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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당/시편

시편 119:73-88 연기 속의 가죽부대가 주는 교훈

by 朴 海 東 2019. 9. 18.

연기 속의 가죽부대가 주는 교훈

시편 119:73-88


[뜻으로 읽는 오늘의 말씀 요약]

히브리어 알파벳 열 번 째 글자[요드]로 시작되는 119:73-80에서 
가장 돋보이는 시상[詩想]은 
지금 극심한 고난 가운데 처하여 있는 시인이
마치 토기장이의 손에 들린 진흙 한 덩이처럼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들어 가시며
빗어 가시는 과정으로 받아드리면서
자신의 고난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데서 발견되며. [119:73b]
또 이런 가운데서도 명철한 이해력을 주시어 
주의 말씀을 잘 배우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에서 본다[119:73a]

이러한 시인의 마음은 이어지는 고백에서 더욱 환한 빛을 발하는데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고난 가운데 놓아두심은]
주의 성실하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내가 압니다.”에서 빛난다[119:75] 

그래서 시인은 고난 중에서도 희망을 줄을 놓지 않고 간구한다. 
주의 종에게 하신 약속하심을 따라 
변치 않는 주의 자비하심이 나의 위로가 되게 하시며 
주의 말씀이 나의 즐거움이오니 
주의 긍휼이 나를 살게 하실 것이라고 기도하며.[119:119:76-77]

까닭 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교만한 자들이 수취를 당하게 될 것과
반대로 자신은 주의 말씀에 굳게 서게 하사 수치를 당치않게 하심으로
주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표본이 되게 하시기를 간구한다.[119:78-80]
---------------- [Continue]

히브리 알파벳 열한 번 째 글자[카프]로 시작되는 119:81-88로 들어가면
앞선 연에서 그토록 꿋꿋하게 보였던 시인의 기상이 
마치 꺼져가는 등불처럼 펄럭이며 흔들리고 있음을 본다.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그래도) 나는 주의 말씀에 나의 희망을 둡니다.[119:81]
주님!
내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언제 주님의 위로가 나에게 임하겠나이까?[119:82]

나를 핍박하고 괴롭히는 교만한 자들을 
언제까지 그대로 두고 계시렵니까?[119:84-86]

나는 연기 속의 가죽 부대같이 되었으나 
그래도 주의 말씀을 잊지 않겠습니다.[119:83]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119:8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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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이 너무 오래 지연되면 희망의 줄을 놓고 포기할 수 있는데
오늘의 시편 두 번째 연에서 그런 위기에 처한 시인의 모습을
마치 “연기 속의 가죽 부대”로 비유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버려진 상태, 
혹은 하나님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상태로 이해하게 된다. 

여기서 사용된 “연기 속의 가죽부대”에서 가죽부대는 
포도주를 숙성시키는 데 사용되는 부대로 보다는
물이나 우유 같은 여러 가지 액체를 운반하는데 사용된 
양가죽 용기로도 이해하게 되는데
기브온 사람들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을 속였을 때
이런 가죽 부대를 내 보이면서 자신들이 오랜 기간이 걸려 
먼 지역에서 온 것으로 위장하기도 하였다.[수9:4-13]

또 한 가지 “연기 속의 가죽부대”에서 연기 보다는 
(옹기점) 연기가 만들어내는 재로 이해하게 되는데[창19:28]
가죽 부대를 재속에 넣어두는 것은 
오랫동안 저 온열을 가하여 여기서 버터나 요구르트 같은
유제품들을 얻어내기 때문이다.[사7:15]

시인이 자신의 처지를 “연기[재] 속의 가죽부대”로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응답이 없는 가운데 무한한 기다림에 지친 표현이다. 

그러나 기다림에 지친 것 같은 시인의 절망 저편에서 
아직 조금 더 기다려서 결과를 주셔야하는
하나님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인 것을 
자신의 기다림을 “연기[재]속의 가죽 부대”로 비유한
시인의 독백을 통해 엿보게 하신다. 

그렇다 아직 조금 더 무르익고 조금 더 성숙될 시간이 필요하다
나의 과거와 현재와 장래의 모든 것을 한 시점으로 놓고 보시는
전능하시며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때로 내가 포기할 수 있는 막다른 상황에서 조차도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주님의 때와 주님의 시간이 있음을 말씀하시며 
힘들지만 내가 조금 더 기다려야 할 이유를 말씀하신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9]


나는 가끔 아내에게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래 기다리게 하셔서 
마침내 정해주신 곳이라는 말을 종종하곤 한다.

서울 시내 어디 한 곳, 송곳 하나 꽃을 때가 없는데
나는 우리 아파트 후문 쪽에 
쓰레기 더미처럼 버려진 곳을 개간하여
백여 평 정도의 밭을 만들고 
또 아파트 후문 입구에는 여러 종류의 꽃을 심어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게 되었는데

아무도 소유를 주장하거나 간섭하는 사람이 없이 
이 비싼 땅에 작물을 심고 꽃을 심으며 살게 된 것이
정말 주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 나의 주민등록 초본을 때어보면 
그동안 믿음의 족장들처럼 
나그네 인생이 되어 너무 많이 이사를 다녀서 
더 이상 쓸 여백이 없을 만큼 빽빽한데
마침내 이곳에서 와서 정착을 하게 되면서 
감사 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 아파트 출입문을 드나들 때마다
현관 문에 두 손을 대고 감사하며 축복을 기도한다. 

내가 시편의 저자처럼 나는 왜 이렇게 
집도 절도 없이 고달프게 살아야 하느냐고 
원망 아닌 원망을 하며 한탄했을 때도 
내 인생의 선후사를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침묵 속에 내려다 보시며 
나의 주거와 관련된 내 인생의 시간표를 
마침내 이렇게 인도하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영원히 변치 않는 주님의 자비하심과 신실하심만이
내가 흔들리는 절망 가운데서도 붙들어야 하는 
희망의 줄이 되는 것을 다시 한 번 마음 깊디 새긴다.

[찬양으로 드리는 기도]
주님의 시간에 그의 뜻 이뤄지리 기다려 
하루하루 살 동안 주님 인도하시니 주 뜻 이룰 때까지 기다려 

기다려 그때를 그의 뜻 이뤄지리 기다려 
주의 뜻 이뤄질 때 우리들의 모든 것 아름답게 변하리 기다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