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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당/*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전서 2:10-20(2)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by 朴 海 東 2020. 11. 3.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데살로니가전서 2:10-20

 

2. 애끓는 이별의 아픔도 주님의 손 안에 있다.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적으로 더욱 힘썼노라.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 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2:17-20]-----------

어느 한 도시나 지역에 복음이 들어갈 때
그동안 그 지역에서 왕노릇 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았던 사단의 영역에
비상이 걸리게 되고 
어떤 모양으로든지 방해하게 된다는 것을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바울 전도팀의 선교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런 현상은 바로 앞서 선교했던 빌립보에서도
귀신에 들린 한 여종의 입을 통해서도 나타났고
또 사람에게 들어간 귀신을 추방시켜 준 것 때문에
귀신에 들린 여자를 통해 돈벌이를 했던[행16:19] 
주인들의 반발로(여기서 한 여자를 놓고 여러 주인이 있었다)
바울과 실라는 채찍에 맞고 옥에 갇히는 고통을 당하기도 했다

한 지역에 복음 곧 예수가 들어가면 어둠 가운데 빛이 비치고
어둠에 속한 것들은 당연히 물러가게 됨으로 
사탄은 필사적으로 복음 사역을 방해하게 되는데 

지금 빌립보에서 받은 방해처럼 여기 데살로니가에서 사탄은
시기심으로 끓어오르는 유대인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거의 도시 폭동에 가까운 난리를 일으켰고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는 
거의 반강제적으로 그 도시를 떠나야 했는데 
이것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나 선교사들 모두에게
피차의 아픔이고 고통이 되었으며 
한편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는 시험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사탄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마음속에 섭섭 마귀로 역사하여 
[여기서 사탄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로 사용될 때이고
마귀로 사용되는 것은 성도들을 대적하는 자로서 의미를 담고 있다]

교인들은 선교사들이 자신들에 대한 관심에서 멀어져서 
다시 오지 않는 것이라고 오해한 것 같은데 
이것은 그곳 교회의 대적자들[사탄에게 사주받는 유대인들]이 
성도들과 선교사들 사이에 이간질 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오늘의 말씀 2:17절부터 이어지는 3장 전체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사랑과 관심이
변함없이 얼마나 애타하듯 간절한 것인지 밝히고 있는데 
그중에 특별히 변병 아닌 변명[해명]으로써 
내가 너희에게 한 번, 두 번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우리의 앞길을 막았도다고 알려주며[2:18]

그러나 우리가 잠시 얼굴로는 떠나 있으나
마음은 너희 곁에 있다고 밝히면서 
너희는 우리 주님 예수의 재림의 날에 
우리의 소망이며 기쁨이며 면류관이라고 고백한다.[2:19-20]

이처럼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한 간절함을 참지 못하여
이어지는 말씀에서 바울은 자신은 친히 그곳에 갈 수 없지만
대신 디모데를 보내게 되었다는 것도 밝히고 있다[3:1-2]

적용하기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가장 관심이 가는 것은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는 말씀이다.

이러한 표현은 성경 곳곳에서 나타나기도 하는데 
한 큰 천사가 다니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올 때
바사 국 군대가 막음으로 천사장 미가엘의 도움으로
길을 열어서 왔다는 영적 세계를 통해 표현하기도 하고[단10;13]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성전과 성벽을 건축할 때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아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심하게 반대함으로 
일시적이나 중단되기도 했던 
현실적이며 현상적인 것으로 표현되기도 한다.[느혜미야 4장]

그렇다면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 가고자 했을 때 
사탄은 어떻게 그 길을 막은 것일까? 

혹 그가 몸을 기동할 수 없는 질병에 시달렸던 것일까?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는(고후12:7).
자신이 가진 질병을 "사단의 사자"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아니면 가려고 할 때 마다 유대인들의 방해를 받은 것일까?
[실제로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떠나 뵈뢰아에서 선교할 때 
틈을 내어 데살로니가로 갈 수 있었고 가고 싶었지만 
유대인들이 그곳까지 찾아와 핍박함으로 [행 17:13]
아덴으로 가야만 했고 아덴에서도 다시 기회를 잡아 
데살로니가로 가보려 했지만 이때도 사정이 여의치 않아 
부득이 디모데를 대신 보낸 것을 보게 되는데[살전 3:1-3]

어찌 보면 바울의 길이 막혀지고 막혀진 것이
표면적으로는 사탄이 막은 것으로 나오지만 
궁극적으로 사탄의 이러한 방해조차도 모두
하나님의 장중에서 좌우되는 것으로써 
데살로니가 성도들이나 바울 자신에게 
일시적 슬픔이고 고통으로 작용하였어도 
이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을 엿보게 한다.

