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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당/* 요한복음 *

요한복음 21:1-14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by 朴 海 東 2020. 3. 17.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요한복음 21:1-14


어느 덧 요한복음 묵상도 마지막 장까지 왔다. 
코로나 19로 온 세상의 일상이 정지되거나 비틀어지고 있는 요즘
변함없는 주님의 말씀과 사랑에 내 영혼을 기대고 위로를 삼으며
오늘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생기와 내 삶의 동력이 되게 하고 싶다. 

1. 주님과 함께했던 영혼의 고향. -  아~  갈릴리[21:1a]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하여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시고
헤롯의 살해 위협을 피해 갓난아기 시절 잠시 애굽으로 갔던 것외에
생의 대부분의 날들과 시간을 갈릴리에서 보내셨고 
따라서 갈릴리 곳곳을 손금보듯 환하게 알고 계셨으며
제자들을 비롯하여 지인의 대부분이 갈릴리 사람들 이셨던 것같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생의 대부분을 보낸 장소로써
이 갈릴리에 대한 향수와 조금 더 머물고 싶은 바램은 간절하여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하늘 보좌로 가시기 전
이 세상에 잠시 더 체류하는 40일의 날 들 중 대부분을 
이곳 갈릴리 지역에서 보내신 것으로 추정된다. 

바울의 기록에 의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가장 많았던 때가 오백여명 이었다고 한 것을 보면 [고15:6]
아마 그 대부분은 갈릴리 사람들 이었고
이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시게 될 때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 근교 베다니 감람산까지 따라와
하늘로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배웅한 것으로 추정하게 되는데 
그 때 천사가 말하기를 "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너희 가운데 하늘로 올리우신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대로 다시 오시리라고 하였기 때문이다[행1:11]

아마 예수님은 지금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시면서도 
이 땅에 계셨을 때 그의 마음과 발걸음이 곳곳에 머무르셨던
갈릴리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을 많이 가지고 계실 것인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직후에도 그러하여서 
그 날 아침 빈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에게 당부하시기를 
제자들에게 가서 말하기를 내가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니
거기 갈릴리에서 우리가 만나자고까지 하신 것을 본다.[마28:7. 10]

따라서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 휘날레를 장식하는 21장의 이야기가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진한 향수가 배어 있는 
이 갈릴리를 배경에 두고 전개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리라.
 
그러나 이 복음서의 저자 요한이 주후 90년경 지난날을 추억하면서
여기 갈릴리 바닷가에서 주님과 자신들 7명이 다시 만났던 것은
단지 잊지 못할 추억의 장소로써 뿐 아니라  
부활하신 후 주님께서 자신을 세 번째로 나타내셨던 
여기 갈릴리에서부터 잠시 흐트러졌던 베드로와 자신들이 
여기 주님을 처음 만났던 갈릴리에서 부터 
다시 회복되고 다시 사명에 붙잡히며 오직 주의 사랑에 메어 
당시 로마제국으로 상징된 세상을 향하여 나가게 되는 
시발점이 된다고 하는 점에서  여기 갈릴리 바닷가에서 
다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것은  깊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다. 

2. 자기를 나타내시는 예수님.[21:1. 14]

오늘의 말씀을 몇 번이고 읽어보면서 가장 마음에 닿아지는 구절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다고 
세 번이나 강조하는 "나타내신 것이라"는 구절의 말씀이다.[21:1. 14]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기 전에는 자신들과 같은 육체를 가지셨기에
언제 어디서고 찾아가서라도 만날 수 있었지만 
이제 부활하신 주님의 영체[부활체]는 이전에 제자들이 아무 때나
시도 때도 없이도 만날 수 있었던 그 주님의 몸이 아니시어서
이제는 주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주지 않으시면 만날 수 없는 관계인데 

AD 30년 유월절이 지나고 보리 추수의 시기[맥추절]이 가까 오는 무렵
예수님이 자신들을 찾아오셔서 자신을 나타내주시고 만나주시는 
이 갈릴리 바닷가의 만남은 주님의 승천을 앞두고 뜻 깊은 만남이 된다.

