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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당/* 베드로후서*

베드로후서 1:1-11 신의 성품에 참예 하는 길

by 朴 海 東 2020. 12. 29.

신의 성품에 참예 하는 길

베드로후서 1:1-11

 

베드로후서는 주님의 종이며 사도인 베드로가
순교 직전[AD 67-68년]에 쓴 것이라고 하는데
으뜸 되기 좋아하고 다혈질적이며 뿔뚝 성질인 그가
마침내 야곱의 성화된 말년의 모습처럼 변화되고
정말 주님의 성품에 녹아진 老사도가 되어
초기교회 성도들에게 유훈처럼 남기는 말씀으로 보인다.

[뜻으로 풀어서 읽는 오늘의 말씀]

그래서 그런 것일까 베드로후서를 시작하는 첫 구절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우리와 같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자들에게 쓰는 편지라고 밝힌다.

내가 가진 보배로운 믿음이
나의 의가 아닌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로 말미암아
나에게 입혀진 의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이 얼마나 귀하고 안전한 보화인가[1:1]

가끔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나의 의를 가지고 주님 앞에 설 자격을 가지려고 할 때 마다
나는 얼마나 많이 괴롭고 힘들었는지 다시금 깨닫게 된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이처럼 나의 의가 되신
“하나님과 주 예수를 앎으로 인하여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을찌어다“ 축복하는 것을 보니
은혜와 평강은 그냥 절로 와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은혜와 사랑을
더 깊이 알아가는 것과 비례하는 것을 배운다.

예수님도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지 않으셨던가(?)[요17:3]

베드로 사도는 이처럼 은혜와 평강 뿐 아니라
우리에게 이미 주신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들도 역시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앓음으로 가능한 것이라고 하며[1:3]

더욱 특별히 우리에게 주신 보배롭고 큰 약속으로 인하여
우리가 정욕을 유발시키는 세상의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신다고 가르쳐 준다.[1:4]

그렇다면 세상의 썩어질 것을 쫓는 정욕 대신에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길은 무엇인가?
이어지는 여덟 가지에서 해답을 찾게 되는데 그것은;
믿음과 덕/ 지식과 절제/ 인내와 경건/ 형제우애와 사랑이다.

이 여덟 가지 덕목들은 둘씩 둘씩 서로 짝을 이루면서
한 편 앞의 덕목을 발판으로 하여 다음 단계로
점진적인 성화성장의 발전을 이뤄 가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는데
이런 것들을 그냥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노력을 필요로 하는데 여기서 나의 노력이란
나를 성화 성장의 길로 이끄시는 성령의 인도를 따름이다.

1. 믿음에 덕을 세우라 하심은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을
덕스러운 행위로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심인데
이는 믿음이 좋다고 하면서도 부덕한 행실로 인하여
공동체 안에서 상처 주는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정말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 향한
참 믿음의 관계를 가진 성도는
그의 믿음이 유발시키는 덕스러운 행실로써
그의 믿음이 좋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2. 지식에 절제를 가지라고 하심에서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말씀에 따른 영적 지식으로써
지식은 자칫 사람을 교만하게 할 수 있음으로[고전8:1]
자신이 많이 안다고 자부하며
남을 가르치는 싶을 때에도
과연 지신의 힘이 아닌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을 따라
지식의 은사를 발휘할 수 있기까지
주님이 허락하심이 아니면 자신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함이다

3. 인내에 경건을 한 짝으로 두심은
사람이 경건에 이르는 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죄적 요소들이 내 마음을 부추길 때에
참고 견디는 과정을 통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의 거룩함에 내 영혼이 접촉되고 익숙하여 짐이다

그런데 참고 견디는 인내가 어디 그리 쉬운 것인가(?)
한자 인내[忍耐]에서 보는 것처럼 참을 인(忍)자를 보면
칼 도(刀)자 아래 마음(心)이 있으니
이는 마음에 칼을 품은 자세로 참고 견딤인데
주님께서 성도에게 주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한 자루의 칼로 내 마음에 품은 상태로 참고 견디는 것이다

그동안 내 안에 육체의 정욕을 따라가게 만드는 죄의 세력이
얼마나 나를 괴롭게 하였는지
나를 속이고 고통을 준 것에 대해 복수하는 마음으로
원수를 대하듯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한 자루의 칼로 삼고 죄에 대한 독한 마음을 품을 때
나는 쉽게 쓰러지는 유약한 나 자신을 이길 것이며
나를 유혹하는 마귀에게 이길 것이니
이러한 인내의 반복을 통하여
내가 세상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나 자신을 넘어서서
주님의 성품을 본받는 거룩함(경건)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경건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니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훈련)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겠는가(딤전4:7)

 

4.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신의 성품에 참예 하는 자의 완성 점은 역시 사랑이다
사도 베드로의 동료이며 같은 주님의 사도인 요한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지 않았던가(?) [요1서4:16]

사람이 거룩함에 이르는 인내의 결과로
신의 성품에 근접한 경건[godly]에 이르렀을 때
자칫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타락한 천사장과 그의 추종 천사들처럼
자기 의를 앞세우는 교만의 위협이 스며들 수 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주님의 혈육 동생이자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같은 장로였던 야고보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라(약1:27) 하였으니

여기서 고아와 과부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주님의 가슴으로 돌아보는 사랑을
참 경건한 자의 표지로 앞세우고 있는 것은
믿음에서 부터 시작된 덕/지식/절제/인내/경건이 지향하는
최종 완성 점이 형제 우애와 사랑으로 이어짐으로
신의 성품에 참예 하게 됨을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오늘의 본문 마지막 단락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오래 되었는데도
이처럼 신의 성품 곧 성경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의 성품을 본받는데서 게으르고
성화 성장의 진보가 없으면 그는 소경 같은 사람이며
원시치 못하고[멀리 보지 못하고 현실에 급급한 사람이 되어]
그가 처음 예수 믿고 세례 받을 때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신 것조차 잊어버릴 수 있다고 하신다.

여기서 잃어버린다고 하지 않고
잊어버리게 된다고 하는 것은[1:9]
주님의 택하심을 입어 예수를 믿기는 믿어도
죄 사함이나 구원의 확신 같은
기초적 믿음에서 조차 바로 서지 못함으로
그의 신앙 생활이 늘 흔들릴 수 있음을 경고하신다.

마지막으로 당부하는 사도의 권면은
더욱 힘써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는 표시로써
신의 성품에 참예 하는 길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는
여덟 가지 덕목을 잘 실천해 가라고 하시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결코 실족 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1:10]
주님이 예비 하신 영원한 나라를 넉넉히 주시리라고 하신다[1:11]

주님!
제가 먹고 마시는 것 이상으로
일을 하고 돈을 버는 것 이상으로
신의 성품에 참예 하는 길
곧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는
여덟 가지 덕목의 과정들을
나의 신앙과 삶 가운데 잘 이루어가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