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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당/* 요한복음 *

요한복음 17:1-5 (2) 주님의 기도문에서 다시 만나는 참 하나님 예수

by 朴 海 東 2020. 3. 4.

주님의 기도문에서 다시 만나는 참 하나님 예수

요한복음 17:1-5


코로나 전염병으로 선교지에도 갈 수 없는 요즘은
도리어 선교지 사람들로부터 자주 소식을 받으며 
나의 건강을 염려해주는 안부도 받고 있으니 
이 또한 기쁘고  주님 앞에 감사한 일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믿음을 가진 이방인들을 
나의 친구와 믿음의 가족으로 갖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린다 

서울시가 코로나 역병을 퇴치하기 위해 홍보하고 있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다보니 
가능한 집 밖으로도 나가지 않은 요즘은
하루에 한 번 사람들을 만날 일이 없는 길을 선택하여
가까운 공원을 한 바퀴 돌아오는 선에서  
나의 건강을 관리하고 있는 정도인데 
그러고보니 나 뿐만 아니라 내 주변이 너무 조용하여 
지금 이 코로나 역병이 도는 이 시기가
그동안 일상으로 알고 지냈던 
사회적 풍속도를 많이도 바꾸어 놓은 것같다.

지금까지는 우리 아파트 14층에서 내려다 보면
아파트 단지 안 놀이터에 뛰노는 아이들을 많이 보았는데
지금은 아이들의 소리도 들을 수 없으니 적막하기만 하다 
놀이터 주변에 화사한 벗꽃들이 꽃망을 터트려 주기 전에
다시 젊은 엄마들과 아이들이 놀이터에 나와 주면 좋겠다
아마 아이들이 신나게 놀면서 시끄럽게 만들어주는  그날이
코로나 19 역병이 물러나는 때가 되리라고도 생각해본다

나는 세칭 역마살이 낀 사람이라 그런지 모르지만
밖으로 많이 나도는 성격이라 우리 땅이 좁아서인지
우리 선조 고구려 인들이 말을 달렸던 
중국의 동북삼성(요녕/길림/흑룡강성)을 
종과 횡으로 수도 없이 종단하며 횡단했던 사람인데 
요즘 방 안에만 있으려하니 여간 좀이 쑤시는게 아니다 

주로 방 안에 있게되어 가끔 TV를 켜보면
언론의 보도는 항상 우울한 것들 뿐이고 
모든 것이 회색지대에 놓여있는 것 같은 요즈음
그럼 나는 어떻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그동안 서가에 소장만하고 읽지 못했던 책들을 꺼내서 
한권씩 읽어나가고 있는데 자칫 우울해지기 쉬운 이때
책들을 통해 또 다른 세상들을 접하게 되니
이 또한 얼마나 좋고 유익한 것인지 모르겠다.

역마살이 낀 나의 발을 그나마 붙잡아 두고 있는 
이 코로나 역병의 때를 잘 선용하여 
그동안 덮어두었던 책들을 많이 읽으며
또 자칫 피상적으로 읽었던 성경의 말씀들도 
더 깊이 침잠하여 읽으리라는 마음으로 
오늘의 말씀 요한복음 17장을 편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17:1]
...........

보통 우리가 예배의 순서에서 드리는 
주기도문은 정확히 말하면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문"어야 하고 
오늘의 말씀에 나오는 기도문이
진정한 주기도문 곧
주님이 드리신 기도문이 되는데 

십자가의 죽으심을 몇 시간 앞두고
제자들과의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고 이어서 
작별강화를 마치신 후 드리시는 이 기도문에서
인간 예수의 진면목을 보게 되는바 
그것은 그가 역사적 인물로써 한 인간 이기 전에 
인간 세상에 내려오시기 전 창세 전부터 
하늘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그 팩트(Fact)가
신비스러운 기도 가운데 고스란히 녹아있는 것을 본다[17:5]

성경이 이 세상에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특히 신약의 복음서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신 계시의 말씀이라고 받아드린다면
이 주님이 드리신 기도문이야말로 
단 몇절에 불과한 기도의 서문만 가지고도 
인간 예수 안에 내재되어 있던 모든 신비가 풀려주고 
밤의 달빛 정도가 아닌 낮의 해빛으로 밝혀주는 것 같은
찬란한 계시의 말씀이며 축복의 말씀으로 받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에서 파생된 한 종단으로써 유니테리언들은
(미국이나 서구에는 이런 반기독교인들이 많이 있다) 

성경이 명백히 보여주는 성삼위 하나님을 부정하며
예수는 단지 존경받을만한 한 인간으로만 여기는데
그들이 역사적 인물로써 예수의 실존을 인정하지만
하나님이 사람으로 성육신하신(Incanation)
예수의 하나님 되심 
곧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며 
여기서부터 그들의 모든 신앙관이 비틀어지는 것 같다.


오늘의 말씀 다섯 구절이 모두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하늘 아버지와 
또 아버지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오시게 된 아들의 대화가
기도 속에 깊이 깊이 녹아 있어서 
바른 성경관과 진실한 믿음으로 이 것을 읽는 독자들에게
진리의 신비스러운 빛 속으로 들어가게 해주며
아들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기 원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실존과 
또 하나님의 본체로서 자신을 내려 놓으시고
인간으로 내려오신 아들(성자 예수님)을 만나게 해준다. 
 
자존자족하신 인간과 만물의 창조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자신을 낮추어 인간 예수로
우리에게 찾아오심을 다시 한 번 밝혀 주고 있는
이 말씀(예수님의 기도)에서 
인간이 가히 이를 수없는 영적 세계와 
우주 삼란 만상의 모든 실타레가 풀려지는 
진리의 빛 속으로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것같다.

이 복음서의 저자 요한이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이 주님의 기도문을 여기 복음서의 끝 부분 곧
예수님의 생애를 마감하고 십자가의 길로 가시기 전
다시 한 번 어둠 속에 치켜든 봉화처럼 밝혀주는 것은

그가 이 복음서를 처음 시작할 때 부터 의도했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이 예수는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인간의 구원자로서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 이시고
우리가 그를 믿어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하는 
영원한 생명의 교제에 들어가게 하시는 축복인 것을 
마음 깊이 우러나오는 감사와 감격으로 받아 드린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