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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당/*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전서 5:1-11(2) 깨어 정신을 차리고 주의 오심을 대비하라

by 朴 海 東 2020. 11. 7.

깨어 정신을 차리고 주의 오심을 대비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1-11(2)

 

[데살로니가에 대한 역사적 배경]
데살로니가는 마케도냐 지방의 주요 도시며 전략적 요충지다. 
알렉산더 사후 가장 강력했던 마케도니아의 안티오코스 1세가 
제국의 재통일 꿈꾸었으나, 네 명의 장군이 이끈 연합군에게 
패배하자 제국은 넷으로 갈라진다 (B.C 301년 입소스 전투)

ⓐ카산드로스 : 마케도니아 본토와 왕국의 서쪽.
ⓑ리시마쿠스 : 소아시아와 트라키아와 그 북쪽부분
ⓒ셀레우쿠스 : 시리아와 동방 영토의 대부분 
ⓓ프톨로메오 : 팔레스타인지역과 이집트를 각각 차지했다.

이 네 명의 장군 중에 카산드로스가 가장 강력했는데 
그는 알렉산더의 이복 누이인 테살로니케와 결혼하는 동시에 
에게해로 진출하는 항구 도시를 건설했으며  
그 도시의 이름을 그의 아내 이름을 따서 테살로니케라고 지었다.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 가운데 
가장 먼저 떠오르는 주제는 "주님의 재림"이다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예수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에게 
주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용기와 소망을 주시는 메시지에서
오늘의 말씀은 깨어 정신을 차리고 주의 오심을 대비하라 하신다. 

1.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임하리니 [5:1-4]

The Lord is coming soon at the door!
[주께서 곧 문 앞에 당도하고 계신다.]

“심판의 주께서 곧 당도하시라”는 이 말씀을 접하면서 
내가 보았던 영화 “쇼생크 탈출”의 한 장면이 떠오르는데
이 구절의 말씀이 악명 높은 쇼생크 교도소의 소장실 벽에 
그러니까 소장이 자신의 집무실 벽에 만든 비밀금고 문짝에
쓰여 있는 것이 내게는 무척 강렬한 인상으로 닿아졌다. 
The Lord is near, right at the door! [마24:33]

아마 이 영화의 감독은 교도소장 노튼의 위선적인 신앙을 
풍자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금고 문에 이 문구를 표시한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악명높은 교도소장 노튼은 간수장 헤리스를 
자기 심복으로 삼아 죄수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멋대로 죽이면서도 
자신은 가장 경건한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죄수들에게 
신앙을 강조하면서 뒤로는 죄수들의 노동력을 착취해 돈을 벌고 
그 돈을 은행가 출신 앤디 듀프레인을 시켜 돈 세탁을 하며
그 장부를 비밀금고에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쇼생크 교도소에서 평생 나가지 못할 것을 예견한 
은행가 출신 앤디 듀프레인이 무려 20년 동안 준비한 
쇼생크 탈출을 시도하고 그의 비리를 신문사에 알리게 되는데
그를 체포하기 위해 지역 검찰과 경찰들이 출동했을 때 

그는 이 비밀금고 안의 자기 재산 장부를 확인하기 위해 
금고의 문을 열어보게 되는데 그 금고의 문에 쓰여있는 글씨
곧 “심판의 주께서 곧 문 앞에 당도하고 계신다.”가 곧
자신의 현실로 닥쳐진 것을 직감하게 되며 
자신을 체포하러 온 사람들을 창밖으로 내다보면서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으니 
자신의 거짓된 삶과 부를 쌓음이 모두 물거품이 된 것이다.

따라서 오늘 주신 말씀이 강조하는 것은 
“그날이 너희에게 도적같이 임하리니
너희는 자지 말고 깨어 정신을 차리라!”가 강조되고 있는데[5:6.8]

여기서 잔다는 것은 마치 심판의 날이 없는 것처럼 사는 것으로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거짓되며 방종하게 사는 것을 의미하며
깨어 있다는 것은 심판의 날을 의식하고 경건한 삶을 추구함이다.

왜 깨어 있으라고 하는가?
주님께서 재림하실 그 날과 시를 알려주지 않으신 것 때문인데 
미리 알려주면 옥석을 분별할 수 없음같이 
가짜 신앙과 진짜 신앙을 구별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다시 오실 날을 알려주지 않으신 것 때문에 
기다리기가 힘들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이것이 옥석을 분별하기 위한 주님의 지혜에서 나온 것인 줄 알아
내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하루, 하루의 연장이
주님을 기다리는 정성으로 차곡 차곡 쌓아가면서  
주님을 만나는 그날에 닿아지도록 살아갈 것이다.

언젠가 신학교 채풀 시간에 노 교수님의 설교 제목이
“혹 오늘인가?” 였는데 
나도 이런 기다림으로 영적 긴장의 끈을 풀지 않고
오늘도 어제처럼 
그리고 내일도 오늘처럼 살아갈 수 있기를 마음에 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