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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당/* 요한복음 *

요한복음 19:17-27 요한이 바라본 주님의 십자가

by 朴 海 東 2020. 3. 11.

요한이 바라본 주님의 십자가

요한복음 19:17-27


사도 바울이 개척한 교회가 있는 에베소에서 
생의 말년을 보내면서
예수의 모친 마리아를 모시고 살았던 요한은
두 세대 전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면서
이 복음서를 기록하고 있는데 

당시 만연했던 영지주의 이단의 위험과
또 로마제국의 핍박 가운데서도 
주님의 양무리를 지키고자 하는 그의 열성으로
이 복음서를 기록해 나가면서 
마침내 사랑하는 주님에게 
십자가 사형 집행이 언도되었던
그 날의 일을 담담히 기록하고 있다. 

이미 그가 이 복음서를 쓰기 전에 
마태 마가 누가와 같은 주님의 종들이 기록한 
또 다른 복음서들이 초기 교회 안에 있었는데
그는 왜 굳이 또 하나의 복음서를 쓰고 싶었을까(?)

다른 복음서에서 다 담아내지 못한
그 갈보리 십자가 현장에 있었던 제자로서 
요한 자신만이 드러낼 수 있고 
또 드러내고 싶은 관점들을 
그의 신학과 신앙의 관점에서 쓴 것이 아닐까(?)

그래서 오늘의 묵상은
요한이 주님이 지고 가신 십자가의 길을
함께 뒤따라 가면서 
그리고 그 십자가에 못박히신 현장에서 
아프고 떨리는 마음으로 바라보았던
그 가슴을 조금이나마 느껴보면서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신학적 관점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았던
의미들을 오늘 묵상의 기록으로 남기게 된다. 

1.  십자가 처형의 장소로써 (모리아 산) 골고다 언덕. 

오늘의 말씀은 AD 30년 유월절 봄에 있었던 
예루살렘 성문 밖 모리안 산의 한 봉우리 
골고다 언덕 위에 선 세 개의 십자가를 보여준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십자가 처형이 언도 되던 날
예수는 동일하게 사형 집행이 된 두 명의 죄수와 함께 
자신의 십자가를 지시고 이 산정을 향하여 오른다

빌라도 법정에서 나와 안토니오 요새를 지나서 
예루살렘 시가지를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로질러
성문에서 멀지 않은 사형집행 장소로 오르신 것이다

이 사형집행 장소로 곧바로 올라간 것을 보면
이 곳은 이전에도 사형집행 장소로 사용된 것 같은데
로마 제국은 식민지 백성들을 힘으로 누르기 위해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장소에
십자가에 처형한 사람을 매달아 놓음으로 
식민지 백성들에게 공포심을 조장하고 
로마제국의 힘에 함부로 저항하지 못하도록 한 것같다.

이 사형집행 장소는 히브리말(당시 아람어)로는 골고다 이고
헬라어로는 크라니온 그리고 라틴말로는 갈보리 였다.[19:17]

십자가를 지고 산정에 오르는 대목에서 
요한은 예수님이 자기 십자가를 지시고 
갈보리 언덕으로 올랐다고 했는데 
이 것은 2천년 전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이
자기가 번제로 드려질 나무짐을 지고
이 산정을 올라간 말씀이 매치되어 떠오른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장차 인간 구원의 방법으로써
자기 아들을 (희생제물)로 죽이심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구속의 계시를 
아브라함과 이삭 父子를 통해 나타내고 싶으셨는데[창22장]

그 날 이삭의 등에 얹혀졌던 번제에 쓸 그 나무처럼
예수님은 저신이 희생되실 그 나무 십자가를 지시고
바로 이삭이 올랐던 그 산정에 오르심으로[창22:6] 
창세기 22장에서 보여준 그 구약의 계시를 성취하신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주님은 자신을 추종하며
기꺼이 그의 제자가 되기를 바라는 우리[나]에게
자기 십자가[자기 스스로 지는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고 하신다 [눅14:27] 우리는 안다 
그 길의 끝은 다시 사는 부활이며 영광의 면류관인 것을



2. 두 죄인(강도)들 사이에서 십자가에 달리심[19:18]

요한은 예수님이 두 죄인(강도)들 사이에 달리심으로
"그가 자기의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이 성취된 것을 강조한다[사53:12]

거기 이어지는 말씀에 보면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는 해설을 달고 있다. 

