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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당/* 요한복음 *

요한복음 9:1-12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 하심이라

by 朴 海 東 2020. 2. 5.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9:1-12


요한은 이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이적 가운데
오직 일곱 가지만을 선별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그가 선별하여 기록하는 기적 하나,하나 마다 표적이라고 칭함으로
이러한 기적 속에는 상징과 싸인이 들어있음을 밝히고 있다. 

오늘의 본문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기적인데 
처음 이 사람을 바라볼 때부터 시작해서 눈을 뜨게 하시는 과정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서 이 기적을 행하신 목적[9:39]을 보면서
몇 가지 중요한 교훈들을 마음에 새기게 된다. 

1.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9:2]


사람의 불행을 죄와 연관시키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나 
이것을 개인에게 인과응보 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다.  
인간의 조상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 인간에게 죽음과 질병 같은 
불행이 오게 된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런 보편적인 것을 한 개인에게 구체적으로 적용시키는 것은
이어지는 예수님의 답변에서 볼 때 옳지 않음을 본다 [9:3] 

동방의 부자요 의인이었던 욥이 어느 날 한 순간에 몸에 악창이 나고
재산도 날아가며 불행하게 되었을 때 그의 친구들 역시
본문의 제자들처럼 인과응보적 관점에서 욥의 불행이 
그의 죄로부터 기인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욥4:7.  22:5-10]
사실은 욥이 그의 친구들보다 더 죄가 많아서가 아니라
욥의 믿음을 놓고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 명예가 걸린 한 판 승부였고 
이것은 땅에 있는 욥이나 그의 친구들에게는 가리워저 있는 것 이었다.

따라서 어떤 한 사람의 질고나 불행에 대해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했던 인과 응보적 시각을 갖는 것은 부당하며 
이것들은 예수님의 답변처럼 사람들의 눈에는 숨겨진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으로써 함부로 판단할 수 없음을 배우게 된다. 

2. 그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2:3b]

천성적 맹인인 한 불행한 걸인을 앞에 놓고 
제자들이 바라본 부정적인 시각과는 전혀 다르게 
예수님은 긍정적 시각으로 바라보시며 
하나님이 하실 일을 드러내고자 하심이라고 하신 이 답변은
그 당시 제자들 뿐 아니라 오늘 우리[나]에게까지 
내가 얼마나 잘못된 시각을 가지고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지 잘못된 인식을 일깨워준다. 

최근 나는 어린이 동화 작가로 유명한 권정생 선생의 책들을 
많이 보고 있는데 대표작으로 꼽히는 "강아지 똥"의 내용을 보면서
내가 세상의 불행한 것들에 대하여 가졌던 부정적인 시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권 정생 선생은 아름다운 민들레꽃보다 
그 민들레꽃이 화려하게 피어나도록 밑거름이 된 "강아지 똥"이 
더 중요한 것이라는 작가의 마음을 담아서 
이 세상에서 무시되고 하찮게 보이는 것들의 존재가 
사실은 얼마나 의미 있고 귀한 것들인지 작가의 정신을 불어넣고 있다.

한 천성적 맹인을 놓고 제자들은 인과응보적 시각으로 죄와 관련시켰지만
예수님은 그보다 더 그 사람의 불행조차도 하나님의 영광과 연관시키며 
우리가 그를 위해 무엇을 할까......(?)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하시는 아름다운 일의 기회를 만드는 관점으로 
방향을 트신 것을 보면서[9:4]
오늘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어떻게 교정되어야 하는지를 배운다. 

나는 육신적인 눈을 말짱하게 뜨고 있으면서도 
겉으로 드러나는 사물의 외면적인 것 밖에 볼 수 없지만 
예수님은 내가 바라보는 대상의 내면의 본질을 보라고 하시며 
가장 불행한 것들조차도 하나님과 그의 영광에 관련시키는 
영적 시각으로 교정되라고 하심을 이 말씀 속에서 교훈 받는다.


3.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9:6]

여기서 예수님은 침이나 진흙에 무슨 특효 성분이 있어서 
그리 하신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물론 당시 민간요법으로 침이나 진흙에 약효 성분이 있어
사용되었다고 하는 기록도 있기는 하지만 
예수님이 여기서 이 천성적 소경에게 이런 방법을 쓰신 것은
전적으로 이 소경의 위해서 이렇게 하신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기실 예수님은 말씀 한 마디로도 이 소경을 고칠 수 있는 
인간 창조자의 권위와 능력이 있는 분이 아니시던가(?)
그러나 이 천성적 소경을 상대하심에 있어서 
예수님은 그 소경의 수준으로 내려오셔서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그 소경이 예수님의 치유 행위에 
그의 마음을 집중하고 순종함으로 치유되게 하기 위해서 
이런 방법을 쓰신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의 기대대로 그 소경은 예수님이 눈에 발라주신
침으로 이긴 진흙이 발라진 눈을 가지고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실로암 연못을 (물어 물어서) 찾아가 그곳에서 씻고 밝아지게 되었다.

이것은 마치 문둥병자 나만 장군이 엘리사의 말을 듣고
요단강을 찾아가 강물에 일곱 번 몸을 담근 순종에 비교되고
예수님의 첫번 째 표적으로 기록된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 집에서 
하인들이 돌 항아리에 물을 채우고 난 후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주라고 하심에 순종함으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에 비교될 수 있는 순종의 축복으로 보인다 

4.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오늘의 묵상 서두에서 이 책의 저자 요한이 선별하여 기록한 
요한복음의 일곱 가지 기적들은 모두 상징성을 담은 표적이라 했는데
요한복음에서 여섯 번째 표적으로 기록된 
보지 못하는 자의 눈을 뜨게 하신 이 표적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을 가진 "실로암 못"으로 찾아가서 이루어진 것은
곧 아버지께로 부터 보내심을 받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게로 갈 때
우리(나)의 닫힌 눈을 뜨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받게 된다. 


오직 마음이 가난하고 겸손한 자들만이

실로암 연못이 되시는 예수에게로 나아가 다시 보게 됨을 얻을 것이니
그래서 그런지 천성적인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심을 기록한 
요한복음 9장의 결론으로 나오는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9:39]

주님!
세상에 하찮게 보이고
불행하게 보이는 것들 속에서도 
하늘 아버지의 하시는 일과 
그의 영광을 바라보았던
주님의 눈빛으로 
나도 이 세상의 불행들을 바라보며
하찮은 것들 속에 빛나는 
주님의 가치를 볼 수 있게 하소서

하늘 아버지께로부터 보냄을 받아 오신
나의 실로암이 되신 주님께로 가서 
나의 닫힌 눈을 뜨게 하시며
다시 교정 받은 주님의 눈빛으로 
주님이 지으신 세상의 것들을 바라 볼 수 있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