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할 수 없다
▼ 사무엘하 6:1-15
묵상내용
[하나님의 나라 관점에서 읽어가는 오늘의 말씀 ]
다윗은 시온산성을 축성하고 궁전까지 완공한 후
왠지모르게 허전했던 것같다
아무리 견고한 성곽을 축성하고 [5:9]
아무리 화려한 백향목 궁전을 지었다하여도 [5:11]
자기 백성 가운데 임재의 처소를 함께하시며
자기 백성 가운데 영광의 임재를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시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을 알았다
출애굽과 시내산 언약 이후 40년 광야를 지날 때에도
그리고 사사시대 400년과
사울의 치세 40년을 지나는 암흑 기간 동안에도
언제나 자기 백성들 가운데 임재의 처소를 나타내시며
자기 백성의 기쁨과 슬픔, 고통도 눈물도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그는 자신이 세운 새로운 도시 시온산 성 안에 모셔야만이
비로서 하나님의 나라요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위업이 완성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언약궤를 모셔오는 일에 총력을 기울였던 것 같다
그래서 이스라엘 무리 중에 무려 3만 명을 뽑아서
이 언약궤를 모셔오는 일에 동원하였고 축하 악단을 만들었으며
가장 화려한 수례를 준비하여 언약궤를 실어 나오게 되었는데
언약궤를 실은 소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 갑자기 뛰게 되므로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가 궤를 붙든것 때문에 즉사하는 사건이 발생되었다
웃사의 죽음은 언약궤를 모셔오는 장엄한 행사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되어 행사는 중단 되었으며
언약궤는 그곳에서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가게 되었다 [6:10]
이스라엘에 그토록 많은 제사장 그룹이 있었고
율법에 박식한 사람들이 많았을텐데
왜 처음부터 언약궤를 취급하는 말씀의 법대로 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이 언약궤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제조를 명하실 때부터 [출25:10-22]
사람의 어깨에 메는 것으로 이동되야 하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궤 양편에 채를 만들어 채를 고리에 꿴채로 두어 빼내지 말도록 하였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특정한 사람들만이 이 궤를 접촉할 수 있으며
어깨에 메어 운반하도록 한 것인데 [민4:5,15, 20]
이러한 하나님의 규례가 무시된 이행사는
처음부터 불행한 사고를 내재하고 출발된 행사가 되고 말았다
왜 그들은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이 언약궤를 례위지파 고핫 자손들의 어께에 메이지 않았던 것일까...?
엘리 제사장 시대에 이 언약궤는 한 번 불레셋에게 빼앗긴 적이있었는데
그 때 이 언약궤 때문에 재앙을 만난 블레셋 사람들이
이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되돌려 보낼 때 수례에 실어 보냈던 것을 기억하고
그 경험과 그 관례를 따라서 이렇게 한 것일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의 무례는 용납하셨다 하여도
이미 주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지 않은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그것이 아무리 하나님 자신을 위하는 것이었고
선한 목적을 가지고 추진된 일이었다 할찌라도 결코 용납하지 않으셨다
거룩한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여 계신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인 언약궤는
일반 사람은 결코 접촉할 수 없고 레위 지파 중에서도
고핫 자손만 어께에 메어 이동하는 권한의 임무를 부여하여 주신 것인데
자신의 창조자인 신에 대해 무감각하며
이성적 사고도 할 수 없는 소에게 언약궤를 운반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영광스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훼손한 죄가 되었고
또 평민인 웃사가 이 언약궤를 만진 것은 더욱 불경한 죄가 되고 말았다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보여주는 이 사건 사고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싶어하는 것일까...(?)
묵상적용
따라서 오늘의 말씀이 보여주는 사고 사건에 대하여
두가지 의문을 가지며 여기에 대한 해답을 신앙과 삶에 적용하고 싶다
첫번 째 질문 :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언약궤를 싣고 베세메스로 올라간 암소는
아직 젖을 떼지 못한 송아지 새끼를 뒤에 두었기 때문에
베세메스를 향하여 곧 바르게 올라가는 충분 조건을 갖지 못했음에도
좌우로 치우치거나 새끼를 찾아 되돌아 가지 않고
곧 바로 올라가도록 그 소의 심리 상태를 하나님께서 주장하셨다면
왜 하나님께서 지금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
바알레 유다[기랏여아림]에서 시온성을 향하여 가는 길에 세워진 소에게는
그 소가 가진 성질 그대로 흥분하여 날뛰도록 내버려 두셨는가....(?)
