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구약성서당/시편

시편 119:89-104 나는 주의 것이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by 朴 海 東 2019. 9. 19.

나는 주의 것이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시편 119:89-104


오늘의 시편은 히브리 알파벳 열두 번째[?,라메드]와
열세 번 째[?,멤]으로 시작되는
시편 119:88-96절과 97-104절의 말씀이다. 

열두 번째 연이 하나님의 천지창조와 섭리에 근거한
하나님 말씀의 영원불변성을 주제로 삼고 있다면
열세 번째 연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함과
그에 따른 결과와 축복들을 주제로 삼고 있는데
각 각의 연에서 한 구절씩을 묵상의 소재로 삼게 된다. 

1.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119:81-96]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의 자녀된 땅위의 성도들이 
그의 얼굴을 직접 대면함으로써가 아니라
[이렇게 해서는 살아남을 자가 없으므로]
그가 주신 계시의 말씀을 통하여 
그를 경험하며 위로받게 되기를 원하신다. 

시119편의 저자는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기록된 말씀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 이야기들을 신앙 고백적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그의 인생과 삶의 애환들은 온통 말씀에 관련해서만 있는 것 같다. 

사랑하는 연인들 사이에 주고받는 사랑의 고백 속에서 
감동의 전율을 느끼는 것처럼

“주의 말씀은 나의 즐거움 입니다. 
나는 이것 때문에 고난 속에 살아남아 있습니다." [119:92]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니 나를 구원해 주십시요 
.내가 주의 말씀만 찾고있습니다."...라는 고백이 드려질 때 [119:94]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뜨거운 감동의 전율로 물결치게 되었을까 헤아려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땅 위의 성도들을 통하여 이런 고백을 받고 싶으시다. 
그것이 찬양의 형태이든, 신앙고백이나 기도의 형태든 
어떤 모양으로든지 하나님께 드려질 때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독생자까지 내어주신 사랑의 화답에 기뻐하실 것이다.

--------[ 적 용 ]-------

남자들이 사랑하는 연인으로부터 가장 듣고 싶어 하는 사랑 고백이 있다면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 는 사랑고백 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남자의 갈비뼈 하나를 떼어서 여자를 만들었기 때문에 
남자들의 왼쪽 갈비 뻐 쪽은 항상 허허로움을 느끼고 
무언가로 채워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옆구리 갈비뼈를 떼어내듯 옆구리를 상하시어 
나를 새 생명으로 나오게 하신 주님께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 
마음을 뭉쿨하게 해드릴만큼 진한 사랑고백을 드린 것이 
과연 언제 였던가를 돌이켜보니 요즘 내 마음도 많이 식어진 것을 느낀다. 

한참 어려웠던 시기에, 고난의 터널을 통과할 때 
포켓 성경을 윗 주머니에 넣고 1년 365일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아니한 때가 있었다. 

그땐 욥의 고백처럼 일정한 음식보다 주의 말씀을 더 귀히 여겼던 시기여서
음식을 기다리면서도 말씀을 묵상하다가 
성령의 뜨거운 감화에 젖어 눈물 밥을 먹던 시기가 있었는데.......

요즘은 왠지 모르게 영적 허기가 느껴진다. 
세상의 것으로 배불러진 때문일까...(?)
다시 소원해진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교제를 회복하고 싶다. 
나도 시편저자처럼 하나님께 향한 신앙고백으로 뜨거운 감동을 드리고 싶다.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여 주소서 
내가 주의 말씀만을 찾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 있는 수목들이 점점 대지의 색깔로 돌아가는 이 가을에
모든 생명과 사랑의 원천이신 주님 품에 안기게 하는 말씀 속에서 
나의 영적 허기와 목마름을 채우고도 남을 만한 생수를 길어 올릴 수 있어야 되겠다.

[기도하기]

나는 주님의 것이오니 
나를 구원하여 주소서
내가 주의 말씀만 찾고 있습니다. - 아멘 -



2. 두 개의 꿀 단지. [119:97-104]

시편 119편 전체가 말씀의 소중함을 드러내고 있지만 
오늘의 본문은 그중에서도 더욱 특별하게 말씀의 가치와 소중함을 드러내는 것 같다 

말씀이 나를 원수보다/스승보다/노인보다 명철하게하며 지혜를 주는 것뿐만 아니라
말씀은 나를 죄에서 멀리하게 하고 꿀 맛 같은 기쁨을 준다고 알려 준다 

오늘의 말씀에서 내 호흡을 정지시키고 내 눈을 머물게 하는 구절은 119:101절이다.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신앙고백 할 수 있는 시편 119편의 저자에게 
무릎이라도 끓고 싶은 심정이며 그 비결이 무엇인지 배우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그는 어떻게 해서 이런 신앙의 경지까지 가게 되었을까....(?)
이 세상에는 나로 하여금 죄의 낙을 즐기라고 
마음을 미혹하며 잡아 끄는 유혹들이 많고도 많은데 
그는 어떻게 자신의 마음과 발걸음을 통제할 수 있었을까...(?)

때로 성도가 죄를 짓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 보다 
죄의 낙을 즐기는 것이 더 좋고 매력적으로 보여서
거기에 발을 담그게 되는 법인데
시편 저자에게는 이런 죄의 낙을 물리치고 
말씀을 선택할 만한 무슨 비결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이어서 나오는 119:103절에 그 해답이 있는 것 같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하나님 말씀 중심에 자신을 세우고 말씀 중심으로 살다보니 
마치 꿀의 단 맛을 맛본 사람이 
자꾸 꿀이 먹고 싶어지는 것처럼 그는 말씀에 끌리는 삶을 살게 되고

자신을 한 눈 팔게 만드는 죄의 낙이 아무리 크게 보이고 유혹해도 
그는 말씀 때문에 자신의 발을 금하여 죄악의 길로 가지 않은 것 같다. 

성도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마귀가 미끼로 던져 놓은 죄의 낙으로써 꿀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성도의 유익과 축복을 위해서 주신 말씀의 꿀단지도 있다. 

시편 저자의 고백처럼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않게 되는 유일한 비결은 
내가 꿀을 자주 퍼먹고 싶은 것처럼 말씀이 좋아질 때
가능한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려 본다 

내가 나의 의지로 죄를 이길 수 있는가(?)
한 두세 번은 가능 할 것이다. 그러나 시편 저자의 고백처럼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나의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않았다는 수준에 이르려면 
말씀이 나에게 꿀단지가 되게 하는 수준까지 가야한다. 

그 때는 내가 죄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로 하여금 죄를 이기게 하는 축복이 나의 삶의 지배할 것이다. 

[기도하기]

죄의 낙으로 나를 유혹하는 마귀의 꿀단지 멀리하게 하소서
이것이 나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죽이는 독이 있음을 알게 하시고
나에게 양약과 생명이 되는 말씀의 꿀 단지 끌어안고 살아가는 자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