
그래서 기차에서 내리기 전 차내 역무원에게 물어보니 친절하게도 내가 표를 사지 않고도 입장해 다음 기차에 올라가 표를 살 수 있도록 또 다른 직원을 내게 붙여주어서 정말 다행히 목적지에 다달을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중국에서 이런 친절은 받아본적이 없는데 주님이 나에게 천사를 붙여주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하는 중에 이처럼 주님께서 비상간섭으로 개입해주시는 경우를 종종 경험하곤 했다
한번은 호텔 앞에서 차를 타면서 가방 몇개를 차 트렁크에 넣는다고 어깨에 맨 가방이 번거로워 벗어놓고 했는데 깜박 잊고 그냥 차를 출발 시키려는 찰나에 그 야심한 밤중에 호텔 경비가 어떻게 그 가방을 목격했는지 공항으로 막 출발하려는 차의 문을 두드리며 여권과 돈과 중요한 것들이 든 그 가방을 전해준 경우도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위기의 순간에 누군가를 통해 도움을 받게될 때 이런 것들은 분명 주님의 자상하신 돌보심이 사람의 손길을 통해 나타난 것으로 단박에 알아차려지게 된다

이곳에 오니 우리 한국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포털 싸이트인 네이버도 다음도 카톡도 안되어서 나는 부득이 이 나라의 인터넷 검색 싸이트로 들어가 오늘도 매일처럼 생명의 삶 게시판을 찾아내 오늘의 묵상을 올린다

어제 기차를 타고 올라오면서 오늘의 본문을 한 번 읽어보면서 참 난해한 주제가 포함된 것을 발견 했는데 그것은
첫 구절부터 기를 죽이고 들어가는 말씀으로 닿아진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맹렬한 불(심판)만 있으리라(10:26-27)


나도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모신 이후에도 죄를 짓는 경우가 가끔은 있었는데 이 말씀이 의미하는 죄의 성격을 잘 못 오해하면 크게 낙망할 수 있는 여지를 담고 있는것 같다

이 말씀에 저촉되지 않는 자 과연 누가 있으랴
그런데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 만 볼것이 아니라 문맥적으로 연결시킬 때 바르게 이해하게 되는데 26절에서 말하는 죄가 어떤 성격의 죄인가에 대해 이어지는 29절의 말씀이 잘 조명해주며 보충해주기 때문이다

묵상적용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헤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10:29)

위의 26절에서 말한 진리의 지식을 받은 후 짐짓 범하는 죄가 29절에서 밝히 조명되는데 이것은 도덕 윤리적인 죄라고 하기보다 불신앙으로 나가는 배교의 죄로 이해하게 되는데 이런 류의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처음부터 구원받을만한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니었고 돌짝밭에 떨어진 씨앗처럼 일시적 믿음이었거나 분위기에 편승해서 믿었던 기적 추구적 믿음 같은 것들이었는데 상황이 바뀌자 자신들의 본색을 드러낸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26절이 말하는 이죄가 혹시 도덕 윤리적인 문제의 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구원받을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 것은 Niv버전이 보여주는 keep on sinning의 의미처럼
진실로 예수 나의 주인으로 삼고 구원받을 믿음을 가진 자들은 혹 자신이 연약하여 넘어지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는 계속적이며 반복적이며 고의적인 현재 진행형의 죄를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의 묵상을 내리면서 그동안 초기교회 히브리 성도들에게 유대교가 비교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우월성 및 온전한 속죄의 교리를 길게 해설하면 논증했던 저자의 마음이
이제 그 논증을 마치면서 자신이 보낸 이 편지와 그 설명들을 전달받은 성도들에게 이제는 전수받은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써 분명한 실천적 교훈을 채찍과 당근의 원리처럼 이렇게 경고(10:26-30)와 격려(10:32-39)를 겸비하여 전달하는 마음을 읽게된다.

묵상글을 쓰다보니 이 편지의 독자들에게 전하는 엄중한 경고의 교훈만도 너무 쓸 것이 많아서 이어지는 격려에 대한 말씀은 손도 대지 못했는데 이따 저녁 시간을 이용해서라도 다시 올려야 되겠다

지금쯤 멀리 떠나온 우리의 산하엔 봄꽃들이 만발했을텐데 이곳은 세찬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다
어제 북중 국경선에 인접한 D시를 떠나오며 압록강 건너 북한을 바라보면서 어서 속히 저 땅에도 복음의 꽃이 피는 복음의 봄날을 주시라고 간절히 기도하며 발길을 돌렸는데 여기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 도시 하얼빈에 오니 어제 드린 기도가 더욱 절실하게 드려진다

주님!

죄사함
새생명
하나님과 화목된
평화와 새소망과
새생활로 인도하는
복음의 씨앗이
아직
씨올을 터트리지 못한
저 동토의 땅 북한과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추운 이방의 도시에도
복음의 꽃을 피우는
그 날이 속히 오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