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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당/* 요한복음 *

요한복음 21:15-25 네가 날 사랑한다면 내 어린 양 먹이라!

by 朴 海 東 2020. 3. 18.

네가 날 사랑한다면 내 어린 양 먹이라!

요한복음 21:15-25


엊그제 아들네가 손녀를 데리고 방문하러 왔다가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으니 
가능한 시장에도 가지 말라하며 찬거리를 많이 사주었다.
오랜만에 손녀와 함께 있는 시간이 행복하고 좋았다.

그리고 어제 아들네가 떠나고 난 우리 집 거실에
그동안 봉오리로 맺혀있던 군자란이 꽃을 활짝 피었다.
해 마다 춘분이 가까워오는 이맘 때 쯤이면
주황색 꽃을 피우는 군자란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
세상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우중충한 가운데서도
변함없이 세월은 흘러 봄은 어느새 우리 곁에 와 있다. 

2020년 3월 18일 
오늘의 말씀 묵상을 위하여 창가 앞 책상에 앉았다
요한복음 21장, 베드로를 향한 주님의 사랑의 문답이다. 

중국사람들은 사랑을 확인하고 물을 때
사랑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냐고 묻는다
진실한 사랑에는 깊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다의 표면은 항상 흔들리고 요동하는 것 같아도
바다 속 깊은 곳 심해엔  흔들리지 않는
정중동[靜中動]의 바다가 있는 것처럼
그런 사랑의 깊이까지 들어가고 싶은 것 일게다.  

베드로가 비록 위협적인 분위기 때문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변절한 것 같아도 
주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 속 깊은 곳엔
변할 수 없는 사랑이 있음을 주님은 아셨다.

주님을 부인하고 난 후 
자신감을 잃어버렸고
자기 자신에 대해 실망감이 큰 만큼
상처도 깊이 페인 그 베드로를 
주님은 그냥 놔두시고 승천하실 수 없었다. 

그래서 주님은 지난 날 제자들과 함께 했던
아름다운 추억의 향수가 짙게 베인 갈릴리 바다를 찾아오셨다
그 바닷가에서 베드로의 상처 난 마음을 싸매시고 어루만지며
다시 새로운 출발선상에 세우시고 새로운 소명에 세우실 터였다

1. 분위기 메이커 예수님

젊은이들이 교회에서 수련회 장소로 가게 되면
서로에게 익숙하지 않은 형제자매들을 가까이
상대하게 되는 것 때문에 경직될 수가 있는데 
이럴 때 재치 있는 사회자가 꺼내드는 빅카드는
아이스 브레이크(Ice -Break) 이다
좀 냉랭한 분위기를 따듯하고 부드럽게 만드는
게임이나 활동 같은 것인데 상당히 효과가 있다.

예수님이 일곱 제자가 밤새도록 고기를 잡고 있는
갈릴리 바다를 찾아왔을 때 그들은 밤새도록
한 마리 고기도 잡지 못하고 헛 그물질만 반복했기 때문에
몸도 마음도 지치고 피곤하며 허기진 상태에 있었다. 

예수님은 이들이 허기지고 몸이 피곤한 상태에서는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먼저 제자들의 젖은 옷과 몸, 그리고 마음을 녹일 수 있는 
모닥불과 음식을 준비하시고 그들을 맞이하신다.
[생선은 방금 잡게 하신 배에서 가져온 것이지만
불을 피우는 나무들과 떡은 어디서 준비해 오신 것일까?]

이렇게 더 깊은 것을 나누기 위한 준비 단계로써
좋은 분위기를 만드는 예수님의 이 모습은
오늘 우리 가정/교회/공동체에서 꼭 배워야할 모습인데 
너무 영적인 것을 중시한 나머지 
육신적인 필요를 무시함은 지혜로운 처사가 아닐 것이다.
영과 육의 적절한 분배와 아름다운 조화는 필요한 것이며
더 중요한 영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느 정도
육신적인 필요도 균형을 이루어야 함을 여기서 배운다.


2. 사랑의 문답: 
진정한 치유를 위하여 상처를 건드리시며
용서와 사랑의 증표로써 자기 양을 맡기시는 예수님:

따뜻한 모닥불 앞에서 젖은 몸과 옷을 말리며
주님이 준비하신 음식으로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포만감이 들었을 때 
주님께서 베드로를 향하여 물으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더 정확한 질문은 너는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너는 더 많이 더 깊이 나를 사랑하느냐고 하심이다. 
(지난 날 그는 제자들의 우열다툼에서 항상 선봉에 서고 싶었고
그래서 다른 사람은 다 주님을 떠나도 나는 감옥 에도 죽음에도
항상 주님과 함께 갈 것이라고 장담하지 않았던가?)

먼저 행동하고 생각은 늦게 따라오는 선행동-후사고형 베드로는
주님의 이 질문에 대해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고 자신있게 대답했다
두 번의 질문까지는 그렇게 생각 없이 답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세 번째 질문으로 
이번에는 아가페적 사랑이 아닌 친구 간의 우정으로 낮추어 
필레오적 사랑으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을 때 
그동안 아무 생각 없이 자신 있는 말을 되풀이했던 그의 마음에 
얼마 전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기억이 떠올랐고 
그래서 그의 마음이 근심으로 눌렸으며 
주님께 향한 자신의 사랑의 깊이와 진실을 주님께 맡기며
아무 것이라도 모르는 것이 없으신 주님은 아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라고 고백한다. 