이처럼 자신을 나타내주시고 만나주심이 아니면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그 상처 난 가슴을 그대로 안고
남은 인생을 실패자로 살 뻔 하였고 이것은 다른 제자들에게도 동일하였다
그러나 주님은 자기에 대하여 깊은 죄책감과 상처를 가지고 있는 제자들을
그대로 두시고 하늘로 오르시기에는 마음이 너무 여리신 분이시다.

처음 그들을 갈릴리 바닷가에서 만나셨을 때 "너희가 나를 따라오면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약속하셨는데 [마4:19]
이 약속이 무효가 되고 제자들을 실패자들로 남겨두고 떠나시기에는  
그의 큰 사랑의 가슴과 전능성이 이상태 그대로를 용납하지 않으신다.

3.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21:3]

그래서 주님은 처음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의 장면을
다시 재현이나 하시듯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한 제자들의 빈 배와 
그리고 어쩌면 빈 배보다 더 허허로운 가슴을 가진 그들을 찾아오셨다.

적용하기

4.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21:6]

주님께서 자신을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내신 방법은 3년 전
제자들을 처음 부르셨을 때의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방법을 쓰셨는데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물어보시고
"그 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셨고 [21:6]
또 실제로 그물을 끌 수 없을 만큼 많이 잡게 하셨는데[[눅5:6. 요21:6]
3년 전의 일을 떠올리게 하는 주님의 이러한 말씀과 포퍼먼스는 
요한에게 주님을 알아보게 만드는 인싸이트[영적조명]이 되었고
그래서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5. 요한과 베드로 두 사람의 차이[21:7]

부활하신 날 새벽 여인들이 알려준 빈 무덤을 향해 달려갈 때도
요한이 먼저 달려갔지만 덤 입구에서 
잠시 생각하며 주춤하고 있었을 때[선 사고 후 행동 ]
베드로는 뒤늦게 도착하여 생각하고 말고 할 것 없이 
서슴없이 무덤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선 행동 후 사고]
여기 갈릴리 바다 고기잡이배에서도 그러하였다. 

요한이 던진 "주님이시라"는 말에 베드로의 가슴은 벌렁거렸고
순간의 지체도 없이 주님께 빨리 가려고 물속으로 뛰어든 것을 보면
그가 비록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어도
여전히 그는 주님을 사랑하는 제자이며 
또 이런 베드로를 모를 리 없는 주님은 
그의 상처 난 가슴을 치유 회복하고 사명에 세우시기  위해 
이렇게 찾아오신 것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조용하지만 발동이 쉽게 걸리지 않은 요한이라는 제자,
그리고 쉽게 행동으로 옮기지만 사려 깊지 못한 베드로 
어찌 보면 도무지 하나 될 수 없을 것 같은 
이런 제자들의 성격 차이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초기 교회를 위해
이들의 남은 생애와 사역을 아름답게 사용하셨다.

요한이 이 복음서를 쓸 당시 
그들이 처음 주님께 부름 받았을 때의 모습처럼 
베드로는 초기교회 수장이 되어 그물을 던지는 사람처럼 복음을 전하다 
자청하여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교로 주님 앞에 갔고
요한은 뚫어진 그물을 깁는 사람처럼 모든 사도들이 순교하고 떠난
초기 교회에 늦게까지 남아서 [로마제국의 핍박으로 힘든 그 시대]
사랑으로 매만지고 치유 회복시키는 사람으로 이 복음서를 쓰고 있다.

주님은 오늘도 그가 머리가 되시는 우리들의 교회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을 그들이 천래적으로 타고나는 성격과 
또 그가 주신 은사를 따라 사용하시는 분이시다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을 수 없는 다양성 가운데서도 오직 주님 때문에 
연합과 일치를 이룰 수 있는 것은 그의 영[성령]의 하나 되게 하시는 역사이다.
 
