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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당/* 누가복음 *

▼ 누가복음 19:28-40 행복한 나귀

by 朴 海 東 2017. 4. 18.
누가복음 19:28-40

묵상내용

이스라엘의 최북단 헬몬산 [변화산]에서 시작된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전도 여정은 모세와 엘리야로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의논하시고 출발하신 길인데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이 길을 따라 요단강을 따라 내려가는
데가볼리와 베뢰아를 지나 사해 북단 도시 여리고에서
잠시 숨을 고르신 후 이제 예루살렘 인접 마을인
베다니, 벳바게 마을에 이르러 마지막 일주일 여정에 들어가신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이 복음서의 저자 누가는
예수님이 여리고에 있는 삭개오의 집에서 출발하시면서
예루살렘을 향해 앞서서 가시더라는 의미심장한 운을 떼고 있다[19:28]

이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하라고 하신 모든 일을 마치시고
공생애 3년 사역 가운데 세 번째로 맞이하는 유월절기에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면서
예수님은 스가랴의 예언을 따라 나귀 새끼를 만나서 타고 가야하는
베다니-벳바게 마을에서 마지막 숨 고르기에 들어가신 것 같다.

여기서 예수님은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맞은 편 마을에서 가서
나귀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인데
풀어서 가져오라 하시며 그 임자들이 왜 풀어 가냐고 하면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라고 할 말도 알려 주신다.[19:33-34]

예수님을 추종하는 제자들이 12 명에 국한 되지 않고
이스라엘 처처에 산재하였던 당시 상황을 감안해보면
이 나귀의 임자들은 스가랴의 예언을 성취하게 하는
이 영광스런 일을 위하여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꿈으로든지 아니면 어떤
신비한 내통을 받았기 때문에 "주께서 쓰시겠다"는 이 말을 암호로 하여
기꺼이 자신들의 것을 주의 쓰심에 드릴 준비가 되었던 사람들인 것같다.

예루살렘 입성을 앞에 놓고 제자들은 물론 유월절기를 지키러 올라온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통해서 무엇을 기대한 것일까
그들은 마치 왕의 행렬을 준비하는 것처럼 나귀 새끼 위에 겉옷을 걸쳐
예수님은 태우게 하고 심지어는 길바닥에 까지 옷을 펴고 지나가게 하며
왕의 찬가를 불렀는데 이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노골적인 표시로써
당시 예루살렘의 질서를 유지했던 총독과 로마 군병들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위험 신호로 전달되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왜 평소 병인들을 고치시고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시며
조용한 가운데 자신의 사역을 펼쳐가기 원하셨던 예수님이
왜 스스로를 위험에 처넣어지게 만드는 이런 위험천만한 이벤트를
묵묵히 받아 드리시고 또 이렇게 하지 말라고 만류하는 바리새인들에게도
만일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까지 하신 것일까 [19:40]

그렇다 예수님은 지금 아버지의 시간표에 따라
이제 자신이 생애 마지막 순간에 도달하여 있음을 인지 하셨고
또 바로 이 때가 스가랴의 예언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자신이 평화의 왕이시며 겸손의 왕을 상징하는 표시로
나귀를 타고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사지[死地]로 들어가야할 때인 것을 분명히 하셨으며
따라서 몇일 후 있게 되는 십자가의 죽음이
사람들에게 은페되지 않은 곳에서 독살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알게 되는 죽음이 되도록
이렇게 정치적 위험을 감수하는 돌발적인 왕의 행차로써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으로 받아 드린다.

또한 이렇게 하심으로써 예수를 죽이려는 종교지도자들이
민란이 날까 두려우니 명절(유월절)에는 말자고 한 음모를[마26:5]
앞 당기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자신을 유월절 어린 양으로 드리게 하신 것으로도 받아 드리게 된다.

묵상적용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행렬을
나의 묵상 가운데 그려보면서 왠지 모르게 나의 마음은
예수님을 태우고 수많은 사람들 사이로 지나가는 나귀에게 향하게 된다.

당시 힘으로 지중해 연안 국가들을 평정한 로마제국은
팍스로마가 의미하는 것처럼 평화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힘으로 제압하고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출병하여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마다
위풍당당한 군마를 타고 입성하며 백성들의 환호를 받았다면

예수님은 전쟁이 없는 평화 시대의 길거리 운송 수단으로 상징되는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므로 그가 평화의 왕이시며
자기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섬기는 겸손의 왕으로서
자기 백성을 향하여 나가시는 것을 알리신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선지자 스가랴는 오실 메시야의 시대를 바라보며
이 점을 놓치지 않고 예언하고 있다.[슥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그런데 오늘의 말씀은 이 나귀에 대하여 말하기를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라고 밝힘으로써[19:30]
예수님을 태우고 갈 나귀가 어떤 나귀 인가를 보여 주는데
그것은 전혀 길들여지지 않아서 길들임이 필요한 나귀 이지만
이 나귀가 예수님을 태우고 갔다는 점에서 의아하게 생각 된다

동물의 속성 상 이 나귀는 분명히 자기 등에 처음 사람을 태웠을 때
반드시 거부하고 싫어하는 저항의 표시를 나타낼 수 있었을 텐데
어쩜 이렇게 오래 길들여졌던 나귀처럼 예수님을 태울 수 있었을까(?)

이는 사무엘 선지자 시대에 불레셋에 빼앗겼던 법궤가 돌아오던 날
하나님의 법궤를 메고 벧세메스로 올라가는 암소들이
자기의 새끼들이 뒤에서 울어대는대도 곧바로 올라감으로
이것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일로 받아드린 것처럼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그날 예수님을 태운 나귀에게도
동일한 하나님의 간섭이 있었던 것으로 받아 드리게 된다.

그렇다 이 나귀 새끼는 겸손의 왕을 태우고 가셔야했기에
그 또한 저항하지 않는 겸손의 나귀가 되야했던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구약성경에서 나귀는 고집스럽고 정욕적인 짐승의 상징이다.
그래서 율법은 하나님의 소유로써
가축의 초태생을 드리는 것과 관련해서
다른 가축들과 달리 나귀새끼는 목을 부러트리라고 했고,
살리려면 어린 양으로 대속하라고 했다. [출13:13]

따라서 나귀가 생명을 얻으려면
어린 양의 죽음이 필요하고,
영광을 얻으려면 예수님의 겸손이 필요하다.

예수님이 생애 마지막 순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굳이 나귀의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것은
스가랴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 외에
또 이러한 나귀와 어린 양(예수님)의 상관 관계가 있고
이것은 또한 오늘 나에게도 적용되야할 상관관계로 받아 드리게 된다.

나귀새끼와 같이 고집세고 정욕적인 내가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 입을 수 있는 것은
나에게 조금도 자격이나 조건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보혈과
예수님의 겸손으로 말미암은 것을 마음 깊이 받아 드린다

오늘의 묵상을 정리하면서
한웅재 씨의 "행복한 나귀" 노래가 생각난다
나도 그 노래의 가사처럼 예수님을 태우고 간
바로 그 나귀 처럼 되고 싶은 마음으로
이 노래의 가사를 나의 기도문으로 올린다.


주님!
저는 그 행복한 나귀 되고 싶어요
묶여있는 저를 풀어주세요
세상의 욕심에 죄에
나 자신을 묶고 있는 저를 풀어주세요

그리고 주님을 섬기게 하세요
주님을 등에 업고 살게 하세요
그러면 세상은 나를 보지 않고
내 등에 업힌 주님을 보게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