베드로가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상처이지만 
그 상처를 그대로 놔두면 상처가 더 깊은 상처가 될 것이기에 
주님은 베드로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상처로 남은 그 기억을 
끄집어내시며 터치하심으로 진정한 치유의 길로 이끄셨는데 
그 것은 베드로를 향한 온전한 용서와 사랑의 표시로 
세 번 사랑의 문답을 하신 것처럼 
그 때마다 세 번 주님의 양을 맡기고 위임하는 말씀을 주신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하는 상대방이 마음에 상처와 아픔이 있는 한
자신도 평안할 수 없는 것이며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에게서 드러난 행동을 따라  
그를 판단하고 계산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포용하고 믿어주며 굳게 세워주는 것임을 
베드로를 향한 주님의 사랑에서 배운다. 

주님은 베드로와 나눈 이 사랑문답을 통해
오고 오는 모든 시대에 이 땅에서 주님을 따르며 섬기게 될 
우리[나]에게도 동일하게 상대하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신다.

지난 날 베드로보다 더 많이 주님을 실망시켜 드렸고
주님의 제자라 할 수 없는 부끄러운 나의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렇게 주님 앞에서 설 수 있음은
내가 죄로 얼룩진 내 자신의 모습과 상처 때문에 
주님에게서 멀리 도망친다 하여도
갈릴리 바다로 찾아가신 주님은 
세상 끝까지라도 찾아오셔서 
결코 나를 놓아주지 않으실 분이신 것을 알았기 때문이며 
이것이 곧 끊을 수 없는 주님의 사랑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롬8:35]

주님!
베드로에게 세 번째 사랑을 물으셨을 때
베드로의 마음을 무겁게 눌렀던 근심처럼
제 마음도 그러합니다.
주님을 실망시킨 죄가 너무 크고 많아서  
감히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는 죄인이지만 
베드로처럼 저도 주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마음으로
보잘 것 없는 내 사랑의 고백을 주님께 드립니다.
주님의 온전하신 용서와 사랑에 대한 감사로
주님께 속한 양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제가 되게 하옵소서.


3. 주님의 위임: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AD 90년경 요한이 에베소에서 이 복음서를 기록했을 때
당시 기독교는 로마 공동체와 예루살렘 공동체 그리고
에베소 공동체로 크게 나뉘어 있었던 것 같으며
이들 공동체 사이에는 은근한 경쟁 심리도 있었던 것 같다.

요한은 베드로가 수장이었떤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와 
요한 자신이 수장으로 사역한 에베소 교회 공동체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비교의식과 경쟁관계를 불식시키기 위해
이 복음서의 마지막 장을 부록으로 첨가하여
초기교회의 수장으로 쓰임 받다 주님 앞에 먼저 간 
베드로의 위상을 높여주고 세워주는 것처럼 보인다.

예수님께 대한 베드로의 부인은 다른 복음서에도 다 기록이 있지만
그의 치유와 회복 그리고 주님의 위탁을 기록한 것은 
요한복음에만 나오고 있는데 요한이 이렇게 기록으로 남긴 것은
당시 로마 제국의 핍박 아래서도 신앙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더욱 베드로처럼 믿음에서 무너진 사람들의 회복을 위해
이 글을 썼다고 생각이 되며 
무엇보다 주님께서 초기교회의 수장으로 세워주신 베드로에 대해
당시 초기교회 성도들이 신뢰를 갖게 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 같다.

오늘의 묵상을 내리면서 마음 깊은 울림으로 닿아지는 것은
주님이 베드로의 과오를 책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시기 위해 찾아오시고 
여전히 믿어주시고 자신의 양을 맡기시는 부탁이다

그리고 이처럼 주님의 양을 맡을 수 있는 자격은
비록 그것이 보잘 것 없는 사랑이라 하여도
“네가 날 사랑한다면 내 양을 먹이라! 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주님의 교회에서 맡게 되는 목양이란 
주님께 향한 사랑의 표시가 
주님의 양들에게 나타나게 함이라는 것을 배우는데
이 사랑의 정신으로 하지 않으면 목회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것처럼
내가 목양하는 성도(양)들 중에도 목회자에게 배신을 때릴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인데 
그럴 때에도 그 성도(양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같이 못난 죄인도 품으시고 사랑해주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내게 상처를 주거나 배신하는 성도라도 품을 수 있어야함을 
네가 날 사랑한다면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는 말씀에서 배운다.

나는 여기 생명의 삶 게시판에 글을 올리면서 
언젠가 주님 앞에 다짐하기를 주님의 양들을 상대하는  
목양의 정신으로 여기 게시판에 글을 올리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러나 때로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나
경쟁 심리도 있었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게 목양의 정신을 다짐하였어도 인간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서로를 볼 수 없는 여기 인터넷 가상의 공간에 글을 올리면서  
어느덧 나도 깜짝놀랄만큼  **년 세월이 지나갔다. 
요즘은 내가 언제까지나 여기 게시판에 머물 수 없는 것이니 
어느 시점에서 퇴장하면 좋을 것인지 가늠해보며 기도하고 있다

비록 여기 게시판이라는 곳이 
눈앞에 볼 수 있는 양들이 하나도 없고
또 이 목양의 글에 반응을 나타내주는 사람들이 없더라도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부탁하셨고 
또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종들에게 부탁하신 것처럼 
오직 주님을 사랑하는 이 한 가지가 
목양의 자격이고 조건이라는 말씀을 붙잡고 
내 눈 앞에 아무 양도 볼 수 없는 여기 게시판이라도
나에게 허락된 그 날까지 목양의 글을 써나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주님!
진실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여기 게시판에 목양의 글을 쓸 수 있게 하시고
이 글을 통해서라도 은혜 받는 주님의 양들이 있게 하시며
오직 주님의 이름만 그리고 주님께만 영광이 돌려지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