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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당/창세기

창세기 9:18-29 / 실수에 반응하는 내 모습이 곧 나의 성품이다

by 朴 海 東 2015. 12. 1.

 

 
   
 
본  문 |

창세기 9:18-29   

 
제  목 |
실수에 반응하는 내 모습이 곧 나의 성품이다

 

 

 

 

 

 
-----[ 구속사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오늘 말씀의 묵상 ]------

1. 당대의 완전한 자요 의인이었던 [창6:9]
---노아의 실수와 벌거벗은 추태 이해하기 [9:18-21]

인류가 식물을 위하여 사용한 곡물 종자 중 가장 오랜 된 곡물 종자가
밀 이라면 가장 오래된 종자 과일 열매와 나무는 포도와 포도나무라고 한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물 속에 수장된 그 홍수가 지나간 후
노아는 어디서 어떻게 이 포도나무와 열매를 얻은 것일까...

아마 홍수가 시작되기 전 그는 홍수 후에 이어질 다음 세대를 생각하면서
다른 종자씨들과 마찬가지로 포도 열매의 종자씨를 잘 보관하였고
홍수 후에 이 포도 종자를 심어 많은 열매를 거두고 또 포도주도 만든 것 같다

대개 포도나무는 씨로 심겨져 묘목을 얻어 포도나무로 심겨져 열매를 얻기까지
최소한 약 3년 이상의 기간을 필요로함을 고려할 때 오늘의 말씀에 나타난 사건은
홍수 직후의 사건이기 보다 적어도 수 년이 흐른 후에 되어진 일로 보여진다

홍수심판을 앞두고 오랜 기간 구원선-방주를 만드느라 고생했고
또 홍수심판 기간동안 배 안에 갇혀서 힘들고 곤고한 시간들을 보냈던 그에게
그리고 아무도 없는 땅 위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나가야하는 그에게 있어서

힘든 인생살이를 달래고 위로를 얻을 수 있는 포도와 포도주를 얻기 위하여
포도나무 경작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수고의 결실로 얻은 포도주를 마신 것 까지는 좋았으나
너무 과하게 마시어 정신 줄을 놓고 쓰러져
대 낮에 사람들이 들랑거릴 수 있는 자신의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몸으로 쓰러져 버린 것은 실수 중에 실수라 아니할 수 없다.[9:21]

오늘의 본문과 연결된 바로 앞선 문맥에서 당대의 의인이며 완전한 자요
하나님과 동행한 자라고 호칭되었던 그에게서 보여지는 이런 모습은
그가 다른 사람과 달라서 깨끗하고 의롭기 때문에
홍수 심판에서 살아 남은 것이 아니라

그가 당대 의인이며 완전한 자로 살 수 있었던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택하심의 은총이요 그 은혜의 결과라고 생각하게 된다. [창6:8]

2. 다시 이어지는 가인 계열의 사람들 / 죄적 속성의 흐름 이해하기 [9:22]

하나님 앞에서 당대의 의인이요 완전한 자로 살았던 노아의 가족을 제외하고
세상의 모든 것들이 죄악이 심판 되는 날 다 함께 물 속에 수장 된 것 같았지만
아담과 하와를 통하여 인간에게 침투해 들어온 죄악은 홍수 심판으로도 근절되지
않았고 오히려 선택받아 구원받은 노아의 가족과 장막 안에서 다시 꿈틀거리며
고개를 쳐들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오늘의 말씀에서 노아의 아들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보았다는 것 때문에
그 자식 가나안의 시대 이후로 어마 어마한 저주를 받게 되리라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과한 시벌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단지 눈으로 본 것 때문이 아니라 그 이상의 행동이 있었음을
노아가 술이 깬 후 알게 된 일에서 추론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9:24]에서 보여진다
함은 자기 아비에 대해 어떤 몹쓸짓을 행한 것일까......(?)

성경으로 성경을 풀게하는 원리를 따라 같은 구절과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레위기 20:17절 에 대입해보면 하체를 보았다는 말은
성관계 곧 "동성애"를 한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 누구든지 그 자매 곧 아비의 딸이나 어미의 딸을 취하여
-- 그 여자의 하체를 보고 여자는 그 남자의 하체를 보면 부끄러운 일이라
-- 그 민족 앞에서 그들이 끊어질지니
-- 그가 그 자매의 하체를 범하였은즉 그 죄를 당하리라 [레20:17]

구약 성경에서 하체를 본다는 표현은 다만 눈으로 본 다는 범위를 벗어나
성 행위까지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할 때 함이 자기 아비에게 행한 일은
홍수 심판으로도 근절되지 않은 죄악이
여전히 인간의 내면에 흐르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홍수 심판으로도 근절되지 않을 죄악이라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굳이 이렇게 무서운 홍수 심판으로 세상을 새판짜기 하신 것일까....(?)