오늘도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거처를 
죄인들 사이에 두고 계심을 이 구절 속에서 암시받는다

언젠가 신영복 교수가 자서전 격으로 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을 읽어보았다. 
그가 육사의 교수로 있을 때 통혁당 사건으로 체포되어 
정확히 20년 20일을 감옥에서 보내는 동안에 쓴 
옥중 서신들을 읽어보면서 그 긴긴 시간동안 
그가 자포자기 하지 않고 끝내 살아서 나온 것은
여전히 자신을 기억해 주며  감옥 밖에서도 여전히
자신을 기다려 주고 있는 사람들 때문인것을 엿보게 되었다.

두 죄인들 사이에서 십자가에 달려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오늘 내가 주님의 구원사역에 동참하는 자라면
내가 세상에서 나의 위치를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하는지
엿보게 하는데 그 것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 계셨을 때
경건하다는 자들로부터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 조롱받으며
마지막 십자가 현장에서도 그 모습을 재 연출하셨던 
죄인들의 친구로써 그 가운데 서는 사람인 것을 마음 깊이 새긴다.

3. 명패에 쓰인 글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져서 자기 양심의 소리를 포기한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명패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씀으로 그나마 자기 양심의 소리를
드러낸 것 같은데 이에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써달라는
종교 지도자들의 요청을 거절하면서 
"내가 쓸 것을 썼다"고 말함으로 그들을 엿 먹이며 
그들에게 당한 화풀이를 이렇게 나타낸 것이 아닐까(?)

요한이 보기에 비록 빌라도의 화풀이 같은 마음으로 쓴
"나사렛 사람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라 할지라도
이런 우스꽝스런 아이러니 속에서도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의 왕 "예수", 그 이름의 의미를 
충분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 같다.



4.  십자가 아래 있었던 사람들 [19:23-27]

요한은 그날 그 장소에서 예수의 십자가 현장 아래에 있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극명하게 나누고 있다

예수의 옷을 전리품처럼 나누는 네 명의 군병들과 
예수의 십자가를 고통 가운데 바라보는 일단의 여인들이다.

그런데 요한은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예수의 입었던 옷을 나누어 가지며
나눌 수없는 속옷에 대해서는 제비뽑기 하는 것을 보면서
그가 읽었고 익히 알고 있었던 시편22편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이 이렇게까지 정확하게 성취된 것에 대하여
놀라움을 가지면서 이 내용을 여기에 기록한 것 같다. [19:24]

"저희가 내 겉옷을 나누며
내 속옷을 제비뽑나이다."[시22:18]

그런가 하면 예수의 십자가 아래서 죽어가는 예수의 고통을
자신들의 것으로 받아드리며 슬퍼하는 여인들과 
특별히 모친 마리아에 대하여도 기록하고 있는데

요한복음 2장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서 어머니를 향하여 
"여자여"라고 한 호칭을 여기서 다시 한 번 사용하시는데
이는 요한복음 2장에서 이미 혈육의 정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원자로서 공인이 된 자신을 
받아드리라고 하신 것을 다시 드러내심이며
모친  마리아가 이렇게 받아드려야 어머니의 쓰라린 고통이 
그나마 조금이라도 경감될 수 있으리라는 의미로 하신 것 같다.

그러나 이렇게 3인칭으로 호칭하시면서도 돌아가는 순간까지
어머니에 대한 효심을 잃지 않으시고 사랑하는 제자(요한)에게 
어머니를 맡기며 (이제부터는)네 어머니라고 하신 말씀 속에는 
진정한 영적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담고 계시는데
그것은 혈육의 정보다 더 깊은 예수의 피로 맺어지는 영적 가족
곧 예수가족 공동체며 믿음과 소망의 공동체로서
우리들의 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가르쳐주신 것으로 받아드린다.

주님! 
주님이 남겨주신 이 깊은 영적 의미를 깊이 간직하고
진실되고 순결한 마음으로
주님이 머리가 되신
우리들의 신앙 공동체 교회를 섬길 수 있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