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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당/* 베드로후서*

베드로후서 3:1-9(3) 심판 경고와 기다리는 사랑

by 朴 海 東 2020. 12. 30.

심판 경고와 기다리는 사랑

베드로후서 3:1-9

 

세상의 종말과 관련된 오늘의 말씀을 읽으면서 
불현듯 대서양의 차가운 바다 한복판에서 침몰한 
타이타닉호의 최후가 생각납니다.

1912년 4월 14일 타이타닉호는 2,200여명의 승선자 중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을 포함한 1,500여 명과 함께 
북대서양의 차가운 바닷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프랑스 쉘부르를 중간 기착지로 삼고 
미국 동부 뉴욕을 목적지로 하여 
영국의 사우스햄프턴 항구를 출발할 때만 해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꿈꾸며 기대에 부풀었지만
북대서양의  20만톤에 달하는 빙산과 충돌하면서 
1912년 4월 14일 밤 11시 40분 
차가운 바다 한복판에서 최후의 시간을 맞은 것입니다.

당시 배에는 20척의 구명보트가 있었다고 하는데
보트를 수면으로 하강시키는데 문제가 있었는지  
모든 보트 마다 승객들을 다 태우지 못하고 
정원의 절반밖에는 구조하지 못했다고 하니 
이 또한 매우 애석한 사연으로 남아 있습니다. 

자정을 지나 배의 운명이 10여 분 밖에 남지 않았을 때
선장은 무선으로 구조 신호를 보냈고 
당시 10 마일 밖에 지나가던 켈리포니아호가 있었지만
통신 당직자들이 무선 신호를 꺼놓고 있었기 때문에 
구조 신호를 받지 못했다는 것 역시 애석한 사연입니다

오늘의 말씀 베드로 사도의 두 번째 편지의 절정은  
여기 세상의 인류를 태우고 가는 지구 호의 시간이  
언제까지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이타닉호가 불현듯 맞이한 최후 종말의 시간처럼 
불로 살라지는 종말 심판의 시간이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기독교의 세계관은 불교나 기타 종교들처럼 
돌고 도는 윤회적 세계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우주 만물과 인간을 만드신 
처음 창조의 시작이 있었던 것처럼
인간과 우주 만물의 시간을 종결시키게 되는  
마지막 시간이 있는 수직(선) 사관입니다. 

자연적이며 물리적인 세상의 시간(크로노스의 시간)이 
언제까지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과 뜻이 있는 시간
곧 카이로스의 시간으로써 마지막 시간이 있다는 것과
지금 내가 이 세상에서 살고있는 시간은
홍수 심판에서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야 
그나마 살길이 있었던 것처럼 
구조선 예수 호에 승선해야 살길이 있는
매우 긴박하고 중대한 괄호 ( )안의 시간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 하나님의 시간 카이로스에 대해
히브리어 "욤"으로 표시했는데 
(내 생각에는) 이 크고 놀라운 날이 
개혁주의 신앙의 세계관인 
창조-타락-구속(회복)-심판에서 보는 것처럼
첫 번째 욤으로써 하나님의 창조와 
두 번째 욤으로써 타락한 세상을 구원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두 번째 "욤"이 지나갔고 
이제 마지막 세 번째 "욤"으로써 
최후의 종말 심판의 때를 남겨놓고 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여기 세상은 인간의 기원과 존재 의미와 목적이 되는 하나님을 
예배하며 경배하기보다 오히려 경멸하고 조롱하며
세상의 날들이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처럼 생각하는
무지하고 무례하며 교만을 떠는 불 경건함 때문에 
불로 심판하신 소돔 고모라 재앙의 날처럼
다만 불로 살라지기 위하여 잠시 보존되고 있는 목적 외에 
다른 이유가 없다고 가르쳐 주는 오늘의 말씀에서[3:7]
그럼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오늘의 말씀 마지막 두 구절은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 창조자시며 주인이 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거절하는 이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손을 내밀고 계시는 무한 자비의 사랑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3:8-9]-아멘-

 

 

지금까지 예수 믿고 믿음을 지키며 살아오면서
세상이 너무 악하고 세상살이가 너무 험악하여서 
주님께서 이 악한 세상의 운행을 그만 멈추시고 
빨리 끝장내 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많았는데

세상에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말씀 앞에서 
그만 내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적 감정이 꺾어지고  
이 세상과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실눈이 떠지는 것 같습니다.  

공의의 심판을 집행하시기 전에 먼저 
자기 형상대로 지음받은 피조물 인간들에 대한
창조자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과 기다리심이 
왠지 모르게 이 아침 새가슴같이 작은 
내 작은 가슴에도 슬픔으로 닿아집니다.

요즘 탁월한 영성의 작가 화란 출신 헨리 나우웬이 쓴 
“탕자의 귀향”이라는 책을 보고 있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베드로 사도가 무서운 세상의 심판을 이야기 하면서도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적시한 마지막 두 구절은
오늘 내가 심판 받아야 마땅한 이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지고 주님 앞에 서야 하는지도 일깨워 줍니다

먼저는 나 자신이 “돌아온 탕자의 귀향”처럼
이미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신 주님 품에 안식하는
안정된 신앙과 삶이 되어야 하겠고 
한 편 아직도 아버지를 멀리 떠나 제멋대로 살며
세상의 쓰디쓴 비정함을 온 몸으로 느끼며 
외로움 가운데 방황하는 영혼들에 대해
더 이상 세상 죄의 낙에 미련을 두지 말고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다가가며
그들도 함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도록 해야 함을 
이 아침 내게 주시는 교훈으로 마음 깊이 받아드립니다. 

주님!
제가 세상의 방황을 끝내고 주님의 품에 돌아온 것처럼
아직 세상 죄악 가운데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오늘도 공의의 심판을 집행하시기 전
오래 참고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주님의 사랑을 
절박한 마음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랑의 전달자가 되게 하소서