6. 153의 축복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21:10]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좇아서 그물을 던져 잡은 물고기들은
모두가 작은 물고기도 아니고 큰 물고기만 153마리라고 했으니
밤새도록 빈 그물질로 허탕을 쳤던 것을 생각하면
그들은 주님의 신적 능력 앞에서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그러나 물고기를 가득 채운 그물을 통째로 끌고 온 것 보다 더 큰 감동은
주님께서 자신을 이렇게 나타내심으로 
제자들 자신들이 처음 부름 받았을 때의 장면처럼 
이 모든 물고기보다 더 크고 소중하신 주님을 다시 깨닫고 만난 것이다. 

그들은 다시 생계를 위한 고기잡이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로써 주님의 부르심 앞에 다시 선 것인데 
이젠 물고기나 생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 오직 예수! 
그리고 그가 자신들에게 기대하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것만이 
자신들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소명이며 부름인 것을 확인한 것이고
이것은 요한복음을 마감하는 주님과 베드로의 사랑의 문답에서 
다시 한 번 제자들 모두와 오늘 이 시대에 그의 제자가 된 
나에게까지도 나의 신앙과 삶을 되돌아보게 하고 재정립시키는 말씀이다.


7. 주님이 마련하신 해변의 식탁- 와서 조반을 먹으라[21:8.12]

제자들이 밤새도록 갈릴리 바다에서 빈 그물질로 심신이 피로했고
바다에 어둠이 물러가고 여명이 찾아와 새벽녘이 되었을 때는 
그 피곤함은 더 하고 배도 심히 고팠을 것인데 
이러한 그들의 생리와 사정을 다 파악이라도 하시는 듯 
주님께서 밤바다에서 돌아온 그들을 위해 해변의 식탁을 마련하셨다

거기 그들의 추운 몸과 젖은 옷을 말릴 수 있는 모닥불을 피어놓으셨고
또 어디서 구해 오셨는지 떡을 굽으셨으며
방금 잡은 물고기도 불에 익히도록 가져오라고 하시며 
이제 막 갈릴리 바다 수평선에 떠오른 아침 햇살 아래서 
주님과 제자들만의 아름다운 식탁의 향연을 연출하신다.

와서 조반을 먹어라!
이 얼마나 다정하신 주님의 부르심인가?

밤새도록 어두운 밤바다에서 몸도 마음도 지치고 배가 고파진
제자들의 상태를 다 아시고 
친히 해변의 모닥불과 떡과 방금 잡은 생선도 구어 주시는 
이 다정하신 주님의 마음과 손길은 
오늘도 이 거친 세파에서 영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심신이 지친
나 같은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베풀어주시는 사랑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렇게 심신이 지친 제자들의 몸을 덥혀주시고
허기진 배를 채워주시며 훈훈한 분위기를 만드신 것은 
그 다음을 위한 포석으로 이해하게 되는데 
이것은 이어지는 말씀에서 
베드로와 나누는 사랑의 문답에서 보게 되는 것처럼 
먼저 심신이 피곤하고 지쳤으며 배가 고픈 상태에서는 
더 깊은 마음의 이야기[사랑의 문답]으로 나갈 수 없는 
제자들 곧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아시고 이해하심에서 나오는
주님의 사려 깊으신 사랑의 배려에서 나온 것임을 넉넉히 헤아리게 된다. 

주님!
2020년 3월 17일 아침 오늘의 말씀을 펴고 묵상하면서 
갈릴리 바닷가에 제자들을 찾아가셨던 
주님의 그 깊은 사랑의 마음이 내 안에도 읽혀집니다.
치유와 회복 그리고 새로운 사명에 세우시기 위해 
찾아오신 주님의 그 발걸음과 자비하신 사랑을 기억하며
나도 오늘 여기 힘든 세상에서 주님을 의지하여 굳게 서게 하소서. -아멘-

---------박해동 선교사 신간 도서 "이사야" 소개---------

오는 4월 12일 영광의 부활주일을 앞두고
3월 사순절 기간을 지나는 동안 읽기 좋은 책
박해동 선교사의 "이사야" 묵상 집을 소개합니다. 

지금까지 나온 책 
창세기/마태복음/요한계시록 로마서/갈라디아서에 이어 
이 달에 출간하는 책 이사야는 이번 주간 주말에 출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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