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유연한 사람되기
▼ 사도행전 21:15-26
묵상내용
내가 신학교 시절 존경함으로 배움을 자청했던 은사님 한 분이
학교의 교수직과 섬기던 교회에서 은퇴한 이후 파격적인 행보를
하고 있는 것 때문에 교단의 신문이나 언론의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신학생들에게 역사신학을 가르치면서 WCC의 잘못된 관행에 대해서도
크게 비판했던 분이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금년 가을 우리나라
부산에서 있게되는 WCC의 지도위원으로 이름이 올라가 있는가하면
최근에는 우리나라 4대종단[개신교/카토릭/불교/원불교]의 모임에도 나가시며
종단 지도자들과 함께 어울리시고 지난 불탄일에는 강남의 유명한 사찰에서
법어도 발표하셨는가하면 또 당신의 교회에 강남 사찰의 법륜 스님을 청하여
교회 앞에 인사도 하게 했다는 등 등 이분이 보여주는 파격적인 행보 때문에
교단 홈피 게시판에는 이 분에 대한 공격성 글들이 도배를 하고 있을 정도다
그러던 중 몇일전 나는 이분이 "쥬빌리 통일 구국기도회"에서 전하는
메세지를 들으면서 이분의 신학과 신앙 그리고 이분이 노년에 이르러
마음에 품게된 십자가 영성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엿보게 되었다
평화와 통일을 위한 십자가 영성/[엡2:13]이라는 제목으로 전한 그 메세지는
지금까지 보수신학의 틀안에 갇혀서 틀밖의 세상에 대하여 문을 닫고 있던
나 자신을 보게 하였고 내가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복음과 구원의 본질을 잃지 않으면서도 모든 사람에 대하여
얼마나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 되야하는가도 일깨워주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흘리심 안에서 모든 장벽을 허무시고 하나되게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랑을 헤아리게 된 이 분은
철저한 보수 신학으로 화석화된 우리 교단 안에서 자칫하면 이단으로 몰릴 수있는
불명예와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이렇게 튀는 행동을 보이고 있는 이유를 알게되었다
나는 그분의 가슴 속에 우리가 원수로 생각하는 북한도 긍휼과 사랑과 용서로
품어지는 것을 보았으며 우리가 부정을 탈가 두려워 감히 상종도 하기 싫은
이교도의 사람들도 화해와 화목의 정신을 품고 다가가는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한 마디로 바울이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같이 헬라인에게는 헬라인같이
약한자에게는 약한 자같이 하며, 굳이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몇 사람이라도 구원코자 하는데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전9: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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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에서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모금한 헌금을
가지고 올라가 전달하며[갈2:10] 또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간증함으로 예루살렘 교회 장로들에게 감동을 전한 후
교회 장로들이 그를 염려해서 전해주는 말과 대처방법에 대해서 수긍하고
율법을 페한다고 소문난 자신에 대한 오해를 풀기위해
율법의 한 의식[나실인 서약]에 참여하게 된다 [행 21:26]
어찌보면 율법을 초월하는 복음의 사도가 된 그에게 율법과 타협하게 하는 일에
굴복하게 만드는 것같은 오해가 따를 수도 있을텐데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서 모든 것을 초월하는 그의 사상에 비추어볼 때
이것은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는 일인 것을 그의 고백을 통해서 보게 된다
---율법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 고전9:20 下]
----------[ 교훈과 적용 ]-----------
예수님은 인자가 되시어 세상에 계셨을 때 율법의 정신과 전통을 따라서
가장 거룩한 삶을 산다고 하는 유대인들 속에서
율법의 근본 정신인 인애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일부러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셨으며 바리새인들의 야유와 손가락 질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자리에 함께 내려가 먹고 마시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셨다
주님이 그렇게 행동하신데에는 다 이유와 의미를 담고 하셨는데
그것은 그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으며
죄인을 얻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죄인의 친구가 되시기 위함이셨다.
지난날 보수적인 신앙과 보수적인 신학에 길들여져있는 나에게
예수님이 했던 것처럼 그리고 오늘의 말씀에서 바울이 보여주는 모습들은
마음으로 용납이 안되고 가히 접근하기 조차 어려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정말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며 주님 안에 내공을 가진
자신있는 신앙에 서 있다면 내가 능히 따를 수 있는 모델이라고 생각된다.
그 누구라도 따라올 수 없을만큼 자신의 확고한 신앙과 신학을 견지하면서도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서라면 자신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바울을 보면서
나는 나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가진 신앙과 신학이 최고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그 안에 갇혀서 화석화 되었으며
나와 같지 않은 사람들과 상종하기 싫어했던 바리새적인 교만을 본다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모든 사람에게 모든 사람같이 되어줄 수 있는
복음의 자유와 유연함으로 나 자신을 단장할 수 있기를 이아침 간절히 기도한다
기도하기
모든 사람에게 모든 사람같이 될 수 있었던
주님과 또 주님의 신실한 종 "바오로" 처럼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고집하는 틀을 벗어버리게 하시고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내가 유연하게 다가갈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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