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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당/* 요한복음 *

요한복음 6:60-71 남은 자와 떠난 자, 그리고 남은 자 속에 숨은 자

by 朴 海 東 2020. 1. 27.

남은 자와 떠난 자, 그리고 남은 자 속에 숨은 자

요한복음 6:60-71


오늘 주일 예배 인도를 위해 먼 길을 떠나야 하기 때문에
어제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이른 새벽에 일어나 먼저 생삶 큐티 글을 올리고
이어서 오늘 강단에서 전할 말씀을 최종적으로 요약하고
집에서 떠나야하는 긴장감을 가지고 오늘의 말씀을 편다

1. 남은 자들과 떠난 자들 

오병이어[五餠二魚]로 오천명 이상을 먹이신 기적이 있은 후 
끝까지 쫓아오며 몰려든 사람들에게
살과 피를 주제로 가버나움 회당에서 
예수님이 전하신 긴 강론[설교]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일으켰고
도대체 알 수 없는 이야기가 되어 그들을 떠나게 만들었다. 

예수님이 전하신 살과 피 속에 담긴 깊은 영적 의미보다
문자적 해석으로 일관하여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서로 수군거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일침을 가하신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6:63]

그러고 보니 앞선 문맥에서 하신 말씀들 곧: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6:4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6:50-51]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6:53]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6:55]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느니라[6:56]  등 등 

어느 말씀 한 구절 빠짐없이 
육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영적인 말씀이어서
육욕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매력이 될 수 없었고 흥미를 잃어버려 
스스로들 밀물처럼 몰려들었다가 
썰물처럼 떠나게 만든 것을 보면서
내 나름대로 마음 깊이 남겨지는 교훈들이 있다.

1.)  성경을 읽을 때 또는 설교를 들을 때:
혀가 맛을 분별함 같이 
내 눈이 성경에 기록된 글자 그 너머에 담겨있는
그리고 글자의 행간과 행간 사이에 들어있는 
더 깊은 뜻을 볼 수 있어야 되겠고
내 귀가 영이요 생명인 말씀을
잘 분별하여 들을 수 있어야 되겠다. 

겉으로 드러난 표면적인 것과 
문자적 해석으로만 흐를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예수님의 가버나움 회당 설교에 반응하는 
청중들의 모습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되겠다. 

2.) 내가 말씀을 전하는 자리에 서게 될 때 :
어떤 내용들은 사람들에게 걸림이 되더라도
영적인 깊이를 담고 전하기 위해서는
문자적 해석으로는 오해가 될 수 있는 것이라도
예수님처럼 숨겨진 진리를 
은유적으로 전하여
귀 있는 자들은 듣게 할 수 있어야 되겠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될 때 
사람들이 많고 적은 것에 치우치지 말 것이며
또 내가 전한 설교에 
사람들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심지어는 배척하고 물러가게 될지라도
마땅히 전해야 할 것을 전할 수 있어야 되겠다. 

3.) 오늘 드리는 참된 주일 예배를 위하여: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리로 에배하라 하셨고
또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하셨는데[요4:23]
오늘 내가 **교회 회중들을 인도하여 
예배의 자리로 나가게 될 때
말씀과 성령이 가르쳐 주시고 
감지하게 해주시는 영이신 하나님 앞에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가며  
주 성령의 도움을 힘입어 예배를 임하고 
회중을 위하여 내가 받은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며 
이 예배에 임재 하여 주시고 교통하여 주시는 
하나님 영광의 세키나를 기대하면서 나아갈 것이다.



2. 남은 자들과 떠난 자들 사이에서 
떠나지 않고 남은 자들 속에 자신을 숨긴 자. 

오병이어 표적 속에 담긴 
예수님의 매시야 되심을 발견하지 못하고
영이요 생명인 그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떠나고 심지어는 
가깝게 추종했던 제자의 무리도 떠나고[6:66]
최종적으로 열두 제자만 남았을 때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외로움을 느끼셨을 것이다.

남자만 오천 명이나 몰려와서 떡을 먹고
열광했던 그 흥분의 분위기는 식어졌고
소수의 열두 명만 남았을 때
예수님은 “ 너희도 가려느냐?” 물으셨고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을 대신하고 대표하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으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답변하였다. 

이어지는 베드로의 고백에서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라고 드린 고백은[6:69]
그나마 주님의 마음에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베드로는 믿음의 법칙에서
매우 중요한 어록을 남겼는데 
그것은 알고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알았다고 하는 순서이다.

사람들은 모두 알아야 믿는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는 신앙생활은 
먼저 믿음으로 알아지는 영적법칙인 것을
베드로의 고백에서 배운다.

그러나 가버나움 회당에서 있었던
길고 긴 강론이 끝나지는 마당에 
주님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을 남기시는데 
그 것은 너희 남은 열둘 중에도
한 사람은 마귀라고 하신 것이다.[6:70]

이 책을 기록한 요한은 그 당시는 몰랐지만
후에는 이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설명을 여기에 첨가시켜 놓았는데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두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6:71]고 적었다.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와중에서도
예수님 곁에 끝까지 남아있는 자의 편에 선 열두 제자는
예수님의 위로요 소망이 되었지만 
그러나 예수를 무너뜨리려는 마귀의 집요한 집념은
이 열두 집단 가운데 가룟 유다를 끝까지 심어놓아
유다가 자신의 속마음을 숨기고 
끝까지 남은 자들 속에 남아있게 하였으니 
이는 실로 간교하고 간사함의 극치요
이런 것을 다 알면서도 
끝까지 품고 나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이야말로
오늘 이 시대에 주님의 길을 따르는 내가  
염두에 두고 나가야 하는 교훈 중의 교훈으로 받아드린다. 

마귀가 심어 놓은 자 가룟 유다의 무서움은 
그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끝까지 남은 자들 편에 남아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을 때리는 것인데 
주님은 오늘 그의 길을 따르는 우리[나]에게 
주의 일을 하면서 왜 항상 방심하지 않아야 하는지
귀하고 귀한 교훈으로 여기 말씀에 남겨주셨다. 

주님!
오늘 저는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먼 곳을 찾아 갑니다 
영이요 생명인 진리의 말씀을 전할 때
성령님께서 이 말씀을 사용하여 주시고
말씀을 받는 회중의 반응에 관계없이도
다만 진실하고 성실하게 
전달자의 역할을 잘하고 돌아오게 하소서. 
그래서 주님의 이름이 
오직 주의 이름만 그 곳에 남겨지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