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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당/* 요한복음 *

요한복음 3:22-36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by 朴 海 東 2020. 1. 1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요한복음 3:22-36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종들을 생각할 때 마다 
가장 애잔한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다면 
나에게는 세례요한이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 동안 이어진 하나님의 침묵이 흐른 후
과연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처럼 등장하는
구약과 율법을 마감하는 선지자가 되었다 [말4:5]

그는 하나님께서 다시 보내신 엘리야가 되어 
자식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그리고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돌이키기 위해 
회개의 세례를 전하는 자로 사역하였으며[말4:6]
무엇보다 또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처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 자기 역활에 충실하였다

그리고 과연 자신의 장지 손가락으로 가리켰던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예수가 등장 했을 때 그는 예수를 주인공으로 올리고
자신은 구속 역사의 무대 뒤로
그것도 헤롯의 칼날에 의해 사라지게 되는데  

오늘의 말씀은 이 세례 요한과 그에게 세례를 받은
예수님의 사역이 서로 중첩되던 시기에
예수님의 등장을 놓고 그와 그의 제자들 사이에 
주고받은 대화가 소개 되어 있다.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왠지 모르게 세례요한의
일생을 추적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성경 이곳저곳을 펼쳐보면서 그의 행적을 따라가본다

그는 제사장 사가랴와 마리아의 친족 엘리사벳 사이에
태어난 인물인데 예수님의 출생과 관련하여 
요셉보다 마리아의 관점에서  기록한 누가복음 1장에는
그가 예수님보다 6개월 앞서 출생되는 것으로 나온다[눅1:30]

그는 일찌기 유대 광야로 나가서 야인으로  산 것 같은데  
그가 빈들에서 지낼 때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다[눅3:2]
그는 엘리야처럼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마3:4]
매뚜기와 석청으로 음식을 삼고 살면서 회개의 세례를 전했는데
광야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몰려왔다고 한다.[마3:4]

그가 처음 세례를 베풀었던 곳이며 예수님도 세례를 받은 곳은
요단강의 최 하류이며 사해바다의 북쪽  끝 지점인데 
이곳 사해 바다가 지중해보다 해면하 -400미터라고 하니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푼 이 지역이 
갈릴리 호수로부터 시작하여 사해바다 까지
요간강 물줄기가 흐르는 개곡 중에서 
가장 지형이 낮은 곳으로 이해하게 된다

한 편 예수님께서도 서른 살쯤 되어 집을 떠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게 될 때 이렇게 낮은 계곡에 위치한
요한의 세례 장소로 찾아와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은 
깊은 의미를 시사하기도 하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처럼 겸손의 골짜기, 낮음의 골짜기로
내려가지 않으면 않된다는 것을 엿보게 된다. 

그런데 오늘의 말씀에 보면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곳이
요단강 건너 베다니가 가까운 강가에서 
살렘 가까운 애논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 책의 저자 요한이
"그 곳에 물이 많음이라" 한 것을 보면
이렇게 변수가 생긴 것은 가뭄으로 요단 강물이 줄어들어
세례 터가 바뀐 것을 이해하게 된다.[3:23]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터진다. 
요단 강물이 줄어들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세례 요한의 세례 터와 예수님의 세례 터가 서로 가까웠다는 것과
이전에 세례요한에게 열광하고 모여 들었던 수많은 인파가 
예수님의 세례 터 쪽으로 몰린다고 하는 점 이었다 

이어지는 말씀에 보면 예수님이 직접 세례를 베푼 것이 아니고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고 했는데 어찌 되었던 이곳에서 
세례를 베풀면서 많은 추종자들이 생긴 것은 틀림없고 [4:1-3]
이것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시기심의 발로가 되었으며 
따라서 본문이 보여주는 것처럼 예수님의 등장에 따른 변수로 
세례 요한과 그의 제자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가 나오는 것 같다.



그러나 자기 제자들이 부추기는 비교의식과 시기심에도 불구하고
세례요한은 자기 제자들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자신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하며 
예수님의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 것을 자기 제자들에게 분명히 한다.
1
예수의 등장과 그가 하는 일은 
자기를 위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 부터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다[3:27]
2.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니 너희는 나를 위해 시기하기보다 
내가 그의 앞에 보냄을 받은 자라고 증언해야 한다. 
3.
그가 신부를 맞이하는 신랑이라면
나는 그를 신부에게 인도하는 신랑의 친구에 불과하며
나는 이런 역할 만으로도 기쁨이 충만하다. [3:29]
4.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3:30]

이어지는 오늘의 말씀 전부가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높이고
증언하는 것들로 가득 찬 것을 보면서 [3:31-35]

자신은 한 없이 추락하더라도 
오직 예수를 높이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세례 요한을 보면서
마음이 숙연해지고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참 종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 세례요한에게서 해답을 본다.

