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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당/예레미야

예레미야 8:4-12 철새와 참새 그리고 나

by 朴 海 東 2019. 5. 30.

철새와 참새 그리고 나예레미야 8:4-12



묵상하기

세상에 기다림처럼 맘 졸이게 하는 것은 없는 것 같고
또 이 기다림의 끝에서 기다림의 열매를 얻지 못하고 
그대로 끝나버렸을 때 받는 절망감 또한 큰 것 같다. 

내가 선교단체에서 알게 된 검은 섬 **도 출신 한 자매님을 
처음 만났던 것은 그녀의 나이 사십대 이었을 건데
지금 칠십을 넘긴 나이에도 그녀는 여전히 홀로 살고 있다. 
아마 남은 생애도 이렇게 살게 될 것 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분이 그렇게 고결한 수녀도 아니면서 
평생 독신을 고집하고 살게 되는 사연을 언젠가 듣게 되었다.
내가 물어서 알게 된 것보다 그분이 먼저 나에게 자기 이야기를 했다

다산 정약용의 형인 자산(山) 정약종이 아우와 헤어져 
평생 유배지로 살았던 이 섬은 모든 것이 검어서 
자산 정약종도 한양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낼 때면 검은 것이 싫어  
검을 흑(黑)자 대신 검을 현(玆)자를 썼다고 하는데 
이 분은 이 검은 섬 **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결혼을 약속한 남자 친구와 함께 큰 꿈을 안고 떠나 
서울로 올라와 정말 열심히 살았던 것 같다. 

자신을 희생하며 열심히 돈을 벌어 남자 친구를 뒤 바라지하며
기술을 배우게 하고 자격증까지 따게 만들어
더 큰 성공을 위해 미국으로 가게 했는데 
미국에서 자리를 잡으면 그 때 자기도 불러들여 결혼도 하고 
행복하게 살자고 굳은 맹세를 하고 헤어졌건만
세월이 지나갈수록 소식이 점 점 뜸해지더니 
어느 날 들려온 소식에 기다리고 기다려온 자신은 안중에도 없고
미국에서 다른 여자 만나서 결혼해 살고 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너무 크게 기대하고 너무 오래 기다렸던 탓이었을까.......(?)
그녀는 이 때 충격으로 이 때 이루지 못한 결혼은
자신의 인생 마음 한 컨에 미뤄놓고 평생 독신으로 살아가는 것 같다. 

그토록 사랑하고 그토록 희생했건만 쓰디쓴 배신을 맛보고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도 잘 알면서 
지금도 바보스럽게 미국으로 떠난 옛 연인을 기다린다고 하는 
그 녀의 사연이 왠지 모르게 오늘의 말씀과 매치되어 떠오른다. 

다시 돌아오기가 어렵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보처럼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이 
이아침 선지자의 가슴을 통하여 전달되는데

특별히 하등 동물이며 미물인 철새들의 생리와 귀소본능에까지 
연결시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외롭고 상한 마음을 읽게 된다. 

「사람이 떠나갔으면 어찌 돌아오지 아니하겠느냐
이 예루살렘 백성이 항상 나를 떠나 물러감은 어찜이냐? 
그들이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는 도다.」 [8:4-5]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산 비들기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들이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원하는 것을] 알지 못하도다.」 [8:7]

여기서 학/반구/제비/두루미 같은 조류들은 자신들의 본능에 따라
살길을 택하는 철새들로써 철을 따라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며
떠났다가도 다시 돌아오는 새들인데 지금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 유다 민족이 자신에게서 한 번 떠나버린 것으로 끝나고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미물인 철새만도 못하다고 탄식하시는 것이다.

제발 나에게 돌아오라고 호소하는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는 다 가늠할 수 없지만
자신의 기다림에 대한 안타까움을 철새들에게까지 빗대어 말씀하시는 
그 절절한 마음이 읽어지면서 내가 이런 하나님 사랑의 그늘에서 
절대 떠나지 않아야할 것을 진심으로 기도하게 된다. 

내가 가끔 찾아가는 동네 구립 도서관 마당에 큰 등나무 그늘이 있는데
한 쪽 발이 없어 목발을 짚고 다니시는 분이 매일 모이통을 들고 찾아와 
거의 하루 종일 새들과 함께 지내는 것을 자주 목격하게 되었다

그분은 마치 일상처럼 늘 그 자리에서 수십 마리 새들과 만나는데 
주로 참새들이 많고 까치나 가끔은 조롱박이도 날아온다.
제 날개를 가지고 마음껏 창공을 나는 새들이 왜 이 아저씨 옆에 와
자기들 끼리 지절거리며 무슨 이유로 하루 종일 시간을 같이 보내는지 
궁금해서 몇 번 관찰을 해보았는데 새들을 위해 준비해간 모이들과 
새들을 위해 준비한 물그릇에 새들이 친숙해 진 것 같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이 새들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이렇게 새들도 무서워하지 않고 곁에 와 지절거리게 하며 
오래된 친구처럼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적용하기

오늘의 묵상을 내리면서 나는 나의 주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한 철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철새의 사랑에서 머무는 정도가 아니라 
내가 동네 도서관에서 목격한 목발 아저씨와 참새들의 관계처럼 
매일 매일 그 주변을 떠나지 않고 맴도는 친숙한 사랑이고 싶다.

나는 그 등나무 아래서 새들이 그의 곁에 있을 때 
모든 필요한 것들이 공급되는 것을 보았고 안전한 것을 보았으며
그 목발 아저씨의 관심과 돌봄과 사랑이 함께 깃든 것을 보았다. 
나도 정말 이렇게 다시 떠나지 않는 근거리 신앙 안에 머물고 싶다. 

성 어거스틴이 남긴 참회록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마음의 한 공간을 비워두셨는데 
오직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때 행복하게 되도록 하신 것이라고 하였다.

후에 파스칼도 같은 고백을 하였고 
종교개혁가 죤 칼빈은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는 이 텅 빈 가슴의 공백을
종교의 씨[The seed of Religion]라고 하였는데 
종교 곧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심리가 여기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하나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셔서 
자기 기업을 삼으신 유다 민족은 선지자의 탄식처럼 
떠났다 다시 돌아오는 철새들보다 못한 심리로
하나님을 다시 찾아 돌아오지 않으니 
그들의 심리 속에는 이 빈 공간 /종교의 씨조차 말라진 것일까?

선지자는 하나님께 대하여 냉담 심리가 되고 
완악하게 되어버린 유다 민족을 통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찾는 마음조차 상실한 
우리 인간의 내면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다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가을 날 아스라한 푸른 하늘 저 창공 위를 
떼를 지어 날아가는 철새들만도 못하여 
다시 돌아가는 방향성을 잃어버렸고 
날개마저 꺾어져서 추락해버린 우리를 위해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에게 아버지를 알게 하시고
우리에게 다시 돌아갈 방향을 알게 하셨으며
우리와 함께 다시 비상하시며 
우리엑 다시 날개 쳐 올라갈 힘을 주신다. 

주님!
기다려 주시는 그 사랑이 얼마나 애달픈 것인지 
떠났다 다시 돌아오는 철새와 비교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제는 철새의 사랑의 생리에서 머무는 신앙이 아니라 
늘 주님의 곁에서 재잘거리고 맴돌며 떠나지 않는  
한 마리 행복한 작은 새로 주님을 노래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