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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당/사무엘상

▼ 사무엘상 6:1-12 벧세메스로 가는 길

by 朴 海 東 2016. 2. 17.

벧세메스로 가는 길

사무엘상 6:1-12

묵상내용

언약궤를 빼앗아 온후 블레셋 땅에 퍼진 악성 종기와 돌림병으로 인해
블레셋 다섯 성읍인 아스돗/가사/아스글론/가드/에글론 방백들이 내린
최종 결론은 언약궤를 본래의 곳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냥 돌려 돌려보낼 수 없음으로 블레셋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의
의견을 고려하여 돌려보낼 방책으로 세운 것은 다섯 방백의 수효대로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 마리로 속건제를 드린 후 보내라는 것이었다

그러고보면 블레셋 지경에 내려진 이 악성 종기와 질병은 쥐로 말미암아
발생된 페스트로 보여지는데 아마 쥐벼룩으로 인한 감염이 온 도시들을
파멸로 몰아간 것같다

실제 13-14세기에 몽고의 징기스칸 부대가 유럽을 정복하면서 고비사막을
지나며 묻혀가지고 간 쥐벼룩이 유럽에 발병하여 유럽인구의 3분의 2가
죽었다는 역사의 기록도 있고보면
과연 이 쥐가 옮기는 페스트 질병은 가공할만한 위력을 가진 재앙인것같다

그런데 문제는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 마리로 속건제를 드린 후
언약궤를 어떻게 본래의 처소인 이스라엘 진영으로 보내는가의 문제였는데
블레셋 사람들은 이 재앙이 우연하게 발생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이스라엘 신의 노여움으로 발생한 것인지를 알기 위해

기상천외한 방법을 동원하는데 그것은 이 두 마리의 소가
언약궤를 메고가지 못할 충분 조건들을 설정해놓고
그럼에도불구하고 이 젖나는 소들이 언약궤를 메고 간다면
이것은 이스라엘 신의 노여움인 것으로 인정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충분조건의 만족은
1) 새끼를 가진 젖나는 암소이어야 할 것
2) 한 마리가 아니고 두 마리여야 할 것
3) 새끼들은 떼어서 돌려 보낼 것
4) 그동안 한 번도 멍에를 메어보지 않은 소들로 할 것
5) 이 소들이 좌우로 치우치지않고 오직 한 길로만 올라가야 할 것

자신들에게 내려진 재앙이 우연한 것인지 아니면 이스라엘 신의 노여움인지
알아보는 이다섯 가지 충분조건 만족은 대단한 확율을 요구하는 조건들이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그들이라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들이었는데 놀랍게도
오늘의 말씀 마지막 구절은 정확하게 이 다섯가지 조건만족을 완성하고 있다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6:12]

-------------[ 교훈과 적용 ]-----------

우리 앞선 시대의 교회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종이 되어 앞서가는 지도자들은
마치 오늘의 말씀처럼 벧세메스로 올라가는 소처럼 되야한다는 말씀을
자주 전하곤 하여서 나에게도 이 말씀은 나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 말씀이다.

하나님의 언약궤 곧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며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언약의 두 돌판과
하나님의 권위로 사역함을 상징하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 곧 생명의 양식을 담고있는
이 언약궤를 메고가야하는 주의 종들은 마치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처럼

사람이 가장 떼어내기 힘든 자녀의 문제까지도 초월하여
울면서라도 보내심의 길을 가야한다는 도전적인 말씀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 보면 이 언약궤를 지고간 암소들은
새끼들의 울음소리를 외면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않으며
그들이 언약궤를 지고간 그 길의 끝에서 제물로 불살라지게 되는데
오늘의 말씀은 이러한 상황설정만으로도 눈물이나고 감동이 전율된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또 아버지의 보냄을 받아서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이
모두 이 젖나는 암소들이 벧세메스로 가는 마음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여지며

또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말씀을 맡은 것 때문에 모든 것을 초월해야했던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이 길을 따랐고 앞서간 믿음의 선진들이
새끼들을 떼어내고 울면서라도 벧세메스로 올라간 암소들의 길을 간 것같다

블레셋 사람들이 자신들의 눈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을
확인하고 싶어한 것처럼 오늘도 세상은 이 땅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종들에게
이러한 삶의 모습 보고 하나님의 실존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같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이 땅의 교회들을 휩쓸고있는 성공과 번영의 신학들이
이러한 길을 외면하고 또 이런 길을 가게되는 것을 실패한 목회와 사역으로
보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고난과 십자가를 강조하는 신학과 신앙은 희소해지고
예수 잘 믿는 결과를 번영과 축복으로 대체되는 이 시대에
더 이상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십자가의 길로 가는 것은 설자리를 잃고있다

오늘 이 땅의 교회가 너무 힘이 강해져서 더 이상의 눈물도 없고
도리어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벧세메스로 올라가는 소들의 정신을 이어가는 것은

오늘도 자식들의 문제로 고통 받으면서 오지의 선교지에서 수고하는 종들과
오늘도 이 땅 이 도시의 어느 곳에선가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자식들의 눈물을 뒤로한 채 겨우 생존을 위한 생계만을 유지하면서도
묵묵히 이 길을 가고 있는 종들이라고 생각된다.
오늘 이 글을 올리고 있는 나 자신도 이런 은혜를 받고싶고
미력하나마 끝까지 이 길을 따라 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원한다 (*)

기도하기

오직 주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새끼 송아지들을 떼어놓고
벧세메스로 올라간 젖나는 소들처럼
주님께서 내게 매어주신 일을 위해
끝까지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가게하소서

주님이 앞서갔던 길
곧 베세메스의 길이며 십자가의 길을
내가 돌이키지 않고 끝까지 갈 수 있는 은혜를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