이미 인간이 범죄한 직후 뱀을 저주하는 말씀 가운데 주신 원시복음 으로써
구원자 "여자의 후손[씨]"이 오심을 통하여 [창3:15]
이 문제는 해결 될 수 있을 것임으로 노아와 그 가족을 남겨 놓으신 것이며

더불어 죄는 반드시 심판 받는 것을 오는 모든 세대에 경종으로 삼을심을
후에 여자의 씨에서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배우게 된다. [마24:37- 39]

3. 다시 이어지는 셋 계열의 자손들 / 하나님 중심의 사람들 [9:23]

노아의 둘 째 아들 함을 통하여 홍수 심판으로도 근절되지 아니한
죄의 뿌리 곧 홍수심판 이전에 강력한 죄의 문화를 만들어 낸
가인계보의 흐름을 다시 보게 되는 것처럼

노아의 또 다른 자식들인 셈과 야벳을 통해 이런 죄적 문화 가운데서도
하나님 중심의 문화를 가졌다가 가인계보에 혼합되버렸던
셋 계보의 흐름이 다시 부활되어 일어나고 있음을 암시받게 된다.

이들은 결코 끊어질 수 없는 죄악의 문화 속에서 하나님 중심이되며
예배문화를 이어갈 사람들인데 특히 셈의 후손들 가운데서 있게될 것을
오늘의 말씀 중 특별히 셈을 축복하는 말씀 가운데서 보여지고 있다.[9:26-27]

4. 믿음의 족장들의 축복과 저주 이해하기 [9:25-29]

성경에는 오늘의 말씀에 소개되는 노아의 축복과 저주 외에도
아브라함,이삭,의 축복과 야곱의 축복과 저주도 있으며 [창49장]
야곱이 한 저주를 뒤집어 놓는 모세의 축복 선언도 있다[신33장]

어찌보면 조상의 축복과 저주 때문에 그 자손들의 운명이 결정 된다는 것이
너무 과한 처사라고 생각 되기도 하는데
대부분은 그 자식들의 성품과 관련되어 나타난 행위에 대해
축복과 저주가 선언되었던 것을 감안 할 때

이러한 선언을 받은 자손들이 변화되어
저주를 축복으로 바꿀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고 있음을 또한 보게 된다.

예를 들면 야곱이 자신의 열두 아들 중 특별히 저주 쪽으로 선포한
르우벤이나 시므온, 레위의 후손들이 이러한 저주를 교훈과 경고를 삼아서
모세의 임종 직전에 저주가 축복으로 선포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특히 모세의 지파였던 레위지파에게서는
야곱이 퍼부었던 저주가[창49:1-7] 엄청난
축복으로 바뀌어져 재 선포됨을 보게 된다. [ 신33:8-11]

그러나 오늘의 말씀에 등장하는 함의 자손들에 대한 저주는 바뀌어지지 않고
그대로 후대에 이어져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대립적 관계로 흐름을 볼때
저주가 축복으로 바뀌는 은혜는
오직 하나님의 백성 된 사람들 가운데서 나타날 수 있는 변화인 것으로 여겨진다

더 묵상할 내용: 함의 자손 가나안에게 내려진 저주의 결과 알아보기

--------[ 오늘의 말씀 교훈과 적용 ]---------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알아보시는 여러 방법들을 성경에서 보게 되는데
어떤 경우 권위의 관계로 세운 사람들의 실수를 통해 그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시고 하나님께 향한 저들의 마음을 판별하심을 보게된다.

예를 들면 오늘의 말씀에서 노아의 실수를 통해
그의 세 자녀들이 어떻게 반응 했는가를 보시고
저들 각자의 성품과 마음에 숨겨진 생각들 그리고
더 나가서 저들의 하나님께 향한 마음까지판별해 내심같이

모세가 이스라엘이라는 광야교회를 이끌고 나갈 때
구스 여인을 아내로 취한 실수 (?)에 대해
모세와 혈족이면서 또한 권위의 질서 관계에 있었던
아론과 미리암의 반응이 가져온 슬픈 결과가 있었고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운 후 첫번 째 발생된 불레셋과의 전투에서
사무엘이 약속 날짜와 시간을 지키지 못한 실수 때문에
그에 반응하는 사울의 성품과 본색을 드러내는 기회가 되었고
사울이 경거망동하게 행한 일로 평생 곁길로 가게되는 사건도 있다[삼상13:8-14]

따라서 오늘의 말씀에 나타난 노아의 둘 째 아들 함의 행동은
비록 그것이 노아의 실수로 말미암아 발생된 사건이지만
그 실수에 반응한 함의 행동을 통해
그의 숨겨진 성품과 죄악의 속내를 드러내는 결과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혈육적 관계나 또는 신앙공동체 내에서
영적 권위의 관계로 세운 사람과 그 사람의 실수에 대해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가는

곧 하나님 앞에서 " 내가 어떤 성품의 사람이며"
또 "내가 바로 이러 이러한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판별 기준이 될 수 있음을 감안할 때

내가 나와 혈육적 관계이거나 혹은 직무적 관계이거나
또는 신앙공동체에서 영적 권위 관계에 있는 사람이거나 간에

그들을 상대하는 처신에 있어
그들이 잘 할 때보다 그들이 실수하고 잘 못할 때
더욱 조심해서 대해야 할 교훈으로써 오늘의 말씀을 받아 들인다.

왜냐하면 상대방의 실수에 대한 나의 반응이
곧 하나님 앞에서 적나라하게 나 자신을 드러내는 모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