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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당/* 요한복음 *

요한복음 7:14-24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by 朴 海 東 2015. 12. 7.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요한복음 7:14-24

묵상내용

[오늘의 말씀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자기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카이로스의 시간을 따라가시는 예수님은
이제 이 세상에서 마지막 삶의 마침표를 찍게 되는
6 개월의 시간을 남겨 두고는
마치 섶을 지고 불속에 뛰어드는 사람 같고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사람처럼
자신을 죽이려는 살기가 퍼져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담담히 들어가신다.

이 복음서의 저자 요한은 이제 예수님이 참여하신
초막절로부터 시작해서 이듬해 유월절 까지
6개월 동안의 사역이
여기 예루살렘에 집중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시도가 빈번해서
아직은 때가 아니기 때문에 사역의 중간에
일시 요단강 쪽으로 물러가시기는 하지만
다시 갈릴리로는 돌아가지는 않으시는데

이 6 개월 어간에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예수님과 유대 지도자들 간의 불꽃 튀는 충돌을 보면
예수님은 이미 갈릴리를 떠날 때부터 작심하신 듯
자신을 죽이려는 유대 지도자들과 맞서서
격론을 벌이시는데 그래서 그런지 오늘의 말씀에서도

왜 너희가 나를 죽이려하느냐는 직설적인 표현으로
그들의 완악한 마음을 드러내신다. [7:19]

예수님이 왜 이렇게 반대를 받으며
심지어는 귀신들린 사람이며, 미친 사람으로까지
수욕을 당하고 내몰리게 되는지 이유를 살펴보면
오늘의 말씀을 통째로 아우르고 있는
마지막 구절[7:24절]에서 그 이유가 있는 것 같다.

한 마디로 갈릴리 출신 시골뜨기 랍비에게서
무슨 대단한 것이 나오겠는가 무시하고
외모로 판단하며
막대해도 되는 사람으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이 정상적인 엘리트 코스도 밟지 않았으며
랍비 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사이비로 취급했으니
사람을 학연이나 지연이나 인맥 같은 것으로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이 사람들의 선입견은
얼마나 단단한지 예수님의 권세 있는 가르침을 들고
놀라면서도 결코 인정할 수 없다는 뜻으로
이 사람은 배움이 없는 사람인데
어떻게 글을 아느냐 빈정거리는가 하면[7:14-15]

심지어는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올라온 무리를 선동하여
예수님을 귀신 들린 자[귀신들려서 미친 자] 정도로
취급하여 대적하였으니
예수님의 심적 고통이 얼마나 컸겠는지 짐작이 간다.

그런데 자신을 이처럼 함부로 막 대하는 사람들에 대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면
초막절 절기에 예수님을 상대했던 사람들 중에
예수님 편에 서서 예수님을 이해해 보려고 한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을 엿보게 된다.
모두가 다 한 통속이 되어 몰이해로 예수를 대적하였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 도다 [7:21]


예수님은 여기서 앞선 5장에서 있었던 일 곧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인을 고쳐준 사건과
그 때 자신을 죽이려했던 일들과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말씀 하시는데 [요5:18]

여기서 다시 한 번 안식일 논쟁을 재 점화시키시며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신다.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7:23]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팔일 째 되는 날에 할례를 해야 하는데 [레12:1-3]
그들은 이 법을 지키기 위해 팔일 째 되는 날이
안식일 이어도 안식일 규례와 관계없이
남자 아이의 생식기에 할례를 행했던 바

예수님은 자신이 안식일에 생식기 하나 정도가 아니라
사람의 전신을 몽땅 다 건전하게 해 준 이 좋은 일이
어찌 위법이 되겠느냐고 도전하시며
그들이 자기들의 편의주의를 따라 행하고
자신들의 좋을 대로만 해석하는 완악함을 지적하시며
안식일에 선을 행하신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신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막2:27]

묵상적용

오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가장 마음 깊이 닿아지는 묵상의 소재는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신 예수님 이다.

당시 초막절기에 운집한 사람들 중에는
본래 예루살렘 시민들이 있었고 또 외지에서
절기를 지키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도 있었으며
이들의 동태를 감시하고 분위기를 장악하려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곳곳에 배속된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예루살렘에 운집한 사람들의 초미의 관심은
예수님 이었고 또 그들의 대화가
예수님에 대한 것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7:11-13]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신경이 곤두서고
혹시라도 그들의 기득권을 뺏기지나 않을까
잔뜩 긴장한 것처럼 보이며
여론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몰아가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군중들을 선동하여
예수님을 대적하는 쪽으로 몰아간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은 당시 자신의 가르침 앞에
서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모두 다
예수님을 이상히 여기는 편에 섰다고 말씀하신다[7:23]


그가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사53:7, 행8:33]


나는 예수님께서 당면하셨던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보며
내가 주님을 따르는 종으로서
마땅히 가져야할 자세를 되새기게 된다.

1. 어떤 비참한 상황에서도 주님의 인내를 배울 것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서 등을 돌리고
악의 선동자들의 주문을 따라 반대편에 설 때
그리고 심지어 귀신들렸거나
미친 사람정도로 취급받는 수욕의 자리에까지 가더라도
앞서가신 주님을 생각하며 수욕을 참을 수 있어야할 것

2.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을 것

우리 사회가 학연이 아닌 능력사회라고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할 때
그 사람의 학연이나 지연이나 인맥을 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이런 것은 교회에서 담임 목사를 청빙하거나
혹은 부교역자를 뽑을 때도 어김없이 나타나는데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고
사람됨을 따라 판단하는 풍토가
하나님의 교회에서부터 이뤄지지 않는다면
세상에서는 더 기대할 것도 없는 것이다.

언젠가 책을 출판하기 위해 유명한 기독 출판사
두 곳의 문을 두드렸는데 다 거절을 당했다
출판 비용 일체를 다 부담하겠다고 하여도
한 마디로 유명 인사가 아니기 때문에
유명 출판사의 이름으로 내줄 수 없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어 자비 출판으로 책 다섯 권을 출판했는데
이 때 나는 세상이나 교회의 가치관이
별로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왜 사람들이 그토록 학위 세탁을 하려고 하며
왜 그렇게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포장을 하게 되는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사람을 상대할 때 그가 어떤 사람이든지를 불문하고
외모로 바라보는 선입견을 버리고
긍정하는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며
사람의 외모가 아닌 그 사람의 인격과 중심을 보고
받아드릴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겠다.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16:7]


----------[ 말씀에 응답하는 기도 ]----------

낮을 때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셨던 주님 !

이러한 주님께 대한 판단은
마침내 마지막 재판자리까지 나타났고
마침내 십자가로까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공의로 판단하실 이에게 부탁하며
말로 다할 수 없는 수욕 가운데서도
아버지께서 보내신 일을 끝까지 수행하신
주님의 본을 따라서
오늘 나를 세워주신
이 낮은 자리를 싫어하지 않으며
끝까지 주님이 가신 길에 참여할 수 있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