벧세메스로 올라갔던 암소처럼
차분하게 뚜벅 걸음으로 시온성까지 가게할 수 없었던 것인가......(?)
두 번째 질문 :
소가 날 뛰므로 수례에 실었던 언약궤가 떨어져서 깨질 수 있으므로
웃사가 그것을 손으로 잡은 것은 오히려 안 잡은 것보다 잘 한 것 같은데
왜 그것이 잘못이 되고 죄가 되어 하나님의 노를 촉발시키게 되었을까 (?)
첫번째 질문에 대하여 :
그것은 아무리 선한 목적을 가지고 시작하는 일이라고 하여도
그 일을 추진하는 수단과 과정이 바르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다는 것을 이 사건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 같다
따라서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어떤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는 가가 중요하며
이것은 아무리 하나님을 위한 선한 목적으로 하나님을 일을 한다 해도
그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할 수 없다는 영적 원리로 받아 들이며
하나님을 위한 목적이 선하다면 그 선한 목적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 목적을 이루는 수단과 방법과 과정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선함을 가져야 할 것을 교훈으로 받아 들인다
하나님께 대한 감각이 전혀 없는 소에게
하나님 자신으로 상징된 언약궤를 싣고 가도록 맡기기 보다는
하나님께 속한 신령한 일들을 나의 두 어께에 메고가는
아름다운 헌신으로 나타낼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 드린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하여 :
처음부터 잘 못 시작된 이 일을 바로 잡게 하기 위해서
벧세메스로 올라는 암소의 심리를 주장하셨던 하나님께서
시온성을 향하여 가는 소에게는
소의 심리 그대로 흥분하여 날뛰도록 하셨기 때문에
언약궤가 수레에서 떨어지건 말건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옳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지금 그렇게 되도록 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 언약궤가 깨질 것인지 말 것인지는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었다
그러나 결코 언약궤에 접촉할 수 없는 일반인 이었던 웃사는
언약궤를 붙들었고 그것은 하나님께 보호 받아야되는 자신이
도리어 자신이 하나님을 보호한다는 월권이 되고 말았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접촉될 수 없는 인간이
섣불리 언약궤에 접촉한 것도 큰 죄이지만
언약궤를 보호하려고 손을 내밀어 붙잡은 이 행동은
자신의 위치를 하나님 위에 두게 된 월권적 행위가 되고 말았다.
소의 수례에 실려가는 언약궤처럼
때로 하나님의 교회에서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따르지 않고
인간적이며 세속적인 방법으로 추진되는 하나님의 일들이 많은데
이럴때는 오히려 이런 일들이 망하고 잘못되도록 버려두는 것이 더 낫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지 않고 추진되는 일들이
실패하지 않고 잘 되어지면 잘 되어진 그일이 오히려 재앙이 될 수 있고
그것이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므로 소의 수례에 실려가는 언약궤처럼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잘 못 추진되는 일들을 내가 말릴 수 없다면
그냥 그대로 망하던지 말던지 잘 못되게 내버려두는 것이 잘하는 것이다
잘못되고 있는 일을 잘되게 하려고 웃사처럼 내가 나서면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역행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 !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할 수 없음을 압니다
목적이 선한만큼 과정도 선할 수 있게 하소서
하나님께 속한 신령한 일들을
소에게 맡기는 것처럼 무분별하게 행하지 않게 하시고
나의 두 어께에 메는 수고와 땀으로 이루어 갈 수 있게 하옵소서
그리고 나의 착각으로 인해 잘 못된 일들이 발생하고
주님께서 노하심을 나타낼 때에
신속히 말씀의 원리를 찾아 주의 길을 따를수 있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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