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을 보라, 너희 왕이로다!요한복음 19:14-22
묵상하기
오늘의 말씀에서 빌라도가 군중들에게 동정심을 유발시키기 위하여
이 사람을 보라! 보라! 너희 왕이로다! 라고 외쳤던
요한복음 19:5. 14절을 소재로 하여 그려진 유명한 두 그림이 있다.
르네상스 시대 이태리 화가로서 빈 미술사 박물관에 비치되어 있는
티치아노의 작품〈Ecce Homo : 이 사람을 보라〉와
가장 후대에 알려진 작품으로써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 된
귀도 레니의 작품〈이 사람을 보라.!〉이다.
이 그림의 주제인〈Ecce Homo : 이 사람을 보라〉는
너무 유명한 말이 되어 무신론자 니체가
자신의 자서전의 제목으로 도용한 말이기도 한데
이 유명한 말인 “이 사람을 보라!”를 소재로 하여
티치아노는 가시관을 쓴 일그러진 얼굴을 떨구고 있는 예수 상을
그리고 레니는 가시관을 쓰고 하늘을 바라보는 예수 상을 그렸다.
그런데 빌라도가 가리켰던 그 얼굴은
바로 이사야 예언서에 나오는 "야훼의 종"의 모습이다.
아무도 그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일그러진,
차라리 동물만도 못한 고난 받는 종의 얼굴이다.
그 참혹함 때문에 그에게서 얼굴을 돌려야 했던 그런 얼굴,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얼굴이었다. [사53:4]
총독 빌라도는 많은 채찍에 맞아 몰골이 된 예수님을
총독 관저 앞으로 몰려든 유대의 군중들 앞에 세우면서
이 사람을 보라! [19:5]
보라! 너희 왕이로다! [19:14]라고 외치며 군중들을 주목시킨다.
그러나 한 주일 전 나귀를 타고 입성할 때
우리를 구원할 메시야라고 기대하며
수많은 군중의 환호를 받았던 그 영광스런 모습은 간데없고
처참하게 일그러진 예수님의 모습에 실망한 군중들은
일말의 동정을 보내기보다 마치 포효하는 사자들처럼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외치는데
빌라도는 이렇게 채찍으로 많이 때려서 몰골로 만들어 나오면
동정을 받아 사형만은 면할 것이라 생각하고
보라! 이 사람이라!, 보라! 너희 왕이라!
이 사람을 주목해 보라고 했지만
이내 자신의 의도와 동정을 구하는 말이 완전 빗나간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조소하듯 그렇다면 내가 너희 왕을 못 박으랴 되묻게 되는데
대제사장들의 답변으로써 우리에겐 가이사 외엔 왕이 없다는 말에
이러다간 나도 정치적으로 함께 엮일 수도 있겠다 싶어
예수를 살려보려던 모든 시도를 포기하고 예수를 희생양으로 넘겨주는데
이 장면이 나에게는 오늘의 말씀에서 가장 가슴 아픈 대목이며
나는 이럴 때 어떻게 하는가?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말씀이다.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 [19:16]
Finally Pilate handed him over to them to be crucified.
빌라도는 예수가 아무 죄가 없으며 유대와 예루살렘의 치안에
위험을 줄만한 인물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단지 종교지도자들의 시기와 기득권 유지를 위해
지금 자신의 손을 빌려 죽이려고 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는 기어이 예수를 살리고 싶었다.
그리고 다른 복음서에 써 있는대로 [마27:19]
자기 아내의 꿈 이야기 때문에라도 살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물러서지 않는 종교지도자들의 요구와 그들에게 사주받은
성난 군중들의 함성 앞에 자신이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 생각했는지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접고 계산적으로 생각하여 그들에게 예수를 넘겼다.
양심의 소리를 누르고 예수를 넘기는 빌라도의 비겁한 모습과
그렇게 상품처럼 넘겨지고 처리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도와 줄 수 있는 힘과 권력을 가졌으면서도 외면한 빌라도의 이야기를
여기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으로 남기게 하신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된다.
적용하기
나의 젊었던 목회시절 P도시에서 우리 교회는 상가 2층에 세 들어 있었고
위에 4층에는 키친 아트 영업부가 세 들어 있었는데
그 곳의 영업사원 중 한 청년이 등록교인은 아니지만
가끔 우리 교회 예배에 참석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회사로부터 전화가 와서 교회당으로 가보니
이 청년이 그 회사 사장과 또 다른 영업사원들에게 붙잡혀 있는 것이었다.
사연인즉 영업사원으로 물건을 판매하면서 받은 돈을 입금시키지 않고
모두 써버린 모양인데 그는 그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 그랬는지
교회에서 받을 돈이 있다고 말해서 사장은 나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 순간 나는 직감적으로 내가 손해 보더라도 이 청년을 살릴 것인지
아니면 그대로 넘어갈 것인지 갈등하게 되었는데
나 역시 개척교회 목사로서 돈에 궁하고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망설임 끝에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거기서 발을 빼버렸고
그 청년은 그렇게 그들에게 잡혀가는 뒷 모습을
쓰리고 아픈 마음으로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빌라도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넘겨주는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왠지 모르게 그 때 그 일이 내 마음에 아픔으로 떠오르는 것은
나도 내가 손해 보지 않기 위해서 계산에 빨랐던
빌라도와 한 통속이라는 자책감을 지울 수 없는 아픔 때문이다.
소설과 영화로 나온 “레미제라불”에서 만기 출옥한 쟝발장이 성당에 들어가
금촛대를 훔쳐 달아나는 과정에 잡혀서 장물 확인을 위해 잡혀 왔을 때
그 성당의 주임신부가 태연하게 그 것은 내가 준 것이라고 한 것 때문에
다시 감옥으로 가야할 위기에서 구원을 받은 장발장이
평생 처음 이 따뜻한 인간애를 경험하면서 그의 일생이 바뀌게 되는데
나는 왜 그 때 그 성당의 주임 신부처럼 하지 못하고
왜 그냥 그를 넘겨야 했는지 나의 평생 아픔으로 마음 한켠에 남아있다.
그 때 그 회사 사람들을 잠시 나가있게 하고 이 청년의 사정을 들어보고
내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며 회사 사람들과 타협점을 찾아내는
지혜로운 방법도 있었는데 왜 그 때는 이런 생각이 나지 않았는지.......(?)
그 때 그 일은 평생 나의 사역에 쓰라린 경험이자 교훈이 되었다.
빌라도가 군중 앞에 끌고 나온 처참하게 일그러진 예수의 모습처럼
오늘 내 앞에 그런 상황이 재현되며 이 사람을 보라! 했을 때
내가 군중의 입장에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며
또 내가 그를 도울 수 있는 빌라도의 입장에 있을 때 어떻게 할 것인지
이 모든 가상의 상황들을 깊이 생각해보며
오늘의 말씀 앞에 부끄럽게 되지 않기를 이 아침 간절히 기원드린다.
기도하기
주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나의 죄를 위하여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고귀한 생명을
십자가 위에서 내 놓으신
오늘은
주님이 수난 당하신 날,
성 금요일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생명을 내어 주신 주님!
채찍에 맞아 일그러진 주님께서
오늘 가장 낮고 천한
지극히 작은 자가 되신
또 다른 모습으로
내 앞에 다시 나타나셨을 때
내가 군중들의 한 사람처럼 되거나
빌라도의 길을 따르지 않게 하시고
끝까지 십자가 곁을 떠나지 않았던
어떤 여인들처럼 주님을 섬길 수 있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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