이처럼 예수님과 세례요한의 사역이 서로 중첩되어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갈등이 되었던 이 시기를 지나서
세례요한은 어디로 갔으며 어찌 되었는지 궁금한데
또 다른 복음서에 나오는 말씀들과 성경 지리를 놓고 보면서
그는 예수님과 사역이 서로 중첩되는 것을 피하며
예수님의 사역이 본격화 되도록 감옥으로 가게 되는 것을 본다.

(내 생각에는 그가 지금까지 길 잡이 노릇했던 예수님이 등장했으므로
사람들이 더 이상 자신을 향하지 못하게 하고 
오직 예수님만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하기 위해서 
자신이 감옥에 갈 것을 다 알면서도 헤롯의 권위에 도전하는
강경 발언으로 스스로 감옥행을 택했다고 생각되는데 
이 모든 배후에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섭리가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14:1-12/ 마가복음6:14-29/ 누가복음 9:7-9에 나오는
세례요한의 생애 말년을 보면
그는 당시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을 다스리던 
헤롯[안티파스]의 죄를 지적하는 것 때문에 투옥 된다.

[ 헤롯 안티파스는 자기 동생이면서 이두메 지역을 다스린 
필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자기 아내로 삼은 
이 근친상간의 죄에 대해 세례요한으로부터 책망을 받았다 
당시 헤로디하는 자기 아버지의 이복 동생인 자기 삼촌 
헤롯 필빕과 결혼 했고 여기서 나온 딸이 샬로메 인데 
이처럼 헤롯 왕가는 왕위 보존 때문에 그랬는지 
근친 상간 결혼으로 성적으로도 매우 문란했던 것 같다.]

세례요한의 지적에 대해 헤롯은 양심의 가책을 받았지만 
그의 정부가 된 헤로디아는 가만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자기 남편 헤롯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세례요한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고 세례 요한은 체포되어
사해 바다의 중앙 동편 지역에 있는 헤롯의 여름 궁전 
마케로스:Machaerus]의 지하 동굴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때가 AD 27년경으로 보는데 이곳에서 거의 일 년 이상
갇혀 있다가 헤롯의 생일날 정부 헤로디아의 딸이 
춤 한 번 잘 춘 것 때문에 무엇이든지 주겠다는 실언을 하고 
제 에미의 조정을 받은 딸의 요구대로 세례요한의 목을 
참수하여 쟁반에 담아 주게 되는데 
이러한 세례요한의 말년이 공관 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세례요한의 증언과 그의 말년에 관한 오늘의 묵상을 내리면서 
내 마음에 깊은 울림으로 닿아지는 것은

1.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종은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는 자기 위상을 분명히 하고
자신에 대한 주제 파악을 잘 해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보내신 이의 뜻을 따라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야 함을 배운다.

2. 예수님의 일생이 가축의 우릿간 구유에서 시작되어
십자가에서 마감하게 되는 것과 예수의 증언자로 온
세례 요한이 빈들에서 시작되어 감옥에서 마감되는 것을 보면서
진실로 하나님께로부터 세상에 보냄 받은 종이라면 
세상의 부귀와 영화와 명예 같은 것에 연연하거나 탐내서는 안 되며
도리어 낮은 자리에 내려가는 것도 당연히 여기고 
우리 주님과 세례요한의 길을 따라감을 도리어 감사해야함을 배운다.

3. 그러나 오늘의 말씀에서 정말 가장 마음 깊은 울림으로 닿아지는 것은
세례요한이 자신을 위해서 시기 질투하는 그의 제자들에게 도리어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마음 시린 어록이다. 
그는 어찌 이렇게까지 말 할 수 있었을까..........(?)
나의 사역에서 나의 경쟁자가 생겼을 때 
그리고 나에게 열광하던 사람들이 나를 떠나며 
나를 추종했던 열렬 팬들이 나를 위해 시기할 때
나는 과연 세례요한처럼 이렇게 말 할 수 있을 것인가(?)



오직 예수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명예나 목숨 조차도
모든 것을 초개같이 여겼던 
세례요한이 평생에 품었던
"오직 예수"의 정신을 
내게도 허락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