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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당/* 요한복음 *

요한복음 1:19-28 낮은 곳으로 임하소서

by 朴 海 東 2020. 1. 3.

낮은 곳으로 임하소서

요한복음 1:19-28


로고스[말씀] 찬가에 이어 이 말씀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증언한 
이 책의 저자 (사도)요한은[1:1-18] 이제 오늘의 말씀에서는 
당대의 유력한 증언자이며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된
(세례) 요한의 입을 통해 예수를 증거하고 있다. [1ㅣ19-28]

세례 요한은 본래 사독 제사장 계열의 후손으로 [눅1:57-80]
그는 지금 여기 광야가 아닌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 구룹에 
들어가 있을 사람인데 광야의 사람이 되어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자 하는 듯
광야를 가로지르는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푸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왜 당시대에 신분과 출세가 보장된 제사장 계열에서 떠나
이렇게 광야의 야인이 된 것일까(?)

그가 기인 [奇人]이 되어 튀는 행동을 하는 것 때문에 
궁금증을 가졌던 종교지도자들이 그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그에게 찾아왔을 때 그가 한 답변 속에서 그를 이해하게 된다 

대표단: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세례요한: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다[1:22-23]

세례요한은 자신의 출생에 담긴 비밀을 
이미 그의 부모들로부터 들었을 터[눅1:57-80]
당시 제사장들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서른 살부터 사역에 나섰는데
그러나 그로 하여금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광야로 나가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마치 엘리야를 흉내 내기라도 하는 듯 약대 털옷을 입고 
이스라엘에게 회개를 선포하는 기인 [奇人]이 된 것은
자기 스스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이제 곧 등장하게 되는 예수를 증언하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하여 
말씀과 성령이 그를 광야로 몰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사41:3]

그가 자신에게  찾아와서 당신이 누구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들먹이며 나는 바로 그 선지자가 말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답변한 것을 보면[사41:3]
분명 주의 영으로 말미암은 자의식이 
그를 이사야가 전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자신을 그렇게 일치시키고 그 자의식을 따라 광야로 몰고간 것 같다.



나는 최근 이미 민주화된 우리나라의 다음 과제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고민해 보며 읽게 된 책이 
850페이지 분량의 “문익환 평전” 이었다. 
문익환 목사! 
그는 50대 중반까지도 한신대에서 구약학을 가르치며
카토릭과 개신교가 함께 성경을 번역한 공동성서 번역 대표였는데
그로 하여금 더 이상 책상 앞에 앉는 일을 내려놓고 
마치 세례요한처럼 야인이 되고 제야의 지도자로 나서게 한 것은
박정희 군사 독재시절 의문사한 친구 장준하의 죽음과 
또 북간도 명동촌의 친구 윤동주로 인해 평생에 지게 된 
정신적인 빚으로 그들의 죽음을 비통해 하며 기도할 때 들려진 
내면의 소리를 따라 야인의 길로 나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장준하의 초상화를 앞에 놓고 슬퍼하는 가운데
하늘로부터 오는 내면을 소리를 듣게 되는데 
그가 56세에 분연히 일어서서 당시 재야 인사들을 설득하여 
 1976년 3월 1일 명동 성당에서 시국선언을 발표하고 
감옥에 들어가게 된 것이 시발이 되는 것을 읽어보게 되었다. 

그는 77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우리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다섯 번이나 감옥에 갇히며 또 민족 통일을 위해서라면 
좌파나 우파에 치우치지 않고 좌와 우를 다 함께 아울러 나가느라 
오해도 많이 받아 이 오해를 푸는 것 때문에 마지막 편지를 써놓고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그가 민간인으로서는 최초로 북한의 김일성을 찾아가
통일에 대한 담판을 벌이고 북한의 조평통과 함께 발표한 
4. 2 합의문은 그 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주석 사이에 맺어진 
민족 통일을 위한 6. 15 선언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오늘의 묵상이 어느 날 갑자기 야인이 되고 기인 [奇人]이 된 
세례 요한이나 문익환 목사같은 사랑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은
왜 평범했던 사람들이 어느 날 저렇게 변신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오늘 나의 글을 이 주제, 이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것 같다. 

예수의 전령자로서 광야의 소리가 된 세례 요한이나 
한국 재야의 대표적 인사로서 
통일 할아버지가 된 문익환 목사나 공통점이 있다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그들이 당면했던 시대의 부름이 있었고 
그들의 소명은 자신들 스스로 만들어낸 소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위로부터 주어진 것이며
또 그러한 소명을 자신들의 삶에 받아드림으로
그들의 나머지 인생이 험한 가시밭길 여정이 되었지만
한 알의 밀알처럼 주님을 위하여 자신들을 기꺼이 헌신 한 것이다.

오늘의 묵상을 내리면서 
자신이 부여받은 시대적 소명을 감당하기 위해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기에게 향한 스포트라이트를 
나사렛 예수에게 향하게 하며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하여 
갈릴리에서 온 별 볼일 없게 보이는 한 청년 나사렛 예수를 
사람들 앞에 등장시키고 띄우기 위해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1:27]
자신을 종으로 자처한 세례요한의 고백이 마음 깊이 닿아진다.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주인의 먼지 뭍은 신발, 
가죽 샌들의 끈을 풀어주는 것 같은 일은 
유대인 종들에게는 시킬 수 없었고 이방인 종들이 했다고 하는데
세례요한은 예수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을 이방인 종들보다 더 낮은 자리에 세우는 것을 보며

바로 이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자세야 말로 
나를 소명으로 부르시는 주님 앞에 
자신의 안일을 포기하고 광야를 택하는 야인들의 자세이며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신 예수를 따라 
그의 추종자들이 가져야할 마땅한 자세가 되어야 함을 배운다,



Lord ! 
Let me down lower & low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