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약성서당/* 갈라디아서 *

갈라디아서 5:1-12 성도의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지키내기 위하여

by 朴 海 東 2019. 4. 11.

성도의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지키내기 위하여

갈라디아서 5:1-12



자유! 하면 인상 깊게 떠오르는 두 영화가 있다.
멜 깁슨이 감독이자 주연으로 출연한 브레이브 하트와 
스트브 매퀸이 주연 빠삐용(Papillon)으로 출연한 영화이다

13세기 영국 왕 에드워드 1세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을 주도한
스코트랜드의 지도자 윌리암 엘리스는 동족의 배신으로 잡혀
마지막 처형장에서 무서운 고문으로 죽어가면서
자비를 구걸하면 쉽게 죽도록 해주겠다는 
사형 집행관의 설들을 거절하고 마지막 던지는 말로 
Freedom!(자유!)을 외치면서 칼날에 목이 잘리게 된다. 

단발마처럼 외친 이 “자유”의 외침은 그 사형장에 와 있던
배신자 스코트랜드의 귀족의 마음과 양심에 메아리 쳐
그는 영국 왕의 충성 맹세를 배신하고 
스코트랜드의 자유를 가져오는 일에 자신을 헌신하게 된다. 

한편 영화 <빠삐용>은 남미 프랑스령의 악명 높은 기아나 형무소에서 
탈출을 꾀하는 종신수 앙리 샤리엘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그의 가슴에는 나비(빠삐용) 문신이 있어서 별명이 빠삐용이라 불린다.

그는 잦은 탈출 시도 때문에 마침내 다 이상 도망가지 못하도록 
바다에 상어가 우글거리는 악마의 섬으로 보내진다. 
그러나 그는 이미 노령에 이르렀는데도 날마다 바닷가에 않아
물의 흐름을 관찰하고 연구하여 마침내 탈출을 시도하게 된다.

그가 악마의 섬을 빠져나가기 위해 코코낫 열매를 모아 뗏목을 만들고
자기를 싣고 갈 뗏목과 함께 바다를 향해 몸을 던지면서 
그가 마지막으로 외친 소리 역시 “Freedom!"(자유) 였다. 

나는 오랫동안 나의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이런 영화들을 보면서 
인간의 보편적 가치로써 이 “자유”의 소중함을 일깨우게 되는데 
그래서 그런지 오늘의 말씀 첫 구절이 강조하는 “자유”에의 선언이
그냥 가볍게 지나쳐지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5:1]


위의 두 영화에서 추구하는 국가적 혹은 개인적인 자유보다
더 소중한 자유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 영혼의 자유 인데
이것은 죄와 율법을 교묘히 사용하여 
인간의 영혼을 옥죄는 마귀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우리 주님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 희생과 
죽음을 통과하시고 살아 나오셔서 
믿음으로 그와 연합된 자들에게 주시는 자유 이다. 

그런데 이 자유는 너무나 소중한 것이어서
생명보다 귀한 이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하려고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에게 접근한 뱀 같은 존재들이 있다.

갈라디아 교회에는 교묘히 침투한 거짓 교사들이 있었고
오늘날도 연약한 인간의 심리에 죄와 율법 
혹은 율법적 심리를 이용해 접근하는 세력들이 있다.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로 
자유를 얻게 했던 사도 바울은 
지금 거짓 교리로 자유를 침탈당한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굳건하게 서서 “다시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고 호소한다.

한 국가가 억압하는 국가로부터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
치루는 희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엄청난 희생을 딛고 얻은 이 자유를 지켜 내는 것인데
여기에는 자유를 지키려는 의지력과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 할 만한 힘이 있어야 한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희생 위에 세워진 교회에 
성도의 자유를 엿보는 은밀한 마수의 손길이
갈라디아 교회에 뻗쳤던 것처럼  
오늘 우리들의 교회와 성도들의 양심을 위협하는 세력들이 있다.

우리들의 교회에서 건강한 신학의 역할은 
이 은밀한 세력들을 파수하고 방어하는 역할을 하며 
(왜 한 교회의 목사가 무슨 신학을 공부했는지가 중요한 이유이다)
성도 개인의 건강한 신앙은 강한 면역력으로 
이런 병적 신앙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다.

오늘 날 서구 교회들을 무너지게 만든 세력이 자유주의 신학이라면
한국교회의 위협 세력은 율법주의와 신비주의 신앙이라고 생각된다. 

율법주의 신앙은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에 감흡하여 
감사와 믿음으로 받아 드리기보다 
어떤 선동자들의 유혹처럼  병적 자존심이 발동하여 
갈라디아 교인들이 할례나 해와 날과 절기를 지키는 것으로 
자기의 공로(행위)를 덧붙이기 하고 싶어한 것처럼

하나님 은혜와 사랑을 얻어내기 위해 인정받을 만한 
나의 공로를 덧붙이기 하려고 하니 이것은 다만 은혜로 구원받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헛되게 하며 욕되게 하는 것이요 
계속해서 이 덧붙이기를 유지하기 위해 율법의 종이 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신비주의 신학과 신앙은 
하나님의 사랑과 임재 체험을 위해
인간적인 방법으로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최근 우리 한국교회에도 불건전한 신사도 운동 같은 것으로 나타나
성도들의 신앙을 혼란에 빠트리는 일들도 곳곳에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것으로라도 성도들을 미혹하고 혼란케하는 것들에 대해
바울은 오늘의 말씀 마지막 구절에서는 매우 극단적인 표현까지 썼는데
그것은 (할례 주장자들에 대해) 
차라리 너희 자신을 베어버리기 원하다고까지 저주성 발언을 쏟고있다

여기서 너희 자신을 베어버리라고 하는 것은 
할례의식에서 남자 생식기의 표피 일부분을 잘라내는 정도가 아니라
너희 자신의 거시기(생식기)를 예 거세하여 힘을 잃어버리고 
멸망으로 들어가라고 하는 무서운 저주성 발언으로 이해되는데 
순수 복음을 지켜내려는 바울 사도의 마음이 얼마나 통분했으면
이렇게까지 나가야 했는가 하는 그의 모습에서 
순수 복음을 지켜내기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읽게 된다.

오늘의 묵상을 내리면서  복음의 순수를 지켜내려는 사도의 권고처럼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고 바른 신앙에 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얻게 해주신 자유의 가치를 인식하는 것과 
이 자유를 지켜내기 위해 깨어 굳게 서는 신앙을 가지는 것

그리고 어떤 영적 위협 세력도 퇴치할 수 있도록 
평소 영적 강건함을 유지해 나가는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이아침 다시 한 번 마음 깊이 새긴다.


주님! 
생명을 내어 주신 십자가 희생으로
입혀주신 이 소중한 복음과 자유를
그릇된 가르침으로부터 지켜내는 
우리들의 교회와 나의 신앙이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