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 요한복음 5:10-18
묵상내용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서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과의 충돌은
마치 계란으로 바위치기처럼 무모하게 보였다
성전 청결
사건을 통하여
그 누구도 개혁의 목소리 한 번 내지 않았던
종교 기득권 세력들에 대해여 도전했던 것은
그 자체로써 신선한
충격이었고
예수님 자신의 존재를
예루살렘과 온 유대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는데
더불어 자신의 적을 만드는 계기도
되었으며
이 때부터 예수님은 위험인물로 주시 되었다
더구나 세례요한의 증거를 받아 등장한 것 때문에
세례요한보다 더 높은
인지도를 받게 되고
백성들이 그에게 몰려 든 것은
기득권 세력들에게 미움과 시기를 촉발시켰고
자칫하면 제 명대로 다 살지
못하고
제거되는 사람처럼 될 위험에 처했기 때문에
아버지께로부터 보냄을 받아 아직도 할 일이
많으신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이 분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예루살렘과 유대가 아닌 북쪽 갈릴리에서
초기 사역을 집중할 필요가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의 초기에
갈릴리 사역에 집중하신 것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기도
한데
사망과 흑암의 땅 -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 지역에 빛을 비추기 위함도 물론이다
[마4:13-19]
그러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언제까지 이렇게
갈릴리 사역에만 머무를 수 없음을 아시기에
예수님은 사역의
베이스 켐프는 갈릴리에 두면서도
모든 유대인 남자들이 일 년에 3차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명절 기간을 이용하여
자신이
비켜갈 수 없는 위험한 충돌에 자신을
노출시키기로 다짐하시고 실행에 옮기시는데
요한복음 5장/6장/7장의 시작이 모두
유대인의 절기인 오순절/유월절/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행보로부터 시작되어
유대 종교지도자들과의 충돌로 이어지게 된다.
오늘의 말씀은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친사건이 발단이 되어
안식일 논쟁과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시비로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논쟁과 시비를 논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고쳐 주신 이 중풍병자를 다시 만나
그
사람에게 경고하신 말씀을
짚고 넘어가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 5:14-
See! You are well
again,
Stop sinning
or something worse may happen to you
나는
어제 묵상에서 이 사람이 고침을 받은 것은
그에게서 어떤 믿음을 보았기 때문이라기보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과거 광야 38년을
상기시키는
상징성을 가지고 베데스다 연못가의
많은 병인들 가운데서 특별히 이 사람을 지목하여
고치신 것으로 이해했는데
[신2:14]
혈기마른 병자처럼 생명력을 상실한
유대교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변화를 받을 수 있으며
광야가
아닌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음을
암시하는 상징성으로
요한이 이 38 년 된 이 병인이 치유된 것을
그가 전달하는 계시의 영적
코드로
사용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자신의 믿음으로서 보다
주님께서 의도하시는 어떤 특별한 목적
때문에
고침 받은 것으로 이해하게 되는데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사람을 다시 만나서
그 사람이 병 나은 것에 대한 은혜와
축복을
상기시키고 이 은혜를 잘 유지하라고
말해주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묵상적용
그런데 여기서 또 한 가지 난제에 부딪히는 것은
예수님은 요한복음 9장에서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불행이 그 자신이나 부모의
죄가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하심으로
사람의 질병과 불행이 죄에서 기인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이야기 하셨는데 [요9:3] 왜 여기서는 이 사람의 질병이
마치 죄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말씀하셨는지
궁금하다.
그런데 이 구절에 대한 영어 성경을 보면
죄 짓는 것을 금하는 것을 현재형으로 쓰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지난
38년간 죄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말하기보다는 지금 현재의 죄, 그러니까
그가 어떻게 고침을 받았던지
자신이 고침 받은
그것이 우연하게 된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알지 못하고
지금 감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네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지 못하면
너에게 더 심한 일들이 닥쳐올 수 있는데
여기서 더 심한 것이란
영원한 사망이요, 심판이 아니겠는가 ...(?)
어찌 되었든 이 사람은 자신을 고친이가
예수님인 줄 알았고
유대인[지도자]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리게 되는데
그들은 예수님이 병을 고치신 선한 일에는
주목하거나 관심이 없고
오직 안식일을 범했다는 것에만 집중하여
안식일 범죄자로 물고 늘어진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안식일인 지금 이 순간에도]
일하시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고
하나님을 자기 친아버지라고 호칭하심으로
유대인[지도자]들의 분기를 촉발시키게 되는데
바로 이러한 충돌은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이미 갈릴리에서 유대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실 때
충분히 예견하시고 올라온 일이었다.
아버지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곡해하여 오히려 율법을
사람 잡는 수단으로 활용하며
가련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올가미로 묶고
있던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오만과 오용을 깨트리시고
진정한 아버지의 뜻을 나타낼 필요가 있었으며
자신이 곧 이 율법을 내리신
하나님 자신이며
곧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나타내고자 하셨는데
오직 유일신 사상으로 고착되어있는 유대인들에게
이것은 소
귀에 경 읽기 식이며
계란으로 바위치기같은 정면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자신을
보내사
하라고 하시는 일을 위하여
무모한 충돌에 자신을 내 던지시고 계신다.
본래 안식일 계명이라는 것은
당시
유대사회에서 종/노비로 팔려서 살아가야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인권을 존중하시며 심지어는
농사에 이용되는
소나 나귀 같은
동물들의 휴식과 복지까지 염려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에서 내려진 계명으로써
안식일 이라는
것이
안식일이라는 날 자체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 또는 심지어 동물들을 위해서 내리신
계명의 본질을 몰라서 이
계명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지도자적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도리어 괴롭히고 있었던
당시 유대인[지도자]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예수의 모습으로 내려 오셔서
이 계명의 바른 뜻을 정정해 주시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식민지 통치
아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안식일에 쉬고 싶지만 안식일에 쉬지도 못하고
일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었던 하층민들에게
이 안식일
계명은 도리어 족쇄가 되어서
그들을 죄인으로 몰아갔고
안식일에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만했던
유대 지도층들에겐 이 계명을
빌미로
백성들을 죄인으로 몰아치며
그들 위에 군림하는 법으로 이용했는데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지금[안식일인 그 날]도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심으로 하나님이신 자신을
가난하고 착취당하며 죄인 취급당하는
당시 가난하고 고달픈
대부분의
백성들과 동일선상에
자신을 놓으셨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오늘 내가 이해하는 안식일의 진정한 정신은
어디에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주님 !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와 정신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일부러
안식일에 병인들을 고치시며
선한 일을 행하셨던 주님의 마음을
제가 잘 헤아려 알게 하여 주시고
저도 주님이 가지셨던
바른
안식일 정신에 입각하여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신앙과 삶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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