사실 바울은 유럽 선교의 첫 문을 열게 되었을 때도
아시아에서 선교의 길이 막히게 되는 것이 계기가 되어
주님이 열어주시는 새길로 가게 된 것이[행16:6-10]
오늘날 유럽의 기독교 문명의 시초가 된 것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한쪽 길을 막을 실 때
반드시 다른 쪽 길을 여시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시는데 
[물론 그것이 당시에는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사탄의 방해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이 환난과 핍박 가운데 태어난 데살로니가 교회에
가고 싶지만 가지 못하는 이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인하여
더욱 기도하였을 것이고 이 기도를 따라 디모데가 대신 가서 
그들을 굳게 세운 것을 보게 되며[3:1-3]
데살로니가 성도들 역시 자신들에게 말씀을 전하여 준 바울을 
얼굴과 얼굴로 대면하여 보지 못하는 것 때문에 
더욱 사모하고 주님께 향하여 간절히 기도함으로 
더욱 순결하고 담대한 신앙에 굳게 서게 된 것을 본다.[3:8]

이제 오늘의 묵상을 내리면서 때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 가운데 서로 애틋한 사랑으로 맺어진 사람들이
혹은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떠나보내게 되거나 
혹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있어야 하는 외로움과 슬픔에 있을 때

우리를 더욱 가깝게 만나주시고 
슬픔 속에 기도의 영을 부어주시며
우리를 더욱 순결한 신앙으로 빗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따라서 신앙의 여정 가운데 경험하게 되는 
슬픔도 아픔도 보고 싶은 그리움도 모두 
슬프도록 아름다운 신앙으로 우리를 빗으시는 연단이 될 수 있다.

나도 내가 살아온 지난날을 돌이켜 볼 때
그나마 지금 이만한 신앙이라도 유지하고 있음이
기쁘고 즐거웠으며 안정되고 평안함 가운데서 보다 
내가 군 생활 중에 힘들게 보내고 있었을 때
그리고 사회에 나와 생계를 위해 배를 타고 
가족을 떠나 차겁고 시린 겨울 바다만큼이나 
가슴 시리도록 아픈 이별의 아픔을 반복하며 살아갈 때 
더욱 기도하게 하시고 하나님 중심에 세워주신 것을 깨닫게 된다

바울과 데살로니가 성도들 사이에 
에게해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만나고 싶지만 만날 수 없었던 슬픔과 고통은
굳이 지형적으로 떨어져 있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바울의 고백처럼 사탄이 막은 방해였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슬픔도 아픔도 모두 기도로 승화시키고
더욱 주님을 바라보게 만들어서 
더는 아픔도 슬픔도 이별도 없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게 하는 
아름다운 신앙에 세우게 하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에 흐르는 주요한 메인 교훈이 
주님의 재림과 관계된 것을 보면서 더욱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기도하기

오늘의 말씀에 나타나는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 사이에
다시 만나지 못하는 이별의 아픔은 오래 가지 아니하였고
마침내 바울의 제3차 선교 여정 가운데 
다시 재회의 기쁨을 누리게 된 것을 엿보게 되는데[행20:1-2]
바울은 그의 선교팀과 함께 3개월 정도를 
마케도니야 지역에서 머물면서 데살로니가 성도들과도
충분한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을 것으로 예상된다.[행20:3A]

주님!
여기 세상에서는 
우리가 다시 헤어지지 않는
영원한 만남은 없습니다. 

우리는 만났다가도 다시 헤어지고
이별의 아픔과 슬픔을 맛보기도 하며
때로는 더 이상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영원한 이별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주님께서는 우리가 인생고락간에 경험하는 
이런 모든 슬프고 아픈 사연들도
모두 우리 영혼에 유익하도록 역사하시고
주님의 위로와 평안으로 채우시며
우리를 더욱 성숙케 하시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이별의 아픔들은
더 이상 이별도 슬픔도 아픔도 없는
영원한 주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하며 
주님이 오시는 그 날을 사모하게 합니다
마라나타! 주님! 속히 오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