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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당/요한1서

요한일서 2:1-11(2) 생명-빛-사랑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by 朴 海 東 2021. 1. 2.

생명-빛-사랑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요한일서 2:1-11

2021년 새해 둘째 날 여전히 바깥 날씨는 차갑습니다
어제는 새해 첫날을 맞아 카톡으로 새해 인사 카드를 보내면서
성탄절 인사를 보낸 것이 불과 며칠 전인데 
또 보내는 것이 받는 이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까 생각되어서
마음에 주저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꼭 보내고 싶은 분들에게 
새해의 기원과 축복을 전했습니다

요즘 모든 것이 기계화되면서 사람들의 마음도 삭막해진 것인지
특별한 절기를 맞아 전자 메일이나 문자로 라도 
마음을 주고받는 일이 예전처럼 그리 자연스럽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런 특별한 날에 라도 나의 열린 마음을 표시하지 못하면
언제 또 할 수 있울까 싶어 올해도 부담을 떨쳐내는 마음으로 
멋진 신년 카드 인사를 보내는 것으로 한 해를 시작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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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으로 들어가면서........]
주님께 사랑받는 그 제자라는 닉네임을 가진 요한이[요21:20]
생애 대부분과 말년을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개척했고 
디모데가 목회했던 에베소 교회에서 보낸 것은 참 특별한 일입니다

그는 언제부터 예루살렘을 떠나 에베소로 가서 사역한 것일까요(?)
할례 받은 유대인의 대표 사도로 일컬어진 베드로조차 유대를 떠나
그의 생애 말년을 로마에서 보내다 순교하게 되는 것처럼
요한 역시 유대를 떠나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에베소로 갔는데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그에게 " 보라! 네 어머니라" 부탁하신 대로
그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를 모시고 에베소로 가서 
에베소 교회를 섬기며 그곳에서 남은 평생을 살아간 이야기는 
초기 교회 이후 속사도 교부들이 남긴 글을 통해 엿보게 됩니다 

지금 묵상하고 있는 요한1서의 말씀도 이곳 에베소에서 썼고
마지막 편지인 요한계시록도 에베소 앞 바다 밧모 섬에서 받아 썼는데
그가 거의 90에 가까운 고령의 나이에도 사랑의 사도로 사역한 것은
초기 교회 이후 교부들이 전해주는바 지금까지 내려오는 정설입니다.

그는 당시 로마제국의 조직적인 핍박이 전 제국을 휩쓸 때에 
모든 동료 사도들이 모두 주님께 부름을 받은 후에도 끝까지 살아 남아서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본 바요 그의 음성을 귀로 들은 바요
예수님 가슴에 머리를 기대기도 하며 손으로 만지 바 된 유일한 목격자로서 
성육신 하신 예수님께 대하여 살아있는 증인이었기 때문에 
교회가 그를 매우 중시하였고 젊은이들이 연로한 그를 부축하여 
한 말씀 가르쳐 달라고 강단에 세우면 그가 항상 전하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리바이블 하듯
"소자들아 서로 사랑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사랑하라" 였다고 하는데 
오늘의 말씀에서도 이 사랑이 주제가 되고 있습니다.

요한이 요한복음과 요한1서에서 특징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는
생명(Life) 빛(Light) 사랑(Love)로써 3L을 형성하고 있는데 
오늘의 말씀 본문에서도 이 색깔을 가진 단어들을 사용하여
주님께서 주신 그 마음의 이야기들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가 전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으로 들어가면서
첫 구절에서부터 잘 이해되지 못하고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는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로 시작하는데[2:1]
그가 여기서 말하는 “죄”의 개념이 무엇인지 의문입니다

이것이 당시 교회에 교묘히 스며들어 분리주의를 주도한  
영지주의자들의 문제를 경계하며 지적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도덕 윤리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것인지 궁금하기만 한데 
바로 앞선 말씀에서 지적했던 죄의 문제와 
또 오늘의 말씀 후반부에서 강조하는 것처럼[2:8-11]
빛 가운데로 나가지 않고 어둠 가운데 머물려는 모든 것들을 
총체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게 됩니다.

앞선 문맥의 말씀(1장)은 생명-교제-기쁨으로 나아가는 구조였는데
오늘의 말씀에서는 생명-빛-사랑의 구조로 이어지며
주님과 생명의 교제를 나누는 사람은 당연히 빛 가운데 거하며
하나님은 사랑이신 것처럼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구약에 나타난 수백 가지 율법과 율례의 조항들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함축시키시고 
이 사랑의 빛을 통하여 무엇이 죄이고 아닌가를 판별하시는데 
오늘 주신 말씀에서도 여지없이 
내가 지금 사랑의 빛 가운데서 행하는 자인지
아니면 내가 빛 가운데로 나가기를 싫어하여 
어둠에 머물고 있는 것은 없는지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이제 오늘의 묵상을 내리면서 최근에 읽고 있는 책으로
헨리 나우웬의 “탕자의 귀향”을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는 렘브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향" 그림을 직접 보기 위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시에 있는 에르미타르 미술관에 가서
1.8 x 2.4미터 대형그림을 충분한 시간을 두고 오랫동안 
그리고 반복적으로 감상한 사람으로써 
이 그림에 담긴 렘브란트의 마음을 읽어내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돌아온 탕아로서 막내아들과 
이 아들을 맞아주는 아버지와 
또 이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한켠에 서 있는 맏아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아버지의 무릎 앞에 자기의 온 몸을 던진 막내아들과
이 아들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는 아버지의 등으로
찬란한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구도를 그리는 것과 반대로
이 사랑의 재회에 동의할 수 없어 
외따로 서 있는 맏아들의 모습은 
어둠 속에 서 있는 모습으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렘브란트가 예수님의 이 유명한 비유를 잘 이해하고
자기의 생각을 이 그림 속에서 음양으로 나누어지는 
빛의 조화로 투영했다는 것을 보면서 
오늘 주신 요한일서 2:9-11절의 말씀과 연관시켜 보게 됩니다.

“빛 가운데 있다고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움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2:9-11 ]

주님!
나는 
언제나 아버지의 집에 거하며
빛 가운데 산다고 하면서도
탕자의 귀향에서 
아버지와 함께 기뻐하지 못하고 
따로 비켜 서 있는 
맏아들이 아니었는지
오늘의 말씀에 비추어 나 자신을 돌아봅니다.

내가 언제쯤이나 
측량할 수 없는 아버지의 사랑에 
내 마음이 닿아질 수 있을까요.

모든 율법을 완성케 하는 
이 사랑의 빛이
내 온몸과 마음을 비추게 되기까지
더욱 자신을 성찰하며
주님의 사랑에서 깊어지고 자라가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