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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당/* 요한복음 *

요한복음 2:13-25 때와 시기와 상황에 맞는 거룩한 분노 터트리기

by 朴 海 東 2020. 1. 8.

때와 시기와 상황에 맞는 거룩한 분노 터트리기

요한복음 2:13-25


이 책의 저자 요한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나타난
첫 번째 예루살렘 방문기를 
아주 인상 깊게 남기고 있다

평소에 온유 겸손하시고 자비하신 그가
채찍을 만들어 성전 마당에서 
제수 용품으로 팔리는 가축들을 향해
휘둘러 쫒아내시며
환전상들의 돈 통을 뒤 집어 엎으시고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비둘기 케이지[상자]를 들고 
이 성전 마당에서 썩 나가라고 하신 것이다
(여기서 비둘기들은 채찍으로 휘두르면
다 날라 갈 것이기 때문에 말로만 하신 것 같다)

요한은 예수님의 이 과격한 행동에 대해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이렇게 자신을 삼키게 된 것이라고 하며
이것은 단순한 혈기와 분 냄이 아니라 
거룩한 분노요 의분의 표출로 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방문은 
이미 열두 살 때부터 시작되었음으로
그가 서른 살쯤 되어 공생애에 나섰으니
벌써 18년이나 이어졌을 텐데 
그동안 뒤집어엎고 싶은 마음을 
못 본체 침묵으로 일관 하셨던 분이 
왜 이제 와서 이렇게 하신 것일까 ?

그것은 이제 막 세례요한을 통해 
왕의 대관식 으로써 세례를 받으면서 
그의 백성들을 향해 나가게 된
그의 공생애 적 소명감이 

그동안 침묵하면서 
활화산을 폭발시키는 용암의 꿈틀거림처럼 
그 안에 내재했던 거룩한 분노가 
마침내 공생애 출발선 상에서 
이렇게 폭발 된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당시 성전 안에서는 멀리서 오는 사람들을 위해
제수 용품의 편의를 제공한다는 구실로
소나 양이나 비둘기 같은 것들을 팔게 했으며 
외국에서 오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위해서는
환전도 하게 하여 제수 용품들을 사게 한 것인데 

문제는 이렇게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자리 세를 뜯어먹는 
배후의 성전 지도자들의 흑심이 
이처럼 하나님의 성전을 
시장바닥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며

그들이 독차지 하고 있는 권위 때문에
그 누구도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거나 저항하지 못했는데 
처음으로 나사렛 사람 청년 예수에 의해
정면 도전을 받게 된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는지
이어지는 요한복음 3장을 보면 
존경받는 니고데모 같은 사람조차도 
이 청년 예수에게 관심을 갖고 
밤에 은밀히 찾아와서 
청년 예수에게 랍비라 호칭하며
진지하게 상담을 요청할 정도가 된 것을 본다.  

더불어 예수님의 이 성전 청결사건은 
소문의 바람을 타고 온 이스라엘에 퍼졌을 것이니
한 갓 무명의 청년에 불과했던 예수를 
전국구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놓아서 
그의 공생애 사역을 알리는 
특별한 계기도 되었음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적용하기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당시 하나님과의 관계는 
꽉 막혀 있으면서도
유대교와 제사라는 종교를 이용하여
자신의 뱃속을 채우는 사람들에게 
정면으로 도전하셨다. 

이것은 한창 혈기 왕성했던 
이십 대에 하신 것이 아니고
삼십 대에 들어서면서 하셨으며
그의 공생에 출발 선상에서 하셨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제사장들이
제사의 공직에 나가는 나이나 
일반인이 공인으로 나서는 나이를 
율법의 관례에 따라 삼십 세 로 했다]

예수님이 자신의 나이가 
공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삼십 세쯤에 
그리고 더욱 특별히 
이제는 사적인 삶이 아니라
아버지의 보내신 뜻을 이루어 드리는 
공생애를 출발하시면서 
이렇게 돌출적인 행동을 보이신 것은

오늘 내가 우리 시대에 
우리 교회나 교계 또는 이 사회에서
예수님이 하신 것 같은
돌출적인 발언이나 행동을 하고자 할 때
내가 그것을 그렇게 할 만한 
충분한 이유와 명분과 시기와 상황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로 부터 말미암은 
거룩한 의분을 표출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자신을 기꺼이 위험에 던지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며 돌아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이스라엘에 흩어진 양 무리에는 
한 치의 관심도 없으면서 
자신의 뱃속을 채우기 위해 
유대교를 이용하고 있었던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분개 하셨다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에게 
이리 저리 시달리며 뜯기면서 살아가던 
이스라엘의 가련한 양들을 위해
자신이 가만있으면 안 된다는 
거룩한 부담도 가지셨다. 

그래서 자신이 이렇게 하면 
미움을 당할 것이고 
권위에 도전한 무서운 대가가  
자신을 십자가로 몰아가는 
위험이 된다는 것도 아시면서도
그러나 그가 아버지께로부터 
양들을 위하여 받은 사명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고
과감하게 권위의 도전에 나선 것이다.

요즘 광화문 광장에서 
정부의 권위에 도전하는 한 목사님이
연일 매스컴에 오르내리며 유명세를 타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분이 예수님의 거룩한 분노처럼
그렇게 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아시아 언론의 자유 1위 국가로써
대통령을 심하게 모욕하고 하야 운동을 해도 
다 묵인할 정도로 자유로운 세상이 되었다. 
이전 군사독재 시대에서나 어울릴만한 과격 행동을
보이는 것은 시대에 걸맞지도 않으며 
자기 집단이 추구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흑심과 속셈이 보일뿐이다. 

그래서 그런지 어제 뉴스에서 보니 
집회를 이용하여 
사전 선거 운동을 하는 것 때문에 
선관위로부터 고발당한 것도 보았다. 
자신의 욕심과 흑심이 드러난 셈이다. 
그에게 열광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치 색깔, 프레임에 갇혀서
그가 하는 모든 행동들을 정당화 시키며
대리 만족을 얻는 것처럼 보인다. 

대통령을 끌어내리려고 
밤낮없이 기도하며 집회하는 것 때문에 
청와대 주변 동네 사람들에게까지  
심각한 민폐를 끼치고 있는 그 무모한 열심을
먼저 이 사회에 빛이 되지 못하고 있는 
우리 교회들의 죄악을 회개하는 일에
그리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하여
세상 사람들에게서 조차 
가장 개혁이 필요한 곳으로 인식되고 있는 
우리 한국 교회를 정화하는 일에 쏟아주면 좋겠다. 

예수님의 거룩한 분노와 관련한 글을 쓰다 보니
본의 아니게 또 정치와 관련된 글이 되었다.
이런 글을 올리면 싫어하는 분들이 있는 것을 알지만
오늘의 말씀이 보여주는 예수님의 거룩한 의분과 용기를 
나도 억만 분의 일이라도 추종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