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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당/* 요한복음 *

요한복음 11:17-37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by 朴 海 東 2015. 12. 7.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한복음 11:17-37


1. 이미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라 [11:17]

유대인들에게는 사람이 죽은 후 사흘 째 까지는
죽은 자의 영혼이 자신의 육체를 떠나지 못하고
맴돌다가 나흘 째 떠난다는 미신적인 사고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이유는 삼일 째를 지나 
나흘째에 접어들면 죽은 자의 시신이 부패해서 
썩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수님이 초상집에 도착하신 것이 이미 사흘을 지나
나사로가 이미 무덤에 들어간 지 나흘째가 되었으니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기다릴 것도 없이 
더 이상 소망이 없는 상태를 강조하는 것 같고
한 편으로는 나사로를 살려내신 것이
얼마나 극적인 상황에서 벌어진 일인가를 강조하는
나흘째로써 여기에 기록된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2. 마르다에게 보여 지는 믿음의 명멸[明滅][11:21-27]

예수님이 베다니 마을의 동구 밖에 도착하였다는 전갈이 
왔을 때 마르다는 나가 맞이하고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는 말씀에서 두 자매의 성격상
차이가 또 다시 한 번 자연스럽게 보여 진다. 

다른 복음서에서도 예수님이 이 가정을 방문했을 때
마르다는 부엌에 들어가 부지런히 준비하는 활동성을
보이는가 하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서 
말씀을 들었다고 했는데 
오늘의 말씀에서도 마르다는 나아가 맞이하는 모습을 
그리고 마리아는 앉아서 기다리는 정적인 모습이다

예수님이 베다니 마을 입구에 서 계신 곳은 
동구 밖 무덤이 가까운 곳으로 추정이 되는데 [11:34]
초상집으로 들어가시지 않고 동구 밖에 계신 것은
후에 마리아를 따라 동구 밖으로 나온 사람들 모두가
함께 무덤으로 가서 나사로를 살려 내시는 표적을 
보게 하시려는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이곳에서 마르다는 주님과 주고받는 대화 가운데 
그의 오라비 나사로를 다시 살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졌다가 또 이 희망이 사그라지는 
믿음의 명멸 현상을 보이고 있다.

마르다: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했을 겁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 수 : 네 오라비가 살아나리라 
마르다: 마지막 부활 때에는 살아날 줄 아나이다. 

[마르다는 이미 예수님께 전갈을 보냈던 사람을 통해서
이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이라는 
뜻밖의 말을 전해 들었던 것일까 (?) [11:4]

아니면 예수님의 전지전능하신 신적능력을 믿었다가
또 현실적으로는 오라버니가 지금 무덤에 들어있기에
다시 이 믿음이 꺼져버리는 현상을 반복한 것일까(?)

베드로 역시 풍랑의 바다에 서신 예수를 바라볼 때는
바다를 딛고 섰지만 풍랑을 보면서는 무서워 빠져 들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마14:31]

3. 가장 빛난 예수님의 자기 선언과 
--이에 반응하는 마르다의 신앙고백[11:25-27]

예수님이 마르다와 주고받는 대화 가운데 
다시 한 번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시는 
에고 에이미 [나는 *** 이다]가 나타나는데 
이는 요한복음에서 소개되는 다섯 번째 자기 선언이자
예수님의 자기 계시의 최고 절정적인 말씀으로써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11:25]는 선언 이다

이어서 하신 말씀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영구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영생 선언으로써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와 믿음으로 연합된 자는
절대로 영원한 죽음을 맛보지 않으며
그의 육신과 영혼은 하나님 앞에서 결코 분리됨이
없을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 드리게 된다.[요5:24]

따라서 성도에게는 육체의 죽음마저도 진짜 생명을 
소멸할 수 없는데 육신의 죽음은 영생의 기쁨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통로요, 관문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예수님의 최절정적 자기계시에 반응하여 
마리아는 정말 정확한 신앙고백을 하였는데
이는 이 복음서의 자자 요한이 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과 일치되는 신앙고백이 되었다. [요20:31]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 이십니다." [11:27]

나는 오늘의 본문을 중국어로 읽으면서 
죄와 죽음의 문제를 피할 수 없는 
선교지의  많은 사람들에게
이 기록된 말씀을 꼭 보여주고라도 싶은 
강한 충동이 안에서 부터 솟아 오른다
이 세상에 죄와 죽음과 비참에 빠진 인간을 
구원해주는 이같이 귀한 말씀이 또 어디에 있을 것인가(?)


3.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Jesus wept)[11:35]

예수님과 대화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간 마르다는 
동생 마리아를 불러 예수님께 가보도록 말하는데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달려 나가는 마리아의 
모습이 너무 돌발적인 모습 이어서 그녀가 무덤에
곡하러 가는 것인 줄 알고 초상집에 조문을 왔던
많은 유대인들이 마리아를 따라서 나오게 되는바

이어지는 말씀에 보면 예수님은 바로 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나사로를 살려내는 표적 중의 표적을
나타내시게 되는 바 바로 이들을 통하여 
이 놀라운 이야기가 사방팔방에 퍼져나가게 된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에서 가장 가슴 저미게 닿아지는
말씀의 한 구절이 있는데
그것은 베다니 마을 동구 밖으로 나온 마리아와
유대인들이 우는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며 
불쌍히 여기시고 함께 눈물을 흘렸더라는 말씀이다

어찌 보면 성경 전체에서 가장 짧은 구절이 되는
이 구절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해보게 한다. 

"Jesus wept " (耶魚禾  哭了) -요11:35-

영어 성경에는 단 두 단어로 되어있는 이 구절을
우리말 성경에서는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로 표시했는데

사랑하는 자의 죽음 앞에서 
그리고 그 죽음을 애도하는 사랑하는 가족과 
또 더불어 애곡하는 사람들과 같은 슬픔으로 
아무 말 없이 눈물로 대신 말하는
예수님의 깊은 마음을 읽게 된다. 

성경이 보여주는 예수님의 여러 인성적인 특징은
목마름[요4:7, 19:28] 피곤함[4:6] 사랑함[20:2]
굶주림[마4:2] 기쁨[눅10:21] 탄식[막3:5] 
노여움[막3:5] 등등의 많은 모습을 보여주는데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는 볼 수 없도록
영원히 갈라놓는 인간 슬픔의 극치인 죽음 앞에서
통분히 여기시며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눈물로 대신 하시는 주님의 깊은 마음을 본다

여기서 통분히 여기심은 
인간에게 이러한 고통과 슬픔의 죽음을 가져오게 한
사단 마귀와 죄에 대한 거룩한 격분으로 이해되며 
여기서 불쌍히 여기시는 눈물은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당하는 모든 비참과 슬픔에 
마음 깊이 동참하시고 동정하시며 
대신하시고자 하시는 대제사장적 눈물로 닿아진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히4:7A]

"그는  육체에 계실 때 .........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으로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5:7]

주님 !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비통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슬픈 눈물로 대신하신
주님의 깊은 마음 알게 하시고

눈물 젖은 주님의 눈동자에
내 마음이 닿아지게 하시사
나도 주님의 그 눈빛으로
세상의 슬픔들을 바라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