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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당/예레미야

예레미야 39:1-18(2) 예루살렘 멸망의 날이 주는 교훈

by 朴 海 東 2020. 10. 5.

예루살렘 멸망의 날이 주는 교훈

예레미야 39:1-18(2)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던 날 BC 587년 4월 9일 
마침내 집중적으로 공략한 성벽 한쪽이 뚫렸고
바벨론 군사들은 성안으로 물밀듯이 밀어닥쳤다 

이미 1년 6개월 동안 포위되어 버티는 동안
성안 비상식량 급식소의 떡이 떨어진지 오래고
기근이 심하여 아사자들도 많았으며 [38:9]
전염병이 돌아 쓰러진 자들도 많았다[38:2]

바벨론 왕의 모든 고관들이 나타나 성안 중문에 앉았을 때
이미 더이상 항복은 필요하지 않았고 요구도 하지 않았으며  
유다왕국은 끈질긴 저항에도 불구하고 바벨론의 수중에 떨어져 
이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서운 보복과 살육 뿐이었다. 

완전 정복을 위해 뒤처리를 하는라 시간이 지체된 그 날밤 
시드기야 왕과 그를 따르는 군사들은 몰래 성읍을 벗어나
애굽으로 가기 위해 아라바길- 여리고 쪽으로 도망 했는데 
바벨론의 추격대가 끝까지 쫓아와 여리고 평지에서 따라잡았다.

시드기야는 사슬에 묶여서 지금 하맛 땅에 원정을 나와 있는
느브갓네살 앞으로 끌려갔는데 진즉 항복하지 않고 너무 오래 끈 
유다 왕에 대한 분풀이로 시드기야의 눈앞에서 그의 아들들과 
그의 측근 신하들을 죽였다. 그리고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은 
자신이 세운 왕 시드기야의 반역을 무섭게 다뤘는데 
그냥 단칼로 베어 쉽게 죽도록 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형벌로써 
그의 두 눈을 빼어내고 사슬로 묶어 바벨론으로 이송하였다.[39:7]

그리고 그날 군사들은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과 백성들의 집을 불태우고 
성벽을 헐어냈으며 성안에 남은 자들을 포로로 잡아갔는데 
이미 1차 포로가 3,023명 이었고 2차 포로가 832명 이었으며
완전 정복이 이루어진 3차 포로가 745 명이라 하니[렘52:28-30]
이미 대부분 백성들은 난리를 피해 성읍 밖으로 도망간 것 같다. 

바벨론의 승전 뒷 처리는 사령관 느브라사단이 맡았는데 
그는 (토색으로 부하게 된 자들의) 부동산을
아무 소유가 없는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어 
그들이 토지와 포도원을 경작하도록 그 땅에 남게 하고
또 특별히 그는 느브갓네살의 왕명을 받아 예레미야를 보호하여
이전에 그를 위협에서 구명해준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맡기게 된다

오늘의 말씀 마지막 구절은 예레미야가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그를 구명해준 또 한 사람 구스인 예벳멜렉에의 이야기로 마치는데 
이 대목은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갇혀있을 때 
에벳멜렉을 위해 받은 말씀으로 38:13절에 연결시킴이 더 좋을 텐데
굳이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은 예루살렘 함락의 날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자신과 
구스인 환관 에벳멜렉에 대해 하신 구원 보장의 말씀이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증명하는 뜻으로 여기에 이렇게 기록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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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멸망의 날과 관련된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는 내 마음에 
낭랑한 울림으로 닿아지며 묵직한 교훈으로 남겨지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 은혜의 손길을 거두시고 멈추실 때 
얼마나 무서운 결과로 이어지게 되는가를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다윗에 의해 준비되었고 솔로몬에 의해 건축된 예루살렘은 
얼마나 아름답고 장엄한 성전이며 상아 궁전이었던가!

또 그 성벽은 솔로몬에 의해 축성되고 히스기야에 의해 보수되어 
얼마나 견고하게 잘 버티어 주던 예루살렘 성벽이었던가!

그러나 다윗의 시대로부터 413년간 이어져 온 
이 시온의 도성 예루살렘이라 하여도 
그동안 누적된 죄악과 회개하지 않는 교만으로 
하나님께서 비추어주시던 은혜의 얼굴을 돌리시고 
하나님께 장중에 잡으셨던 은혜의 손길을 거두셨을 때 
영광의 도성 시온 산성 예루살렘이라도 무너지고 폐허가 되었다. 

예레미야보다 3세기 앞서서 예루살렘 파멸의 날을 예언했던
이사야의 예언이 오늘의 말씀과 매치 되어 떠 오른다.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 그리 창기가 되었는고
공평이 거기 충만하였고 의리가 그 가운데 거하였더니
이제는 살인자들 뿐이었도다
네 방백들은 패역하여 도적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물을 구하여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치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치 아니하는도다.........
내가 장차 내 대적에게 보응하며 내 마음을 편케 하겠고
내 원수에게 보수하리니...... 그러한 후에야 
네가 의의 성읍이라 신실한 고을이라 칭함이 되리라[사1:21-27]

적용하기

예루살렘 멸망과 관련된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한 나라와 도시의 건재는 
얼마나 아름답고 견고하게 잘 지어졌냐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 도성을 향하여 
그의 자비로우신 얼굴을 돌리지 않으시고 
여전히 비추어주시는 은혜의 손길에 달려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예루살렘의 멸망과 관련된 주전 6세기의 이야기가 
오늘 우리 조국 대한민국과 무슨 관계가 있으며
우리의 수도 서울 도성과 무슨 관계가 있고
이 글의 독자인 나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여호와의 눈은 (오늘도)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나라들)을 향해 
그의 능력을 베푸신다고 하셨다..[대하16:9] 

오늘 우리 조국 대한민국과 각 도시에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토록 원하셨던 
의와 공평과 정의가 강같이 흐르고 있는가?
오늘 우리 사회는 힘없는 약자들의 송사를 신원하고 있는가?

오늘 이 땅에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 받는 주의 백성[교회들]은
주님이 주신 명예로운 선언처럼 소금이며 빛으로 존재하는가?

요즘 북한에 의해 사살된 해양수산부 한 공무원의 이야기로
온 나라가 시끄럽고 연일 언론을 도배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우상숭배와 독재로 얼룩진 저 악랄한 북한을 
멸하셔도 벌써 멸하셨을 텐데 아직도 존재하게 하시며 
끓는 가마솥의 기울기처럼 우리를 위협하며  
북에서 남으로 향하게 하고 계심은 무슨 의미인가?

예루살렘 멸망의 날 그동안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부동산을 끌어모았던 사람들의 재산이 다 헛것이 되고
아무것도 없는 자들에게 돌려지게 했다고 
여기 성경에 기록된 것은 무슨 의미로 그리하신 것인가?

바벨론 왕이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고 끝까지 고집부렸던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를 심문하면서  
그의 사랑하는 자식들을 죽인 후에 그의 두 눈을 뽑아냄으로 
그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그의 망막에 찍혀진 영상이
자식들의 죽음으로 남겨지게 하신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제 오늘의 묵상을 내리면서 나는 비록 이 땅에 태어나서 
한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촌부에 불과하지만
내가 주님 앞에서 감히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이유와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배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내가 이 땅에서 살다 언젠가 떠나게 되어
내 눈이 감겨지게 될 때 내가 내 눈으로 목격하게 되며
내 망막에 마지막 영상으로 찍히게 될 장면이 무엇이 될 것인지
이 아침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의 은총을 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